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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는가요? 저는 지금 바다 위에 있습니다. 수면이 평소보다 반짝거리는 게 아주 예뻐요.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하늘도 푸릅니다. 날씨가 한동안 좋을 것 같아 안심입니다. 바다의 날씨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지만 20년 이상 배를 탄 선원도 그러리라 보장했으니 틀림없겠죠. 


 깊은 곳까지 나왔기 때문인지 바다의 색이 훨씬 까맣군요. 구름도 땅 위에서 보던 것과 모양을 달리합니다. 공기 중에는 항상 소금기가 떠돌고, 바람마저 모습을 바꾼 듯한 기분입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지난 7여년 간 매일 봐왔던 바다인데, 배를 탔다는 것만으로 시야가 너무 달라졌습니다. 여기서라면 밤하늘도 분명 다르게 보이겠죠.


 사실 편지란 것을 처음 써보는지라 시작하기 전부터 걱정이 한가득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편지란 원래 되는대로 쓰는 것이라 말해준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실제로 어떻게든 쓰기 시작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글이 나아가는군요. 말재간이 없는 건 여전해, 제대로 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전해야 할 일을 빠트리게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탄 배는 세 개의 섬을 거친 후에야 육지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섬과 섬을 건너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나흘. 총 20여 일은 넘게 걸리는 뱃길입니다. 운이 좋아 다음 섬에서 할브라타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된다면 이 편지가 보다 빠르게 도착하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두 달 뒤에야 전해지겠군요. 제가 답장을 받는 시간도 그 정도 걸릴까요? 아니, 저는 계속해 이동할 테니 보다 뒤에, 어쩌면 답장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군요. 조금 아쉬운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조바심을 내는 도중, 누군가 두 번째로 들릴 섬에는 그곳에서만 사는 독특한 새가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몸집은 올빼미보다도 작고, 분홍색과 노란색이 섞인 깃털을 가진, 아주 아름다운 새라고 합니다. 설명을 해주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깃털을 보여주었는데 확실히 보석처럼 빛이 나는 색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제게는 너무 아깝습니다. 혹 기회가 된다면 편지에 동봉하도록 하겠습니다.



 *



 생각했던 대로 밤하늘 역시 육지에서 볼 때와 달랐습니다. 주변에 불이라곤 없으니 별이 더욱 깊게 빛을 내는 듯하였습니다. 갑판에 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누군가 별자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항해에서 별은 앞길을 정하는 아주 중요한 대상이라고 하더군요. 점술사들이 별을 보고 인생의 다음을 예측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겠지요. 제게는 모든 별이 비슷하였으나 항해가 길어진다면 구분할 눈도 생기겠죠.


 별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었으나 개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북극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도 위치가 변하지 않는 붙박이별. 어떤 항해자든 간에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더군요. 제 인생에도 북극성이 있었을까요?



 *



 항해가 사흘에 접어들자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곤 수평선밖에 없고, 할 수 있는 건 손에 꼽힐 정도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너무 심심해하니 뱃사람들이 노름을 가르쳐 주었지만 제게는 딱히 맞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서로 속여 넘기기만 하는 것이 무에 재밌을까요?


 정 안 되겠어서 바다에 뛰어들려다가 모두에게 혼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은 해안과 달라 한 번 빠지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더군요. 확실히 제 생각이 짧았지요. 많이 반성하였습니다. 그래도 혼난 덕분에 모두와 많이 친해졌으니 이를 잘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선장은 너 같은 건 처음 본다고 너털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매우 호탕하고 마음이 넓은 이인 것 같습니다.


 그리 심심하면 조각이나 하고 있으라고 노 젓는 이 중 한 명이 통나무를 하나 던져주었습니다. 조각이라니. 저보다 적임자가 많을 것인데요. 제 손재주가 서툼은 그다지 비밀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혼자이니 말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무엇을 조각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단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해보려 합니다. 의외로 적성을 발견할지도 모르죠. 너무 낙관적인가요?



 *



 첫 번째 섬이 보였습니다.



 *



 이 섬에는 사람이 무척 적습니다. 어쩌면 할브라타보다 더 적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많은 지형이라 대부분의 사람이 염소와 산양을 키우며 살아갑니다. 낯을 가리지 않고 다가오는 염소를 보니 기분이 묘해지더군요. 따지고 보면 우리와 동족이 아니었던가요.


 선원들과 함께 식사에 초대 받았습니다. 모처럼의 손님이라 염소를 잡았다 말해주는 게 미묘하기 그지 없더군요. 차마 염소 고기를 먹을 수 없어 거절하자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산딸기를 주어 반갑게 받았습니다. 새콤달콤한 맛이 아직 혀끝에 남아있는 듯합니다. 


 산딸기를 준 이는 키가 크고 옅은 갈색 머리칼의 청년이었는데 그를 보니 필론이 생각났습니다. 그에게는 도움을 많이 받았죠. 할브라타를 재건하여야 할 텐데, 다들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생각해 보니 모두를 돕고 여행을 떠났어야 했음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사려 깊지 못함에 신물이 납니다.



 *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배에 올라왔습니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미뤄두었던 조각을 하고자 통나무를 꺼냈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염소를 조각할까 합니다.



 *



 어젯밤은 바람이 심하였습니다. 아이올로스가 자신의 자루를 무작정 풀어놓은 게 틀림없으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파도가 높았지만 다행히 큰 문제 없이 항해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뱃길을 조금 벗어난 탓에 다음 섬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무사를 빌어주세요.



