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세이야+잇키+슌]뇌우의 꿈
사심이 듬뿍('ㅅ'
성전 후, 세이야들이 살게 된 키도 저택은 내부를 다 알기 힘들 정도로 커다랬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저택’이라고 불릴만한 규모인 것이다. 멀리서가 아니면 저택 전체를 한눈에 담기도 어렵고, 그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저택 내부에 있는 방만 해도 수십 개, 규모에 맞게 수많은 고용인이 있다고 해도 실제론 사용되지 않는 공간이 태반이다. 다들 우스갯소리로 떠들곤 했지만 저택 내부에서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꼭 농담인 것만은 아니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이야들의 행동반경은 고정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각자의 방과 응접실, 현관 홀, 주방 정도일까. 그 외의 공간으로 발을 옮기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십 대 소년들에게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다른 방에까지 신경을 쓸 이유도 흥미도 있을 리 없으니 당연한 얘기다.
즉, 세이야가 어딘가의 빈방에서 자고 있던 잇키를 발견한 것은 한없이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단 말이다.
소파에 잇키가 앉아있다. 가볍게 팔짱을 끼고 몸은 살짝 앞으로 기울어져 있는 채다. 옅게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은 언제나처럼 미간을 찌푸린 표정. 얼핏 보면 그저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숨소리로 알 수 있었다. 믿기진 않지만 자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자고 있네. 잇키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이야는 조금 신기한 기분이 되었다.
프라이드가 높고 좀처럼 남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고 싶어 하는 성격인 만큼 잇키가 타인에게 자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다. 원래부터 인기척에 민감하기도 했기에 아무리 깊게 잠들어있더라도 일정 거리 이상으로 다가가면 곧바로 깨곤 했었다.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느냐 없냐의 문제를 떠나 잇키에게는 그런 행동이 이미 버릇이 된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던 만큼 세이야도 처음 잇키를 발견했을 땐 설마 그가 자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도 별 반응이 없었기에 어라? 싶어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잇키가 자고 있다는 걸 겨우 알아챘었다.
혹시나 싶어 얼굴 앞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지만 역시나 일어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 무반응에 세이야는 희미하게 억눌린 숨을 흘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극히 드문 모습이니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역시나 보고만 있는 건 재미없다. 그렇다고 장난을 치자니 분명 잇키가 일어나버릴 거다. 이런 게 진퇴양난인 걸까.
“세이야? 거기서 뭘 하고 있어?”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걸어와 세이야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온 것인지 슌이 방문 밖에 서 있다. 지나치게 놀란 자신이 이상했던 것인지 왜 그래? 하고 의아한 얼굴을 하며 슌이 다시 말을 건다. 크진 않지만 사람이 깨어나기에 충분한 음량에 세이야는 황급히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슌이 세이야의 요청에 따라 소리를 낮춘다. 왜 그래? 다시금 입술만 움직여 묻는 슌을 보고 세이야는 잇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선이 손끝을 향하고, 그제야 형을 발견한 것인지 슌의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형이… 자고 있어……?”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 새어나온 슌의 목소리에 세이야는 무심코 뿜었다. 설마 싶었지만 이 남자는 친동생 앞에서도 자는 모습을 제대로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어이없어하는 세이야의 옆으로 슌이 다가와 똑같은 모습으로 쭈그려 앉는다. 커다란 눈동자는 아직도 흥분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형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
어딘지 즐거워하는 속삭임에 세이야는 헤에, 하고 의미 없는 신음을 흘렸다. 신기하고 기쁘고, 그런 감정들이 확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세이야는 잇키가 자는 모습을 어렸을 때조차 보지 못했으니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냥 지금이랑 별반 다르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는 정도다.
그 기색을 알아챘는지 슌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왔다.
“왜, 기억 안 나? 예전에 세이야도 같이 봤잖아.”
“응?”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이야는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있었다. 예전, 키도 저택에 있었을 때, 아직 이 커다란 저택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있었을 때. 이제는 거의 희미해진 먼 옛날의 기억.
슌을 돌아보자 슌도 자신을 마주 본다. 다갈색 눈동자와 녹색 눈동자가 맞았다. 서로 똑같은 걸 떠올린 것을 확인하고 두 막내는 공범자의 미소를 띄웠다.
* * *
새카만 하늘 위를 빛줄기가 내달린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굉음. 폭우 소리마저 지워버릴 정도로 큰 굉음에 무심코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였다. 흔히들 천둥은 신의 울림이라 말하는데 과연, 말 그대로 단순한 자연현상을 넘어서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광경을 보고 잇키는 조금 압도당했다.
무심코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깨닫고 잇키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천둥번개를 무서워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감성은 애당초 ─어린아이긴 하지만─잇키에겐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슌은 아니다. 심약하고 눈물이 많은 그 아이는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면 언제나 울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곤 했었다. 남자애가 고작 그런 것으로, 싶기도 하고 어리광은 적당히 받아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슌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동생이다. 결국 잇키는 언제나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마 오늘도 마찬가지겠지.
다시금 튀어나오는 한숨과 함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혀엉…….”
역시나. 문이 열리며 조그맣게 틈을 만들고 동시에 울먹거리고 있는 슌이 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커다란 베개를 품에 꼭 안은 채, 이미 반쯤은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다. 가련한 모습에 저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어쩔 수 없지, 라며 빠르게 포기하고 슌을 방안으로 들이려던 잇키는 그 순간 슌 뒤에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무심코 목소리를 높였다.
