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으로부터 조금씩 부상하는 의식과 함께 세이야는 눈을 떴다. 사위는 아직 고요하고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아직 잠에 취해 좀처럼 선명해지지 않는 시각보다 먼저 각성한 촉각에 세이야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살짝 끌어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 인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사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이 사가의 방이니까.
어제저녁, 세이야는 한 달여 만에 그리스를 방문해 쌍아궁의 사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 없는 침대에 앉아 그 주인을 기다리며 시계가 열한 시를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자정은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한 것까지는 분명히 기억에 있다. 아마 그 직후에 피곤해서 그대로 잠들어버렸겠지. 언제나 바쁜 사가가 밤늦게 돌아오는 것은 일상다반사라 기다림은 익숙했지만 어제는 너무 긴장해서 평소보다 몇 배나 피곤했으니까. 덕분에 아무것도 해결 못 하고 이런 아침을 맞게 돼버렸다.
조금 한숨을 내쉬고 안긴 채로 계속 눈을 깜빡거리자 점점 시야가 뚜렷해졌다. 아직 완전히 날이 밝지 않은 것인지 박명에 한 달 전과 비교해 거의 달라진 것이 없는, 어슴푸레한 방안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시간에 일어난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고 세이야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신기한 위화감이 든다.
그대로 계속 누워있으면 다시 잠에 빠질 것 같아 세이야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르지만 업무로 지쳐있을 사가를 대신해 아침이라도 할까 싶어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사가의 품에서 빠져나가려던 순간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왔다. 깨워버렸나, 하고 당황해 옆을 바라봤지만 상대가 일어나려는 듯한 기색은 없다. 자는 척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필시 무의식의 발로겠지. 덕분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숨을 죽이고 세이야는 손끝을 사가의 뺨에 살짝 얹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다. 사람의 기척에 민감한 평소의 그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 자신의 곁에 있어 긴장을 완전히 풀고 있는 것이라고, 세이야는 살짝 자만심에 가까운 생각을 해보았다. 정말로 그렇다면 좋을 텐데.
뺨에 얹은 손가락을 그대로 상대의 입귀로 미끄러트렸다. 희미한 숨결이 손바닥 안에서 흩어진다. 잠시 망설이다 세이야는 사가의 입술을 슬쩍 만졌다. 조금 거칠지만 따뜻하다. 손끝에서 양수에 둘러싸인 듯한 안온함이 퍼져 나간다. 그러고 있던 것도 잠시, 문득 제 행동을 뚜렷하게 깨달았다. 제가 했으면서도 도대체 무얼 한 건가 싶어 세이야는 양손으로 볼을 감쌌다. 스스로도 얼굴에 열이 몰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말이지. 이것도 전부 이 남자가 잘생긴 탓이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용모로 사람을 유혹하니까 저도 모르게 이런 짓을 해버리고 만다.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고 있는데 옆에서 사가가 희미한 신음소리를 낸다. 이번에야말로 잠에서 깨어나려는 모습이다. 자고 있는 옆에서 그렇게 부산스럽게 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돌발적인 상황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세이야가 황망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사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깨끗한 푸른색 눈동자가 드러나 자신을 향한다.
“……세이야?”
눈이 마주쳤다. 저 짙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동자와.
그 순간 세이야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무심코 눈물을 흘렸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굵은 물방울이 뚝뚝 뺨을 타고 흐른다. 깜짝 놀라 황급히 일어나는 사가를 보고 세이야는 울음소리를 물어 죽이며 배를 감쌌다. 불안감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솟아오른다. 이상한 일이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긴장하고 있었을 뿐, 불안 같은 건 전혀 느끼지 않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안해하는 건 전혀 자신답지 않은 일인데, 그렇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사가, 사가아. 나, 나…….”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는 세이야에게 응, 그래, 라고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며 사가가 응수한다. 그 상냥한 태도에 세이야는 더더욱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 이렇게 불안한 것도 모두 사가가 상냥하기 때문이다. 사가가 상냥하니까 불안하다. 전부, 전부, 사가의 상냥함 때문이다. 알고 있어? 전부 당신 때문이라고. 기분 탓인지 그 불안감에 호응하듯 감싼 뱃속에서 괴로운 파동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일그러진 얼굴을 알아챘을까. 세이야의 괴로움을 진정시키려는 듯 사가가 가볍게 안아온다. 세이야는 남자의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렸다. 고동이 겹치고, 익숙한 체온과 향기에 고통이 간단하게 가라앉았다. 두근두근하고 울리는 것은 누구의 심장 소리일까. 목구멍을 맴도는 말도 이렇게 간단하게 꺼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기, 나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 하고.
사실 세이야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다.
