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또 다른 악의 인격, 통칭 검은 쪽이 저지른 일이지만 사가는 그 또한 자신으로 인식하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성전이 끝난 후 여신의 자비로 모든 세인트들이 부활했을 때에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만 더 심해져 이 고지식하고 묘하게 소심한 데가 있는 남자는 다시 한 번 자결을 시도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런 사가를 막은 것은 아테나, 키도 사오리였다. 곧 서른이나 되는 주제에 눈물이나 줄줄 흘리고 있는 남자에게 여신은 온화하고 자애로운, 그러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고했다.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그를 용서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살아가라고. 죽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살아, 수많은 선행을 쌓아,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갚아 나가라고.
자신이 죽였던 교황 시온과 자신이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수좌─사지타리우스─의 아이오로스에게서도 어투는 다르지만 비슷한 내용의 말을 듣고 사가는 감동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성역을 위해 자신을 다 바치기로 맹세했다.
그리고 현재.
끊임없이 몰려드는 서류의 산과 동료들의 동정 어린, 그렇지만 쥐뿔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시선 속에서 사가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건 혹시 아테나와 시온 님과 아이오로스의 복수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지만 사가는 그만큼 절박했다.
그저 태풍을 넘긴 것으로 끝이 아니다. 무엇이든 뒤처리란 게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 성역을 휩쓸고 지나갔던 태풍은 그냥 태풍이 아니다. 무려 성전이라고 하는 세계 멸망 급 재해였다. 뒤처리가 얼마만큼 고달플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사가는 주변의 도움조차 바랄 수 없었다. 세인트란 기본적으로 몸을 쓰는 데 익숙한 족속들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머리를 쓰는 덴 젬병이란 소리다. 제아무리 최상위 계층에 군림하고 있는 골드 세인트라고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마지막 밸런스 패치로 유이唯二하게 서류 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인 므우와 카뮤는 그들이 할 일만으로도 바빴다. 참고로, 실제로 일을 처리해야 할 교황 시온은 아테나의 호위 겸 보좌를 핑계로 절찬리에 땡땡이를 즐겼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열심히 생각해봤지만 역시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사가는 쓸데없는 데 심력을 소비하는 대신 다시 서류를 들었다. 위가 따끔거렸지만 이미 익숙해졌기에 가볍게 무시. 세인트 주제에 만성 위궤양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코웃음 칠 일이지만 사가에겐 이미 당연한 사실이 되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다면 매일 밀려오던 서류의 파도도 최근에는 슬슬 잠잠해질 기색을 보인다는 것이다. 성전이 끝난 후 반년, 사가의 말 못할 노력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부터 보답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잔혹한 운명의 여신들은 아직 사가의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사가여, 새로운 세인트 후보생이다. 내 제자로 들이려고 한다.”
사람을 짐짝처럼 어깨에 메고 집무실에 쳐들어온 샤카를 보고 사가는 무심코 옆에 놓여있던 잉크병을 움켜쥐었다. 만약 사가의 인내심이 조금만 부족했다면 이 잉크병은 광속으로 샤카의 안면을 향해 날아갔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저 남자라면 당연히 피해냈겠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자신을 억누른 사가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샤카와 싸워봤자 자신에게 득이 될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싸움의 여파로 서류가 더 늘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다음 버고는 분명 안드로메다인 것으로 아는데.”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사가는 간신히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 만성 위궤양에 이어 만성두통까지 생길 순 없는 일이다. 허나 그런 사가의 노력을 무시하며 샤카는 모습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건 그완 별개의 문제다.”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하지만 샤카.”
“음?”
“본인 의견은 물은 건가?”
사가는 남자의 어깨 위에서 반항, 이라고 해야 할지 이상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극히 타당한 물음이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 샤카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물어야 하는가?”
아, 위가. 머리가. 이제는 화낼 기력마저 잃어버린 사가는 지친 몸짓으로 손을 내저었다.
“……일단 내려놓고 얘기하지.”
의문을 표하면서도 샤카는 짊어지고 있던 사람을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제대로 모습이 드러난 상대를 보고 사가는 조금 놀랐다. 몸집이 조그만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여성이었다. 동양인이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사가는 그녀가 스물쯤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외에는 별로 특기할만한 사항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인데 기분 나빠하고 있다는 게 다 보이는 점이 조금 신기했다.
여자의 얼굴이 사가에게로 향했다. 자신이 아는 소년과 닮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아 사가는 무심코 어깨를 떨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저절로 묘한 표정이 되어버린 사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는 입을 열었다.
