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청동학원] I Don't Care
“일어나, 세이야.”
흔들흔들 몸이 흔들리고 귓가에 이름이 불려, 의식이 천천히 부상한다. 아직 흐린 시야에 제일 먼저 뛰어든 것은 선명한 녹색.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천천히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소년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걸 확인하며 세이야는 몸을 일으켰다.
“…슌. ……좋은 아침.”
동갑내기 형제를 알아보고 세이야는 하품을 섞어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방금 깨어났기 때문인지 아직 머리가 멍하다. 잠기운을 쫓기 위해 가볍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자니 그를 보고 슌이 쓴웃음 짓는다.
“좋은 아침이 아니잖아. 벌써 점심시간이야.”
“에……?”
슌의 말에 세이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의, 키도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이 아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장소, 교실이다. 의외의 풍경에 세이야는 무심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앉아 있는 건 학교의 책상과 의자, 자신이 입고 있는 건 당연히 교복이다. 단번에 뇌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다.
떠들썩해서 활기찬 교실 풍경을 보고, 다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마지막으로 슌의 얼굴을 보고 세이야는 멋쩍은 듯 뺨을 긁으며 헤헤헤 웃었다.
“못 말린다니까.”
한숨을 내쉬며 슌이 타박한다. 하지만 이 가벼운 타박에 어쩔 수 없네, 라는 웃음이 스며들어 있다는 걸 세이야는 알고 있다. 맞장구치듯 짐짓 장난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애교 섞인 몸짓에 결국 슌이 조그맣게 웃는다.
곧 시계를 확인하고 모두 기다리겠네, 하며 슌이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세이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시끄러운 교실을 뒤로하는데 문득 하품이 터져 나온다. 아직까지 잠기운이 조금 남아 있나 보다. 가벼운 하품을 연달아 터뜨리자 옆에서 나란히 걷던 슌이 쿡쿡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옆구리를 찔러왔다.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자면 어떡해.”
“으……. 그치만 수학은 너무 어렵다고.”
“세이야는 수학 시간에만 자는 게 아니잖아.”
슌과 실속 없는 실랑이를 계속하며 걷던 세이야는 문득 미묘한 시선을 느꼈다. 이런 곳에서 자신을 지켜볼 사람은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살피자 동급생인 듯한 여학생 둘이 자신들을 보며 속닥거리는 게 포착되었다. 착각이 아니다. 그 증거로 전투에서 단련된 세이야의 청각은 ‘키도’라는 단어를 정확히 주워들었다. 의아해 하며 계속 지켜보자 시선이 마주친 여학생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
도대체 뭐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수군대고. 거기에 시선을 피하기까지. 어떻게 봐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괜히 심통이나 세이야는 조그맣게 볼을 부풀렸다. 직접 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이야?”
“아, 미안. 갈게.”
타이밍 좋게 슌이 세이야의 이름을 부른다. 잠깐 멈춰있는 사이에 어느새 슌이랑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세이야는 황급히 다리를 움직여 슌을 따라잡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슌이 바로 걷기 시작했기에 세이야는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조금 신경 쓰이는데. 이유 모를 찜찜함에 세이야는 걸으면서 뒤를 흘끗 돌아봤지만 이미 여자애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 별일은 아니었겠지. 세이야는 그 일을 곧바로 잊어버렸다.
* * *
장소는 자주 바뀌지만 점심은 다섯 명이 다 같이, 가 약속이다. 몰려다니는 게 싫다며 잇키는 마지막까지 탐탁지 않아 했지만 세이야의 ‘이왕이면 다 같이 먹는 편이 즐겁다.’를 시작으로 슌의 ‘학년이 달라 온종일 못 보니까 쓸쓸해.’로 쐐기를 박자 결국 어영부영 넘어가고 말았다. 당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맏형의 옆에서 시류와 효가는 과연 안정의 동생 바보라며 웃었었다.
세이야가 미적거렸던 만큼 세 형은 이미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교정 한쪽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하고 세이야는 크게 흔들며 소리쳤다.
“시류! 효가! 잇키!!”
주변의 이목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대담하고 순수한 인사에 시류가 웃고, 효가가 한 손을 들어 올려 보이고, 잇키가 이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각양각색의 대답에 세이야와 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곤 발걸음을 빨리해 형들에게로 다가갔다.
마지막엔 거의 뛰듯 다가온 세이야와 슌을 보고 시류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쓴웃음 짓고 있기는 하지만 실상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몸짓이다. 이러나저러나 동생 바보는 잇키만이 아닌 것이다.
문득 효가가 세이야를 바라보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또 수업시간에 졸았나 보지, 세이야.”
“엣?! 어떻게 알았어?”
세이야는 놀라기보단 감탄했다. 그 천진한 반응에 시류가 쓴웃음을 더욱 깊게 만들며 지적한다.
“입가에 침이 말라붙어 있어.”
시류의 지적에 세이야는 황급히 소매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귀가 화끈거린다. 아무리 자신이 태평한 성격이라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역시 좀 부끄럽다.
형제들의 시선을 흘러 넘기며 입가를 닦는 데만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상황을 방관하던 잇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매일 졸고 있을 텐데.”
“…잇키!!”
잇키의 통렬한 놀림에 세이야는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정도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주변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주제에 때때로 잇키는 이런 식으로 다른 누구보다 짓궂게 자신을 놀리곤 한다. 진~짜 성격 나빠. 사가보다 더 나빠.