미열과 나른함. 성투사로서 매일 몸 상태를 체크하고 있는 만큼 그런 신체의 이상은 금방 알아차렸지만 세이야는 조금 피곤한가, 하고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는 게 옳다. 사가와 연인이 된 지도 몇 년째지만 세이야는 아직 16세밖에 되지 않았으니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 세이야의 상황을 알아채고, 걱정하며, 병원에 데려간 사람은 누이인 세이카이다. 일단 얌전히 따라가면서도 괜한 걱정이라고, 설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정말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아무리 무사태평한 세이야라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정말로 사가의 아이를 가졌을 줄이야.
4주.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고 명확한 증상이 없는 만큼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원을 나온 뒤 세이카가 어쩌지? 하고 걱정스럽게 물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안절부절못하는 누이에게 글쎄, 하고 무심하게 대답하면서 사가에게 말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가가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하고. 자신은 얼마나 제멋대로에 이기적이었는지. 세이야는 그 사실을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사가와 세이야가 연인관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사가는 무척 고지식하면서 올바른 남자이니까 그러니까 분명 제대로 책임을 져주겠지. 그렇지만,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나빴다고 지금에야 깨달았다.
애당초 둘의 관계는 자신이 밀어붙이다시피 해서 시작한 관계이다.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계속해서 고백을 되풀이한 끝에 사가가 곤란한 듯 웃음으로써 승낙한 그런 관계. 때문에 사실은 무척이나 상냥한 사가가 어린아이의 고집에 무리하게 맞춰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거기에 사가는 인기가 많다. 분명 사가를 좋아하는 여성 중에는 자신보다 훨씬 예쁘고 훌륭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자신보다 사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도. 그러니까 불안하다. 내가 당신의 상냥함에 응석 부려 더 행복한 미래를 빼앗고 이를 핑계로 당신을 얽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차라리 당신이 나쁜 남자였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에 한숨이 흘러내린다. 그런 세이야의 머리카락을 사가가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마치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상냥한 손길에 각오를 굳히고 천천히 사가의 품에서 떨어져 세이야는 물기 어린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여전히 긴장되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감추고 더 좋은 사람 만나, 라며 소설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행동하는 건 이기심이니까,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다. 저만의 생각으로 침묵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또한 잘못인걸. 심호흡 뒤, 아직은 납작한 배에 한 손을 올려놓고 세이야는 굳은 혀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있지, 사가─”
나,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
숨이 가빠지려고 했다. 짧은 문장인데도 간신히 끝을 맺었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초조감이 혈관을 뛰어다니고 있다. 손끝부터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세이야는 눈에 힘을 주고 사가를 쳐다보았다.
예상외라고 해야 하나 예상대로라고 해야 하나. 사가는 눈동자만 조금 크게 떴을 뿐 별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모습으로 그런가,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너무 담담한 모습에 맥이 탁 풀리는데 훗, 하고 사가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결혼부터 해야겠군.”
“에?”
내용보다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목소리에 세이야는 무심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떨떨하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이야의 모습에 역시 눈치채지 못한 건가, 하고 사가가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무엇을? 하고 되물을 새도 없었다. 사가가 세이야의 왼손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손가락에 가벼운 입맞춤을 떨어트린다. 남자의 의외에 행동에 희미하게 뺨을 붉히던 세이야는 그제야 제 손가락의 이물감을 깨달았다. 네 번째 손가락에 무언가 끼워져 있다.
아무리 둔한 세이야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도대체 언제?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울컥하고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세이야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이 감정을 도대체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번에는 치미는 충동을 참지 않고 세이야는 남자의 품에 뛰어들었다. 너른 등에 손을 올리자 강인한 팔이 마주 안아온다. 다시 고동이 겹친다. 이건 분명 세 사람의 몫.
황홀감에 취해있는 세이야의 귓가에 사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뭐, 일단 약혼반지라고 해둘까. 어쩌다 보니 아이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린 듯한 모양새지만 사실은 몇 달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고.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투정부리는 듯한 목소리에 세이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기쁘고 행복했다. 아아, 자신은 얼마나 바보였던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겁내고 무엇을 슬퍼했던 것일까.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믿지 못했던 것일까. 사가는 이렇게, 분명히, 제대로 자신을 좋아해 주고 있었는데. 꽉, 하고 체온을 더욱 가깝게 하며 세이야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가, 사가! 정말로 좋아해!”
여느 때보다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아아, 사랑한다. 세이야.”
앞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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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3741자.
사실 내 안에서 더 좋아하고 집착하고 있는 건 사가지만. 아무래도 연륜(..)이 있으니 그게 겉으로는 잘 안드러나는 편. 세이야는 성격상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편. 이라는 느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