“납치당했습니다. 도와주세요.”
역시 납치였냐.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침착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가는 책상 위로 엎드렸다. 지상의 사랑과 평화를 지켜야 할 세인트가 이제는 역으로 납치라는 극악무도한 범죄까지 저지르다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기만 하다.
사가(29세, 제미니의 세인트 겸 교황 대리)는 차라리 교큐토스로 되돌아가길 강력하게 희망했다.
교황 대리에게 맡겨진 직무는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전부 빠르게 처리해야 함은 물론이고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다 써서 집중해야 하는 일들뿐이다. 그런 일들을 처리하면서 다른 사소한 일─ 예를 들어 갑자기 동료가 지나가던 사람 하나를 납치한 것에 대한 뒤처리 같은 걸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사가는 자신이 누가 봐도 한계 직전, 조금만 더 건드렸다간 펑크 나는 게 확실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란 걸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깔짝댔다간 정말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사라진 줄 알았던 또 다른 인격이 부활한다든가 하는 일 말이다. 그렇게 되면 동료들에게 민폐도 이만저만한 민폐가 아니다.
때문에 사가는 제대로 된 일 처리와 성역의 안녕을 위해서 사려 깊고 다정하지만 필요할 때는 칼 같은 목양좌─아리에스─의 므우에게 샤카의 일을 인계했다. 여기서 미리 말해두지만 귀찮은 일을 떠넘긴 것은 절대 아니다. 아마도.
그리고 므우는 현재 가해자(샤카)와 피해자(샤카가 데려온 여성), 수습자(자신) 그리고 절규에 가까운 코스모 통신을 도청한 끝에 발랄하게 끼어들어 온 제삼자(아테나)가 만들어낸 기묘한 4자대면 현장에서 혼자만 약삭빠르게 빠진 사가를 속으로 열심히 씹어대고 있었다.
‘왜 하필 저한테!’
물론 므우도 그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눈치 없이 차나 호로록 마시고 있는 저 샤카를 감당할 사람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얼마 없는 사람들도 므우를 제외하면 다 머리가 안 되거나 성격이 안 되거나 혹은 둘 다 안 되었으니까. 이런 게 지상의 사랑과 평화를 (이하생략) 세인트들의 실체다.
한숨을 억지로 물어 죽이며 므우는 현 상황을 다시금 살폈다. 바로 앞에는 언제나와 같은 모습의 샤카, 그 옆에는 상황이 거북스러운 듯 계속 찻잔만 만지고 있는 여성, 맞은편 자신의 옆에는 속을 알 수 없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테나, 그리고 분명 좋지 않을 표정을 짓고 있을 자신.
마치 미래의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결혼 허락받으러 온 상황 같네, 까지 떠올리고 므우는 그 생각을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결혼허락은 무슨. 저 인간이라면 장인어른과 장모님조차 무시하고 제멋대로 추진할 텐데.
“이름을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한참 상념에 빠져있던 므우는 옆에서 들리는 아테나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 했다.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쳐다보자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사라입니다.”
여성치고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므우는 무심코 반문했다.
“사라Sarah?”
“아니, 사라Sala요. 사라쌍수 할 때 사라에요.”
사라쌍수 아시려나? 하고 여성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므우는 아테나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마주쳤다가 샤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다마다요. 어쩌다 그런 이름을 가져서.
므우가 속으로 한탄하건 말건 샤카는 처음에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얼핏 보면 재수 없는 웃음이지만 므우는 저 샤카가 실제론 굉장히 기뻐하고 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과연, 운명의 여신은 세심한 곳까지 안배해 놓았군. 이것이야말로 별의 인도, 숙명이 아닌가. 그러니 내 제자가 되어라.”
“죄송한데 이 사람 원래 이렇게 남 말 안 듣나요?”
“슬프게도.”
서로 시선을 마주친 므우와 사라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을 새어 나왔다. 누가 뭐라 하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 다 국경과 성별과 나이와 그 외의 기타 등등을 모두 넘어서 서로를 깊게 이해했다.
어쩌다 샤카에게 걸려서……. 고생하시는군요. 아니요, 전 그래도 괜찮은 편이죠. 이번만 넘기면 되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 같은 데 괜찮으세요? ……굳이 잔혹한 현실을 일깨워주시지 않았어도 괜찮았습니다만.
