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잿빛 겨울과 무기질의 소년

citrus_ 2013. 12. 23. 15:57






 1.

 방 안에 눈이 내렸다. 무엇 때문인지 회색으로 물들어, 차라리 재라고 칭하는 것이 옳을 덩어리를 눈에 담는다. 흰 벽지가 발린 벽과 한가운데 도려진 회색 하늘이 눈물겨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흑백영화처럼 명암의 차이만 뚜렷한 세상에서 소년만이 오롯이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은 상황의 아이러니에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린다.



 텅 빈 방 안에 있는 것은 새카만 소파와 소년뿐이다. 숨어버리기라도 할 듯 소년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다. 다리는 편안하게 뻗어있고 손은 깍지 껴 배 위에 얌전히 얹혀있다. 서리처럼 바스락거리는 까만 바지와 새하얀 스웨터에 그는 소년의 잔인함을 다시금 상기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눈이 흘러내린다. 종이의 질감과 닮은 소년의 속눈썹 끝에도 눈이 붙었다. 이미 이곳은 설국이었다. 



 그는 천천히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옅게 눈이 깔린 바닥에 발자국이 남았다. 몸을 숙여 뒤집힌 생선의 배처럼 희고 무딘 칼날처럼 빛나는 피부를 만진다. 겉가죽이 부드럽다기보다는 단단하다는 것을 손끝으로 예민하게 읽어낸다. 생과 사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사신처럼 그는 그 순간 이것이 썩어 녹아내린 살점보다 완벽하게 쓸모없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동시에 그는 숨골이 막힐 정도로 희열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2.

 그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속삭여지던 숨소리를 기억한다. 조그만 입술에서 실낱처럼 풀려, 그의 가슴께에서 뭉치던 숨소리를 기억한다. 조금씩 부피를 키워가며 그의 가슴을 꽉꽉 채우던 그 숨소리를, 그 안온함을, 그 시간을 그가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던가. 지금까지도 그는 사랑하고 있다. 현재형이고, 미래형일 것이고, 그렇지만 과거형만은 되지 않을 그 감정을 그는 가슴 속에서 키웠다.



 숨을 멈추고, 화석처럼 굳어, 간간이 소년이 그에게 스치우는 것만을 간절히 기다리던 순간. 찰나의 한 조각. 단편극인 것을 알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던. 그와 소년만의 시간.



 그러한 시간을 사랑했기에 그는 그것만으로 족했다.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누구보다 먼 거리를 느끼며, 그는 닿지 못함을 긍정했다. 이따금, 불쑥,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옮기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하다. 타인의 불신 위에 세워진 순수한 마음의 끝자락은 애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숭배라고 불러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그래, 그가 가진 마음은 사랑보다는 신앙에 가까웠다.



 타르처럼 끈적거리고 거뭇한 욕정으로 입 맞추는 것은 불경이었고, 의미 없이 소년의 이름을 되뇌는 것은 기도였다. 간절한 기도로 불경을 억누른 그는 고행 끝에 간신히 모래알과 다름없는 순수한 마음을 움켜쥐었다. 지독한 어리석음은 색색의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모른 척했다. 소년의 무지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3.

 역겨워.



 너는 그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오히려 평온함에 가까운 무표정으로, 시린 눈동자로, 조롱이나 멸시보다 더 아픈 경멸감으로 그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 너만은 그러면 안 됐다. 감정에 기반을 둔 부조리로 그는 울부짖었다. 칼로 그를 겨누는 소년에게 몸을 내주면서도 그는 울부짖는 것만은 멈추지 못했다. 너만은 그러면 안 되는데.



 불신자가 아닌 그는 신의 난폭함을 결단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변덕스럽고, 잔인하고, 무감정한 손으로 목이 졸리면서도 그는 신앙을 포기하지 못했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유일한 신자는 신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소년이 가속시킨 모래를 필사적으로 그러모아, 타인의 몰이해를 사면서도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애초에 이해를 바탕으로 소년을 섬기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해 할 수 있다는 착각 어린 오만이 어리광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사실은 그러한 난폭함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이 세계를 멸망시키는 최후의 통보를 하기 전, 낙원에서 달콤한 감각에 젖어 잠들 때에도 그는 이미 뱀의 꿈을 꾸고 있었다. 안온한 시간이 이미 실낙원이었다. 



 소년에게서 떨어져 나간.





 4.

 닿았다.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에 닿았다. 민감한 손끝으로 기묘한 질감을 읽어냄으로써 그는 그의 신이 추천墜天했다는 것을 선명하게 깨닫는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선연한 미소로 그는 소년이 더는 신이 아님을 인정했다. 이것은 이제 쓸모없는 거죽이며 썩어들어가는 고깃덩어리다. 생과 사의 차이가 유쾌해질 만큼 선명하다.



 그는 죽은 고기를 게걸스럽게 탐하는 하이에나보다 비열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미 모래를 다 떨어트린 손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감정이 오히려 사랑이었다. 소년은 그의 사랑을 무자비하게 끊었고, 숨을 끊음으로 마지막 벽마저 무너트렸다. 신이 스스로 땅에 떨어지기를 원한 순간부터 소년은 이제 닿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쉽게 닿고, 쉽게 범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다. 이제 소년이 신이 아니기에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스스로를 속여 가며 마음 한구석에 묶어놓았던 천박함을 인정했다. 남자는 언제고 소년에게 닿고 싶었다. 붙잡고, 그러안고, 품에 가둬, 숨을 빼앗는 것을 몇 번이고 생각했다. 다만 겁이 났던 것뿐이다.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소년의 질타를 받는 것이, 경멸을 받는 것이 겁이 났을 뿐이다. 소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롯이 그를 위해서였다. 그 겁을 신앙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제 욕망을 감췄던 것은.



 그는 우악스럽게 턱을 쥐어 소년의 입을 벌렸다. 딱딱한 입술에 제 입술을 부비고, 기묘한 열감이 남아있다는 착각이 드는 혀를 얽는다. 조그만 공동을 멋대로 헤집으며 그는 소년에게서 그동안의 보상을 받아낸다. 쥐어뜯을 듯 손톱을 새워 소년의 거죽에 흠집을 냈다. 이미 이것이 쾌락을 얻기 위한 행위인지 단순한 분풀이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둘 다 아닐지도 모르고, 둘 다 맞을지도 모른다. 이미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 돼버렸기에 구분이 무의미했다. 



 반응 없는 어리석은 인공호흡 끝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짜디짠 눈물이 눈가에서 뺨, 턱으로 흘러 이윽고 소년에게까지 떨어졌지만 교활한 동화처럼 소년이 눈을 뜨는 일은 역시나 일어나지 않았다.





 5.

 깨달았다.



 그가 소년에게 닿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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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작 「불가능한 거리에 대한 기억」이란 주제로 쓴 글

그동안 쓴 글이 커뮤 글 뿐이라 올릴 게 이런 것밖에........ㅏㅓ

쓰다보니 어정쩡하고 요상한 수사만 잔뜩 넣게 되어서 뒤집어 엎을까 했는데 처음부터 내용을 이렇게 쓰리라 생각했었기에 불가능했다고 한다........ 게다가 내가 너무 게을렀기에 뒤집기엔 시간이 없었지....

그래도 이런 추상적 주제로 글을 쓴 것은 처음이라 재밌었어요!^ㅅ^ 다른 분들 글 보는 재미도 쏠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