갑자기 눈앞에 어떤 물체가 떨어졌다. 결코 가볍지 않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물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유즈리하의 눈앞에서 한참을 더 굴러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즈리하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이런 한심한 반응은 전사로서 어떨까 싶었지만, 확실히 이게 평범한 반응이리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유즈리하는 스톨을 끌어올려 입가를 가렸다. 멍하니 있었던 탓에 흙먼지가 호흡기로 들어가 버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생각해보면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유즈리하는 미약하게 코스모를 주입한 스톨을 움직였다. 작은 돌풍이 일고, 곧 흙먼지가 날려간다. 동시에 땅바닥을 성대하게 굴렀던 물체가 보여 유즈리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야야야야.”
“야토?!”
틀림없다. 크로스도 걸치지 않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저기서 구르고 있는 건 야토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유즈리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야토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이 생츄어리에 많다. 야토는 약하니까, 유즈리하에게도 그리하는 건 쉬운 일이다.
정작 유즈리하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야토가 왜 집어 던져졌냐 하는 것이었다. 허세가 심하고 겁쟁이이긴 하지만 야토는 의외로 심지가 굳고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남자다. 동료들에게 잘 신경 써주고 여차할 때는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던져질 만큼 나쁘게 비치는 일은 없다.
무슨 상황인지는 전혀 이해 못 했지만 일단 유즈리하는 야토를 돕기 위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좁아질수록 그의 모습이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전신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상처 자체는 전부 생채기에 불과했다. 하긴 스펙터가 습격하기라도 한 것이 아닌 이상 심한 상처를 입을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육체적 상처보다 정신적 상처가 더 큰 것으로 보였다. 도무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만 봐도 그건 명확했다.
“……괜찮나, 야토?”
손을 내밀자 야토가 일순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크게 튕긴다. 하지만 이내 상대가 유즈리하인 것을 알아차렸는지 안심한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에 이렇게 겁을 먹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유즈리하의 손을 잡고 겨우 일어선 소년은 한껏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얼빠진 모습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전혀 반갑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걱정하는 말에 야토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하지만 그의 한심함에 비례해 높은 자존심을 알고 있었던 터라 유즈리하는 속상해 하는 일없이 어깨만 가볍게 으쓱였다. 저리 고집스럽게 굴다가 한 번 된통 깨지면 그때는 정신 차릴 거다. 유즈리하는 그때 손을 보태주기만 하면 된다.
“호오. 여기까지 날아온 건가.”
그 순간 강대한 코스모가 둘을 짓눌렀다. 야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가고 유즈리하마저도 표정을 살짝 굳혔다. 전혀 인간 같지 않은 이 무시무시한 코스모. 수백 년은 족히 묵은 것 같은 이 괴물 같은 기척. 그 주인이 누구인진 유즈리하도 잘 알고 있었다.
“우와아아악!! 왔다!!!”
“하쿠레이 님?!”
야토의 비명과 유즈리하의 외침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하쿠레이는 여기에 유즈리하가 있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는지 일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나이는 헛먹은 게 아니라는 듯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야토에게 보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손녀에게나 보일법한 부드럽고 상냥한 표정이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표정을 바꾸지 않는 하쿠레이를 보고 유즈리하는 확신했다. 절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저 제멋대로에 고집불통인 스승님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게 야토와 관련 있는 일이란 것도.
어떻게 해야 말릴 수 있으려나, 하고 유즈리하는 고민했다. 여신 아테나 이외에는 제대로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영감인지라 그를 말릴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도 아예 수가 없지는 않을 터. 하지만 그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야토가 먼저 움직여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신경 쓰지 말라고, 유즈리하. 이건 내 일이야. 그러니까 내가 해결해 보이겠어!”
2백 수십 년은 살아온 무적의 노인 앞에 당당히 맞서는 15세 소년의 모습에 유즈리하는 감동했다.
“야토…….”
“왜?”
“다리가 한껏 떨리고 있다만.”
“……좀 모른 척해줘라.”
낙심을 감추지 않은 야토가 어깨를 떨군다. 그 모습을 본 유즈리하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야토를 감싸듯 소년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래, 뭐 하는지 보자, 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던 하쿠레이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난은 그만둬 주십시오, 하쿠레이 님.”
“……비키거라, 유즈리하.”
“비킬 수 없습니다. 야토는 제 소중한 친구니까요.”
팽팽한 신경전이 오간다. 원래대로라면 유즈리하가 하쿠레이에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하쿠레이에게 유즈리하는 소중한 제자임과 동시에 손녀와 마찬가지인 아이이다. 유즈리하가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마음 약한 하쿠레이로서는 꺾일 수밖에 없다.
이대로는 의미 없는 소모전만 되풀이될 것이란 걸 깨달은 하쿠레이가 순식간에 기세를 풀었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유즈리하 역시 기세를 풀었다. 둘 사이에 껴서 죽어나는 건 오직 야토 밖에 없었다.
“……이번엔 어쩔 수 없군.”
가벼운 체념의 혼잣말을 떨어뜨리고 하쿠레이는 그 자리를 떴다. 물론 야토를 한 번 노려봐주는 것도 있지 않았다.
짧은 폭풍이 지나갔다. 유즈리하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하쿠레이에게 맞서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인지라 드러내진 않았어도 꽤나 조마조마했다.
어쩌다 야토 때문에, 라고 유즈리하는 생각했다. 그 순간 야토가 입에서 한심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다. 무심코 쓴웃음이 나왔다. 이런 주제에 매번 남자니까, 남자니까, 하는 성차별적 발언을 잘도 한다 싶었다.
“괜찮나?”
유즈리하의 물음에 야토는 고개만 힘없이 끄덕 여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가여워 유즈리하는 저도 모르게 야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야토가 유즈리하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아왔다. 아까의 모습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던 강한 힘으로. 다만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다.
“어─”
“어?”
“어쩌잔 거야!! 네가 그런 모습을 보여 버리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유즈리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토는 계속 제 할 말만 외쳤다.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건 나라고!! 내가 그래야 하는데!!!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이야?”
점입가경. 결국 유즈리하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든 야토의 머리에 가벼운 춉을 날렸다.
아픔에 순식간에 각성한 야토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린다. 강아지 같은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유즈리하는 치미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야토가 말했던 것 중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말에 대답을 되돌렸다.
“내가 지켜주는 게 당연하다. 넌 소중한 사람이니까.”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야토가 눈을 끔뻑인다. 하지만 그 말을 이해함과 동시에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어째서인지 즐거워진 유즈리하의 앞에서 야토가 한껏 붉어진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