피해자들 사이에서 동정과 동지애가 흘러넘치는 훈훈한 광경, 이었지만 정작 가해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불만이 가득한 듯, 옆에서 두 사람의 말 못할 공감대를 살펴보던 샤카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째서 그렇게 싫어하는 거지? 내 제자가 될 기회는 좀처럼 없는 것이거늘.”
저 목소리가 마치 토라진 듯 들리는 건 정신의 안정을 위해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며 므우는 냉정하게 샤카의 말을 잘랐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가치관이 있는 법입니다. 자신의 잣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세요, 샤카. 게다가 다른 무엇보다 납치는 범죄가 아닙니까.”
“무슨 소리. 제대로 동의는 받았다.”
샤카의 말이 사실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므우는 무심코 사라를 바라보았다. 정말입니까? 혼란이 가득 담긴 눈길을 받은 사라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퍽이나 그러겠어요. 그럼 그렇지.
이제는 거짓말까지 합니까? 하는 심정을 담아 쏘아봐 주자 샤카가 코웃음 친다.
“나와 함께 가자, 라고 말했을 때 네, 라고 대답하지 않았느냐.”
“그건 반문의 네? 였습니다만.”
“어쨌든 네라고 대답한 건 맞지 않느냐.”
“통역관이 시급합니다.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말이 안 통해요.”
“사라. 이미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사람은 없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라가 절망한다. 그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므우는 자신이 저지른 일도 아닌 데 괜한 죄책감을 느꼈다. 반면 현재진행형으로 일을 저지르고 있는 당사자는 오히려 뻔뻔하게 가슴을 펴며 자랑까지 하고 있다. 세인트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버고의 크로스를 빨리 슌에게 물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므우가 무심코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모두 각양각색의 생각에 빠져 침묵이 흐른다.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침묵을 깬 것은 상황에 맞지 않게 경쾌하게 울려 퍼진 박수 소리였다.
깜짝 놀라며 사라와 므우와 샤카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소거법으로 박수를 친 사람은 여태까지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아테나다.
소녀는 여신의 위엄을 한껏 안고 선언했다.
“상황은 알겠습니다. 먼저, 사라 씨.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뭐. 괜찮습니다. 일단.”
“그리고 샤카, 사람의 의지를 무시하는 건 좋지 않아요. 죄송하지만 이번 일은 포기해 주세요.”
잠깐 침묵이 흐른다. 샤카주제에 열심히 반항하는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래봤자 아테나의 무언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테나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과연. 천상천하 유아독존, 제멋대로인 데 도가 트인 샤카도 아테나 앞에서는 꺾인다. 아직 불만이 남은 것 같긴 해도 샤카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므우는 과연 아테나! 라고 감동하고 동시에 안심했다. 만약 자신이 샤카를 단념시키려고 했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정신적 피해가 들었을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다. 사실 이렇게까지 일이 원만하게 수습된 건 기적에 가까웠다.
허나 안타깝게도 므우는 운명의 여신들에 의해 사가에 이은 성역 제2의 만성 위궤양 환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샤카가 이렇게까지 주장하는 건 드문 일이니 다른 제안을 하나 해도 될까요?”
외람되지만 그리 말씀하시면서 웃는 아테나의 모습이 그렇게도 무섭게 보일 수 없었다고 므우는 훗날 고백했다.
동시에 샤카와 사라 사이에서 상담역으로 이리저리 치일 므우의 고생길이 열린 순간이기도 했다.
눈앞의 소녀가 웃는 순간 사라는 오싹, 하고 등줄기를 타고 얼음덩어리가 미끄러지는 감각에 습격당했다.
별로 위험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 포기 각서에 스스로 서명을 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죽지도 다치지도 않겠지만 자칫 한 발만 삐끗했다간 차라리 그렇게 되는 게 나을 정도로 골치 아픈 일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라고 평소 둔한 편인 사라는 그때만큼은 초감각을 동원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 사라의 생각을 끊듯, 소녀가 말을 걸었다. 본인에게 잘 어울리는 영롱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사서입니다.”
본심을 말하자면 사라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 나고 자란 사라에게 침묵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소심함 같으니라고. 그렇지만 후회해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쏟아낸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기에 사라는 그저 속으로만 눈물을 삼켰다.
사라의 대답을 듣고 사오리는 더욱 미소를 깊게 만들었다.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다. 좋게 말하자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나쁘게 말하자면 무슨 흑막을 감추고 있는 듯한. 그러니까 어떻게 말해도 꿍꿍이가 있는 듯한 미소였다.
