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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후 부활 설정

*할아버지들이 멋지지 않아요(웃음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스라니 흘러들어온다. 어딘지 모르게 노성과 비명이 섞여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 모두를 덮어버릴 수 있는 활기가 느껴져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웅장하게 떨어지는 폭포와 이른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 제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양녀의 얌전한 목소리에 익숙해졌던 도코지만 이런 소리는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한다. 듣고 있으면 살아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다. 말하자면 세계가 약동하는 소리.



 천천히 눈을 뜬다. 바로 내리쬐는 햇볕이 눈귀를 간질이지만 도코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저 아래서 천천히 복원되어가는 성역의 모습이 보인다. 꿈만 같은 광경이다. 성전 이후 반절 이상 파괴되고 적막만이 가라앉아 있던 성역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먼 풍경이지만 어디가 얼마나 원래대로 돌아왔고 누가 어떤 얼굴로 떠들고 있는지는 바로 코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있다. 뿌듯한 만족감이 가슴을 치고 올라와 도코는 의자에 더욱 몸을 파묻으며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미약한 움직임이지만 고작 그 정도에도 옆에 앉은 친우는 즉시 반응했다. 시온이 도코를 바라보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씩 소우주가 들뜨는 것이 피부에 직접 와 닿는다.



 “잠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군, 도코여.”

 “놀리지 말게, 시온. 아무리 날이 좋다지만 오늘내일하는 노인네도 아니고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들진 않아.”



 일단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지만 2세기하고도 반세기를 더 사귀어온 친우는 가차 없었다. 시온이 가볍게 코웃음을 친다.



 “261살이면 충분히 노인네지.”

 “육체는 18살이니 별로 상관없잖나.”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은 고려하지 않는 건가?”

 “그 반대의 경우는 고의적으로 무시하나 보군.”



 나름대로 근거와 논리에 기반을 둔 말다툼이 이어진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의 소우주가 고양된다. 도코와 시온의 평온한 모습 뒤로 부풀어 오른 소우주가 맞붙어, 강하게 스파크가 튀고 공기 중에 파문을 날린다. 잡병이 보았다면 졸도할 광경이다. 청동성의, 혹은 은백성의라 하더라도 견디기 힘들 것이며 황금성의 조차도 안색이 변할 정도의 압력이 주변에 가득 찬다. 부풀고 뒤틀린 소우주가 찢기려 하던 찰나 도코가 웃고, 시온도 웃었다. 즉시 흔적도 남기지 않고 팽배했던 소우주가 사라진다.



 흐릿하게 남은 여파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상큼한 얼굴로 시온은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 손을 뻗어 찻잔을 집었다. 마찬가지로 도코 역시 태연한 얼굴로 양갱을 집어 입에 넣는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함을 토할 소리이긴 하지만 방금 일은 쉽게 말해 장난이다. 오랜 시간 동안 우정을 쌓아온 친우들은 살아온 세월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유치한 일을 벌이곤 했다. 뭐, 방금 것은 재흥 되는 성역에 조금 들뜬 감이 있는 탓이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도코는 시온을 바라보았다. 향까지 즐기며 티타임을 만끽하는 시온의 만족한 얼굴 아래, 엄연히 존재하고 있을 복잡다단한 감정은 아무리 도코라고 해도 다 알 수 없었다.



 시온에게 있어 재흥 되는 성역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두 번째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이야 조금 여유가 있어 유유자적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지만 첫 번째에는 기초 하나하나부터 그 손으로 다 쌓아올렸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때의 도코는 108마성의 감시를 핑계로 친우의 고생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살아온 세월은 같지만, 항상 같이 있지는 못했다. 둘도 없는 친우건만 고통을 분담하지 못했다. 필경 시온이 가장 힘들었을 시기, 곁에서 지탱해준 것은 도코가 아니다. 그 사실에 깊은 죄책감과 일말의 질투를 느낀다.



 “……미안하군, 시온.”