으르렁대는 막내와 그런 동생의 반응을 웃으며 흘러 넘기는 장남의 모습을 보고 시류와 효가는 무심코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잇키도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자자, 그만하고 식사하자. 세이야. 형도.”
둘의 모습을 실컷 구경하고 난 뒤 도시락을 열며 슌이 둘을 중재했다.
처음에는 반발하려고 했던 세이야는 이내 드러난 도시락을 보고 멈칫했다. 5명의 몫을 하나에 몰아넣기에 도시락통은 필수적으로 5단 찬합으로 이미 크기에서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내용물도 만만치 않다. 속을 가득 채운 샌드위치나 싱싱한 야채샐러드, 푹신한 계란말이에 윤기가 흐르는 튀김 등. 전부 세이카와 시류가 재료를 아끼지 않고 만든 것들로, 쉽게 말해 호화판이다.
강렬한 유혹에 세이야는 나지막한 신음성을 흘렸다. 이건 너무 강하다. 이기기가 너무 힘들다. 고민된다. 어떻게 할까, 하고 세이야는 순간의 번민에 빠졌지만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곧바로 얌전히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드는 세이야를 보고 남은 넷은 소리 높여 웃었다. 형제들의 웃음소리를 세이야는 애써 모른 척했다.
* * *
도시락을 먹던 도중 세이야는 문득 주변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챘다. 일부러 한적한 곳을 찾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결계라도 쳐진 것처럼 자신들 주변을 지나가는 학생이 하나도 없다. 그런 주제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선 너머로는 미묘하게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것도 전부 자신들을 주목하며 뭐라 소곤대고 있다.
평소였다면 세이야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거나 설령 눈치챘더라도 그냥 넘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교실을 나서면서 생겼던 일도 있곤 해서 이상할 정도로 신경 쓰였다. 세이야는 주변을 둘러보고,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형제들을 향해 몸을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저기, 우리 이상한가?”
“응?”
갑작스러운 세이야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의문부호가 떠오른다. 허나 이내 주변 상황을 눈치챈 것인지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한숨 섞인 웃음을 띄웠다.
“……뭐, 다섯 명이서 동시에 전학 왔으니까 눈에 띄긴 하겠지.”
“거기에 모두 친척이란 설정이고.”
“‘키도’이기까지 하니까.”
어린 시절 대부분을 수행 때문에 오지에 틀어박혀 살았던 세이야들은 잘 몰랐지만 사실 ‘키도’란 이름이 주는 파급력은 엄청났다. 사실 모르는 게 더 이상할 터다. 일본, 아니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그라드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그리스의 대부호 해상왕 솔로 가문과도 맞먹는 그 명성은 이미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즉, 키도라는 이름을 달고 주목받지 않는 게 더 말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차라리 그라드 재단과의 관계를 깔끔히 부정할 수 있었다면 편했겠지만 실제로 관계가 있으니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것도 그냥저냥 이름에 빌붙는 얄팍한 관계가 아니라 재단의 총수인 키도 사오리와 관계가 있으니 더욱더.
이미 몇 번이고 타츠미에게 설명을 빙자한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 터라 금방 상황을 이해한 세이야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역시 키도란 성을 쓰지 말았어야…….”
“하지만 사오리 아가씨한테 거역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슌의 반박에 세이야는 당시 여신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반사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평소 우아하고 자애롭게, 때로는 그 나잇대의 소녀처럼 천진난만하게 웃던 여신은 세이야들에게 키도란 성을 종용했던 그때만은 에리니에스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무서운 오라를 풍기며 웃었었다.
확실히 슌의 말대로다. 평소에도 여신의 말을 거역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 당시의 사오리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 그 자체였다. 몇 번이고 기적을 일으켜왔던 세이야도 그때만은 기적 따위 일으키지 못했다.
“아니, 애당초 우리가 왜 학교에 다녀야 하는 거야…….”
새삼 불만이 생겼는지 세이야가 입술을 삐죽인다. 한참 늦은 감이 있는 투정이지만 다들 비슷한 심정이기에 저마다 그러게, 라든가 뭐어, 라든가 하는 별반 의미 없는 반응을 흘렸다. 어차피 그래 봤자 별다른 수가 없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탓이다. 모두의 한숨이 한 데 섞인다.
“키도~!”
다섯 형제가 한마음으로 단합하고 있는데 돌연 누군가 끼어들었다. 이름이 아니라 성으로 불려 무심코 모두가 상대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불만이 있든 어쨌든 다들 키도란 성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주목을 받은 탓인지 상대가 움찔했다. 허나 이내 당황함에서 회복한 용자는 행동도 당당하게 세이야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축구 한판 어때?”
“오! 잠깐만 기다려 줘!!”
클레스메이트의 제안에 세이야는 크게 반색했다. 답으로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 급하게 남은 도시락을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시류가 당황한 듯 옆에서 천천히 먹으라며 말을 걸었지만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손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행동에서 풍기는 발랄함이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이내 자신의 몫을 모두 해치우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달려나가는 세이야의 뒷모습을 보고 잇키는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를 흘렸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사실 제일 잘 적응하고 있는 건 저 녀석인 거 아냐?”
남은 셋은 아무도 그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