“잘됐네요. 저희도 중요 자료와 서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서고가 있는 데요, 너무 오래된 데다 최근 십몇 년간 일이 좀 있어서 엉망진창인 상태거든요. 마침 정리와 관리를 해주실 분이 필요했는데, 혹시 이직하실 생각 있으신가요?”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방금 그 웃음을 보고 난 직후다. 사라가 넘어갈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다 꾸며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사오리는 그저 평범한 소녀가 아니다. 이래 봬도 그라드 재단이라는 커다란 기업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총수다. 어지간한 일에 동요할 리도 없고 동요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사오리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설마 그럴 리가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반쯤은.
실제로 서고가 엉망진창인 것도, 정리와 관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서고의 관리자를 구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서고에는 단순한 자료뿐만 아니라 성역의 은밀하고도 중요한 기록들까지 존재하고 있다. 그런 곳에 아무나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당초 서고는 골드 세인트들과 아테나와 교황의 신임을 받는 몇몇 세인트들만 출입이 허락된 곳이었다. 적어도 조금 전까지는.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고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태연하게 규칙을 바꾼 아테나는 미소로 사라를 압박했다. 그 미소를 받고 사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거절하는 게 옳았다. 제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먼 이국땅인 데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이상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일하라니. 덥썩 승낙하는 게 오히려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냉큼 싫습니다, 하고 대답할 순 없었던 게 분위기가 뭣했다.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저 담자색淡紫色 머리카락의 남자는 그렇다 치고 눈앞의 소녀는 싱글싱글 웃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위압감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주제에 시선으로 있는 힘껏 압박을 주고 있는 남자가 제일 무서웠다.
그렇지만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사라는 굳게 결심하고 입술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직장을 옮기라는 건…”
“월급은 이전 직장의 두 배.”
“……자료를 정리하는 것과 도서를 정리하는 건 다르…”
“보너스는 500%.”
“……생활의 문제도…”
“의식주 모두 이쪽에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냉큼 고개를 숙이는 사라를 보고 옆에서 상황을 나름 흥미진진하게─속으론 엄청 초조하게─ 지켜보던 남자들은 경악했다. 정말 그걸로 돼?!
그런 남자들을 보고 사라는 시선을 회피했다. 댁들이 월급쟁이 신세가 되어보시죠.
그리고 그 모두를 지켜보던 아테나는 우아하게 외쳤다.
“이것이 바로 돈의 힘이랍니다.”
아니, 그거 여신이 할 대사가 아닌데요.
샤카와 므우의 반박이야 어쨌든, 사라는 그렇게 성역에 취직하기로 결정되었다.
덤 1.
“아, 그럼 직장에 연락하고, 살던 집이랑 짐이랑, 그리고 비자도 어떻게…….”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
“돈의 힘이 뭔지 보여드릴게요.”
“………….”
사라가 그 말을 뼛속 깊이 실감할 때까지 앞으로 3일.
덤 2.
“샤카, 당신의 제자는 아니지만 그녀는 성역에 남게 되었으니 이걸로 괜찮겠죠?”
“예. 하오나 아테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샤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아 아테나는 웃었다.
확실히 일반인을 함부로 성역에 들이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의 힘인가 단순한 여자의 감인가, 어쨌든 아테나는 이미 그녀에 대해 확신을 내리고 있었기에 태연할 수 있었다. 사라는 절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신경 쓸 건 없답니다. 그러니, 샤카.”
“네, 아테나.”
“파이팅!”
“……?”
무슨 뜻인 진 모르겠으나 샤카는 일단 자애로운 여신의 말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후후”
흔들리는 금발을 바라보며 사오리는 웃었다.
사가와 므우는 샤카의 행동을 단순히 변덕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지만 사오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샤카는 변덕보다 더 숭고하고 고귀한 감정을 이유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사오리는 그를 알아차렸다. 키도 사오리로 살아온 13년의 세월이 그를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사오리는 크게 마음이 움직였으며, 때문에 제멋대로인 행동으로 사라를 붙잡았다.
확실히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성전도 모두 끝난, 평화로운 세상이다. 이 정도 일탈쯤은 얼마든지 용납될 것이다. 아니, 용납되어야 한다. 모든 꿈꾸는 소녀들을 위해서라도.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네요.”
키도 사오리, 그녀는 전쟁의 여신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로맨스를 위해서라면 다소의 위험도 무릅쓸 수 있는 14세 소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