 회한의 감정이 요동친다. 밑도 끝도 없는 사죄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단번에 모든 것을 읽어낸 시온은 이번에도 도코의 말을 코웃음 한 번으로 날려버렸다.



 “무얼.”



 애당초 미안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는 태도다. 뻐기는 것 없는 상냥함에 도코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감과 동시에 좌절감을 느꼈다. 수천의 낮과 수천의 밤이 지났어도 친우의 이러한 점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기쁘면서도 조금 안타깝다. 



 상념에 빠져 조금 가라앉은 도코를 보고 시온은 멀리나마 네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는 낯간지러운 말을 삼켰다. 위로도 좋지만 정도란 것이 있는 법이다. 대신 서비스 격으로 상대가 조금이나마 기운이 날만 한 말을 던져준다.



 “자네는 미래를 위해 훌륭히 제자를 키웠잖나. 그걸로 충분해.”

 “시류, 말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침착해지고 생각이 깊어지긴 했어도 원래의 단순한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기에 바로 반응이 나타난다. 축 처졌던 도코의 얼굴이 화악 살아난다. 덩달아 등 뒤로 음울하게 깔렸던 소우주도 발랄해졌다. 기분 탓인지 밝은 레몬색으로 빛나는 것 같다. 얼굴 옆에서 꽃이 퐁퐁 솟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애써 근엄한 척하고 있지만 영락없이 카뮤에 뒤지지 않는 제자바보의 모습이라 시온은 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도코가 그런 시온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애초에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기색이란 게 있는 터라 도코는 얼굴을 붉히고 짧게 헛기침을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들뜬 감이 있다. 이대로 평정을 가장해봤자 친우에게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미 다 들켜버린 후이기에 도코는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고 애썼다.



 “자, 자네야말로. 므우가 있지 않은가.”

 “뭐, 그렇지.”



 안쓰러울 정도로 당황해 하는 모습에 시온은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친우가 바라는 대로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적절하게 혼합된 표정을 짓는다. 물론 본심이 백이십 프로 정도 섞여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극히 팔불출적인 공감을 느끼며, 성역의 최연장자들은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깨끗한 푸른색에 마음속에 청량감이 감돈다.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던 시간의 흐름이 제자들의 성장에 기쁨으로 바뀐다. 언젠가 강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과거와 미래의 연결점이 된 지금, 그들은 벅찬 감동마저 느끼고 있다. 입술 사이로 느릿하게 숨이 새어나온다.



 “아이들은 정말 빨리 성장하는군.”

 “그렇지. 우리는 이제 슬슬 은퇴해서 뒷방 늙은이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먼.”

 “아까와는 말이 다르지 않은가, 도코여.”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온이여.”

 “그것도 그렇군. 시간이 참으로 빠르게 흘렀어.”

 “아아─”



 도코와 시온은 서로 마주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와는 반대로 둘 사이로 훈훈한 공기가 채워진다. 두 사람의 기분에 호응이라도 하듯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뺨에 닿았다. 그것이 도닥이는 것처럼 느껴져 미소를 한층 깊게 만든 도코는 반쯤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시온도 팔을 뻗어 다과를 집어 든다. 오늘 하루는 이대로 계속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갈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불청객들만 없었다면.





 등 뒤에서 갑작스레 솟아난 강렬한 소우주에 도코와 시온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의자가 뒤로 넘어간다. 작은 테이블은 시온이 광속의 움직임으로 붙잡아 같은 꼴을 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척추를 타고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린다.



 격랑처럼 요동치며 곧 터질 폭탄처럼 위험한 소우주에 둘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똑같은 자세로 굳었다. 상큼하게 웃고 있는 사가와 고소를 머금은 아이오로스가 있다. 다만 사가 쪽은 얼굴만 상큼하지 소우주는 까맣고 음침한 것이 하데스와 맞먹을 정도다. 어떻게, 라고 무심코 물을 뻔하다가 시온은 입을 닫았다. 지금 입을 열어봤자 딱히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황했기에 도코의 입을 막는 것만은 하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에……?”