“세이야?! 네가 왜 여기에…….”
저도 모르게 힐책하는 말투가 되어버렸는지 세이야가 흠칫 거리며 몸을 둥글게 웅크린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화내지 말라는 듯 슌이 옷자락을 잡아당겨 잇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별로 화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말투가 나쁘다는 자각은 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슌을 쳐다보자 우물쭈물하면서도 슌이 입술을 연다.
“그, 복도에서 만났어……. 세이야도 버, 번개가 무섭다고 해서…… 내가 형한테 같이 오자고…….”
“하아?”
순간 잇키는 지금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가 번개를 무서워한다고? 그 세이야가? 곤란할 정도로 씩씩함이 지나친 데다 그 제멋대로인 아가씨조차 무서워하지 않는 세이야가?
농담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며 잇키는 세이야를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모양이다.
세이야는 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한껏 울상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 오기인지 눈물만은 흘리지 않고 있지만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 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고집스럽다기보다는 평소의 활발함과 대비되어 더욱 안쓰럽게 느껴진다.
정말로 어쩔 수 없다. 결국 잇키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이쪽으로 와.”
침대에 앉아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자 슌이 반색하며 다가온다. 세이야도 슌의 뒤를 따라 굼실굼실 이동한다.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눕자 아이들이 양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지만 그리 크지도 않은 침대에 셋이나 올라와 있으니 역시 좁다. 그래도 꾹 참고 있으면 슌과 세이야가 요령 좋게 꼼지락대면서 편안한 자세를 만들었다. 잇키도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뺐다.
바싹 닿은 온기에 기분이 이상해진다. 목덜미를 스치는 머리카락이 간지럽기도 했다.
“……예전에,”
문득 세이야가 낮게 중얼거려 잇키는 반사적으로 귀를 세웠다.
“천둥이 치면, 누나도 이렇게 해줬어…….”
마지막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여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잇키는 세이야에게 헤어진 누나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누나를 만나기 위해 세이야가 세인트가 되려고 한다는 사실 또한.
도대체 지금 세이야는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걸까. 잇키로서는 알지 못했다. 세인트가 되기 위해서 언젠간 헤어지게 되겠지만 적어도 잇키는 현재 슌과 함께 있을 수 있다. 소중한 형제와 함께 있다. 그러니 잇키는 세이야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저 막연하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고아인 자신들에게 형제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단 하나밖에 없는 혈육, 하나밖에 없는 가족.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존재. 비록 일시적이라곤 해도 형제와 떨어져 있게 되다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비통하겠지. 때문에 잇키는 세이야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같은 심정인지 슌이 팔을 뻗어 세이야의 손을 잡아준다. 그 감촉을 느끼며 잇키도 두 사람을 안고 있는 팔에 꽉 힘을 줬다. 마치 괜찮아, 라고 말해주듯. 체온이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조용한 고동은 어딘가 그리운 울림을 품고 있었다.
품 안의 몸이 흠칫 경직된다. 가만히 있으면 가슴께에서 물기가 번지고, 방안에 조그맣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조용한 숨소리로 바뀔 때까지 잇키는 어린 동생들을 안은 팔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뇌우가 내리치고 있었다.
* * *
“……갑자기 왜 그런 꿈을 꿨나 했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잇키는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어깨에 닿은 무게가 하나, 허벅지 위에 닿은 무게가 하나. 도합 둘의 무게가 신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범인은 당연히 세이야와 슌이다. 둘 다 깔린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색색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건지는 몰라도 자신을 베개 삼아 잠든 막내들에게 잇키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역시 자신이 버릇을 잘못 들인 것은 아닐까.
“……못 말리겠군.”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잇키는 둘에게 화낼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애당초 이 정도는 어리광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다. 심히 무르다고는 생각하지만.
도대체 자신은 어쩌다 이 녀석들에게 물러진 걸까. 슌에게 무른 것은 그렇다 치고 세이야에게 무른 것은 은하전쟁 때의 빚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전부터 물렀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잇키는 문득 떠오른 무서운 가정에 오한이 등줄기를 달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버릇이 들여진 쪽은 이 녀석들이 아니라 자신 쪽……?
“으─응…….”
그 순간 옅은 신음이 새어 잇키는 사고를 멈추었다. 조마조마 시선을 내리자 잇키의 무릎을 베고 있던 세이야가 몸을 뒤척거린다. 깨어나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단순한 잠꼬대였는지 그대로 세이야의 숨소리가 가라앉는다. 다시 찾아온 정적에 잇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어쩔 수 없다. 누가 누굴 버릇 들였든 간에 양쪽의 관계에 있어서 무른 것은 자신이다. 그것은 이미 당연해진 사실. 세이야와 슌이 무엇을 하든 결국 자신은 꺾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잇키는 이해하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한 잇키는 둘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닿아있는 따뜻한 무게가 기분 좋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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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4104자
결국 막내들에게 달콤해져버리는 잇키가 좋다
사실 잇키도 응석을 받아줌으로써 응석 부리고 있는 거예요 뭔가 말이 꼬이지만.. 잇키도 항상 형제들에게 상관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성격 때문에 힘들고 그걸 무의식 중에 눈치채고 있기에 먼저 응석 부리는 세이야와 슌. 상관해줘, 상관해줘, 하고있으면 별 수 없네 하고 상관하고마는 잇키. 결국 어쩔 수 없는 츤데레(웃음
어쨌든 그래서 이 셋의 조합이 참 좋습니다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