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지 못한 사이 호라이께서 자리를 옮겼네요. 벌써 수확을 시작할 계절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연히 포도밭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열매가 아주 잘 영근 게 모든 결실을 주관하는 여신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듯하였습니다. 햇살 아래서 반짝이는 알갱이가 보석 같더군요.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있자니 ―제게 감히 이런 부름이 허용된다면―오랜 친우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당신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요? 물론 현명하고 강한 당신들이라면 문제없이 지내고 있음을 압니다. 제가 걱정할 계제가 되지 않음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염려하는 것 정도는 제게 허락되리라 믿고 싶습니다. 당신들을 사랑하는 이로서.
쓸데없는 말이 길어졌군요. 오늘은 문제의 포도밭 주인 댁에서 묵을 예정입니다. 멍하니 포도를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얼떨결에 초대를 받아버렸거든요. 내일은 아마 포도 수확을 돕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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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쩐지 새벽부터 눈이 떠졌습니다. 방 밖으로 나서자 주인이 뭐 이리 일찍 일어났냐며 웃더군요. 당신께서도 깨어남이 빠름은 마찬가지일 텐데, 손님이라고 배려해주시는 듯하였습니다.
아침을 먹고 오전에는 포도 따는 것을 도왔습니다. 오후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하였는데 뜻밖에 와인을 만든다 하였습니다. 저는 몰랐지만 이곳은 부근에서 맛있는 와인을 생산하기로 유명하다더군요. 저야 워낙에 요리에 실력이 없는지라 혹여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제가 할 일은 힘쓰는 게 전부라 다행이었습니다. 하긴, 초보에게 다짜고짜 중요한 일을 맡기지는 않겠죠.
일이 끝마칠 때 즈음 주인이 며칠만 더 일을 도와달라 하여 당분간은 그의 호의에 기대기로 하였습니다. 보수로 특별히 맛 좋은 와인을 챙겨주신다더군요. 여행할 때 그러한 건 짐밖에 되지 않을 것인데, 언젠가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과 잔을 나눌 날이 기다려져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습니다. 반가이 맞이해 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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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우기가 다가오는 듯싶습니다. 어제도 종일 비가 왔고 오늘 오후에도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부슬비에 가깝긴 하였으나 시기가 시기인지라 제법 쌀쌀하더군요. 당분간은 잠자리를 찾는 데 고생 좀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비는 여전히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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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폴리스에 도착하였습니다. 건물 수도 적고 사람도 적었지만 여기저기서 부드러운 웃음이 끊이지 않는 걸 보니 상당히 살기 좋은 곳 같았습니다.
마을 어귀에 앉아 있었더니 남매로 보이는 아이들이 다가왔었습니다. 낯선 사람이 무섭지도 않던지 여행자냐 물으며 계속 다른 곳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더군요. 평소에도 어린아이는 너무 작아 대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아이들을 무릎 위에 앉히고 얘기를 들려주는 데에는 성공하였습니다. 들을만한 이야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서툰 이야기꾼이라 두어 가지 이야기를 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습니다. 그럭저럭 마지막 이야기가 끝났을 때 즈음 노을이 지던 중이었습니다. 더는 안되겠다 싶어 아이들에게 키스를 해주고 떠나보냈는데 마지막에 한 아이가 퍽 대단한 것을 말하듯 귓속말하더군요. 제가 참 상냥하여 좋았다고. 순간 숨이 턱 막혀버리고 말았더랍니다.
그래, 그랬지요. 제 오라비는 그리도 상냥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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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신전에 있습니다. 별 대단한 일은 아니고, 묵을 곳을 찾지 못해 곤란한 지경이었는데 우연히 이곳을 발견하여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아니, 이곳에서 모시는 신이 헤르메스이니 우연은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아직 신께서 불쌍한 자를 돌봐주고 계신다 믿고 싶습니다.
다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는 모양입니다. 누군가 돌보는 이도 없는지 먼지만 잔뜩 쌓여있어요. 낡기는 하였으나 크게 부서진 곳도 없는 데 어찌하여 다들 이곳을 내버려 두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하니 내일 해야 할 일은 결정되었군요. 이곳에서 머물게 해 주신 감사의 의미로 일찍 신전을 청소하고 떠나야겠습니다. 달빛에 의지하여 글을 쓰는 것도 더는 어려울 성싶으니 오늘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부디 좋은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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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어떤 들판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온갖 꽃들이 서로 어우러지게 피어있는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 이곳이 아르카디아인가 생각하였습니다. 할 수 있다면 모두를 데리고 오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좋아할 이가 많지 않을까요.
한참 멍하니 그곳에 앉아있다 화관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제 손재주야 익히 알고 계실 테니 결과물도 쉽게 예상하시겠군요. 예, 썩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답니다. 그래도 혼자 간직할 것이니 큰 문제는 없겠죠. 또 추억이 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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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스, 오늘은 꿈에서 당신을 만날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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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짐이 너무 많아져서 곤란할 지경입니다. 선물하기 좋은 것을 발견하면 무작정 사들이다 보니 이리 되었습니다. 여행을 떠난 초반에는 그나마 인편을 통해 보낼 수 있었으니 문제가 없었으나 지금 와서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군요. 돈은 둘째치더라도 이대로라면 걷는 것도 불가능하게 될 터이니 어느 정도는 처분을 하긴 하여야겠는데……. 상당히 힘든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행운을 빌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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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상상을 하곤 합니다.
저 말고도 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몇 있었지요. 여정의 도중 어쩌다 그들을 만나는 겁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놀랍게도. 그리하여 웃고, 인사하고, 기뻐하며 실컷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다시 각자가 가야 할 길을 떠나는 거죠. 마치 기적처럼 일어난 일을 가슴에 품고.
저는 운명을 믿지 않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전부 우연의 결과물이겠지만, 그래도 그럼으로써, 우리가 만남으로써 서로 이어져있음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