 그 즉시 사가의 이마에서 굵은 힘줄이 튀어나온다. 안 그래도 까맸던 소우주는 더 짙어져 숫제 흘러넘치기라도 할 것처럼 넘실거린다. 지금 당장에라도 사가의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귀신과 같은 모습에 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여기에, 라구요? 네, 저희도 이곳까지 오느라 무척 고생했습니다. 설마 당당하게 땡땡이를 치신 두 분께서 스타힐에 계실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요. 거기에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길 도구까지 챙겨오시다니 과연 교황님, 과연 전 성전의 생존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처음에는 나지막하게 시작되었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진다. 목소리에 비례하여 팽창하는 소우주에 사가의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옆에서 그나마 이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오로스가 말리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교황이고 뭐고 당장에라도 갤럭시안 익스플로전을 날릴 기세였다. 참고로 땡땡이를 친 장본인들은 말에 삐죽삐죽 솟아있는 가시에 찔려 입도 떼지 못했다.



 아이오로스가 진정하라는 듯 폭발 직전인 사가의 어깨를 두드렸다.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나 실은 상당한 힘을 실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난폭한 제지다. 어쨌거나 덕분에 사가는 조금 진정되어 심호흡을 했다. 위험하게 흩날리던 머리카락도 착 가라앉는다. 소우주는 여전히 까맣게 물들어있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 사가는 대담하게도 손가락으로 시온을 척 가리켰다.



 “어쨌든! 당장 돌아오라는 아테나의 칙명입니다, 교황님!”



 안정되어가던 사가의 상태에 내심 방심하고 있던 시온은 사가의 일격에 컥 소리를 내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테나의 칙명이라 하면 최후의 통첩, 즉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좌절하고 싶은 현실에 시온은 무의식적으로 도코를 바라보았다. 교황에게 쌓인 일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던 도코는 무심코 시선을 피함으로써 이백 수십 년간의 우정을 배반했다. 



 인생의 무상함을 절절하게 느끼며 시온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사가에게 다가갔다. 사가가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지난 성전 때에도 볼 수 없었던 친우의 희망 없는 뒷모습을 도코는 동정과 안쓰러움과 약간의 안도를 담아 전송했다. 그런 도코의 팔을 아이오로스가 강하게 붙잡는다. 



 “노사께서도 분명 하실 일이 있으실 텐데요.”



 흠칫 도코가 경직된다. 단호한 목소리가 이르는 것은 필시 성역 수복 작업일 터다. 많이 재건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손이 가는 부분은 상당수 남아있다. 고달픈 미래가 어렵지 않게 그려져 도코는 무의식적으로 잡힌 팔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사가와 달리 난폭한 기색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아이오로스 역시 봐주는 일은 절대 없다.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도코는 미약하게 반항을 시행했다.



 “여, 연장자 공경도 없느냐!”



 어딘지 모르게 절절한 외침에 아이오로스는 미소를 지었다. 되돌아온 답이 엑스칼리버보다 날카롭다.



 “신체는 사가들보다 어리시면서 엄살 피우지 마십시오.”



 엄살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도코는 뒷목을 붙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가와 아이오로스는 절대영도 못지않게 냉정한 태도로 둘을 이송했다. 끌려간 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질책이 한가득 담긴 아테나의 부드러운 미소와 제자들의 싸늘한 눈초리였다. 결국, 261세의 동갑내기 맹우들은 한날한시에 똑같은 모습으로 붙잡혀가 똑같은 모습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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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4116자
제라스님 리퀘, 할아버지들의 노친네 토크
쓰면서도 어라? 싶게 방향이 틀어진 것 같지만 꼭 사가들을 등장시키고 싶었기에. 다만 분석과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어딘가에서 제대로 영향을 받은 덕분인지 캐붕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사가는 캐붕 시키고 싶은걸(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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