 *



 벌써 모두가 보고 싶어. (힘을 주어 꾹꾹 눌러 썼는지 군데군데 잉크가 걸려 번져있다)



 *



 이상한 꿈을 꾸어 어제는 밤잠을 설쳤습니다. 꿈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는 데 제가 퓌티아는 아니니 그리 걱정할 일은 없겠죠. 사실 퓌티아였다 하더라도 어쩔 방법은 없었을 겁니다. 온갖 색이 현란하게 날아다니는 꿈이라니,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 불분명하니까요. 


 뱃사람들에게 꿈을 털어놓으니 누군가 향수병이 아니냐 하였습니다. 마음이 불안하니 그런 꿈을 꾼 것이 아니냐고요. 그런가 싶었습니다. 옆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하였습니다. 처음이라 그런 것이니 익숙해지면 오히려 머무는 것이 불안할 것이라고. 그런가 싶었습니다.



 *



 두 번째 섬에 도착했습니다. 편지 첫머리에 얘기했던 대로 신비한 색의 새들이 한가득이었습니다. 모두 나무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이리스 여신의 구름이 내려앉은 듯하였습니다. 주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워낙 애교가 많은 동물이라 가족처럼 키우는 이도 많다고 하더군요. 저도 한 마리 키우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아직 생명을 책임진다는 일은 무섭습니다.


 그래도 먼 훗날, 혹 용기가 생기는 날이 온다면 고양이를 키워 보고 싶어요. 맹랑한 성격이라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이 저에게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고양이와 가벼운 다리로 길을 걸어가는 것은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새의 깃털은 무사히 구하였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깃털로 만든 장신구가 많아 그것을 몇 개 샀습니다.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마침 이곳에는 봄축제가 한참이었습니다. 할브라타보다 조금 늦은 봄축제네요. 그곳에서 축제를 즐긴 게 오래지 않은 일인데 벌써 몇 년은 지난 느낌입니다. 너무 많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좋은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모처럼이니 권유를 받아 축제에 참여했습니다. 꽃 화관을 걸치고, 새로운 옷을 입고, 하지 않던 장신구를 차고. 마음이 너무 들떠 곤란할 정도였답니다. 이전에 춤을 배웠던 게 적잖이 도움이 되었어요. 많은 사람 속에서 나쁜 의미로 그럭저럭 튀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것만한 다행이 어디 있을까요. 이곳에서 받은 꽃 화관은 당분간 침대 머리맡에 걸어두려 합니다.



 *



 세 번째 섬이 보였습니다. 일정이 촉박해 이곳에서는 물만 긷고 떠난다고 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을 기회였는데 말이죠. 그래도 분명 기회는 다시 찾아오겠죠.



 *



 항해 도중 돌고래들이 배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포세이돈께서 저희에게 가호를 내려주시기라도 한 것일까요. 배 주변을 둘러싼 것이 마치 저희를 호위하는 듯하였습니다.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흐뭇한 기분이었어요.


 잠수를 하면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 아는데 돌고래는 정말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생물입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한 번 소개해줄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요. 그래도 짧지만은 않은 생이니 언젠가는 그럴 수 있게 되겠지요. 그때가 기다려집니다.



 *



 오늘은 비가 왔습니다. 갑작스럽기도 하였으나 그동안이 너무 맑은 날씨였던 것이겠죠. 다행히 실처럼 가느다란 비였습니다. 봄이라 차갑기는 커녕 미지근하더군요. 투둑투둑 갑판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너무 좋아 한참을 밖에 서 있다 가벼운 감기에 걸려버렸습니다. 예상한 대로 엄청나게 혼이 났어요. 지금은 충고를 받아들여 선실에서 모포를 둘러쓰고 큐케온을 마시고 있습니다. 투덜대면서도 요리사가 끓여준 것입니다. 다들 너무 상냥한 사람들이라 헤어질 때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 같습니다.



 *



 항구가 보입니다.



 *



 배가 정박하였습니다. 온갖 배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하던데 아니나 다를까, 할브라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열흘 정도 머무를 계획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니 이곳에서 정보를 모아 앞으로의 목적지를 정확히 정하려고요.


 할 수 있다면 이곳의 풍경을 자세하게 전해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때마침 할브라타로 떠나는 배가 있다 하여 그러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다음 배는 보름이 지난 후에나 있다 하니까요. 부득이하게 여기서 마치게 됨을 용서해 주십시오. 편지는 필론의 앞으로 보낼 것인데 그가 잘 전해주리라 믿습니다. 필론, 짧게나마 이곳에 당신을 향한 안부를 적을게. 부디 잘 지내기를.





 *




 어느 때고 저는 모두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습니다.


 때로 꿈에서 모두의 모습을 그려 아쉬움에 깨어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움이 슬픔이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언제나 저를 생각해 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제가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이 반갑게 맞이해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는 혼자 눈물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끝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여기서 줄입니다. 총총.



당신의 방탕한 제자로부터.




 추신. 허락된다면 다른 친구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기드온 선생님.






-

5~6월 뛰었던 커뮤 할브라타의 엔딩 로그.

스스로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맘에 들었는지 계속 쓰고 싶어서 카테고리 하나 만듬

편지, 라기보다는 일기에 가까운 쪽지 형식이므로 짧은 글이 이어질 것 같다

시기는 전부 제각각에 불명인 상태로.

.......두어 번 더 쓰면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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