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아이바이] 이름
스이쿄, 라고 갑자기 떨어진 말에 바이올렛은 무심코 상대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은 아이아코스의 옆얼굴은 역광에 가리어져 어렴풋하게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평소와 다른 기색이 피부로 직접 전해져와 바이올렛은 눈을 가늘게 조였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수런거렸다.
그런 바이올렛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아이아코스가 피식 입귀를 들어 올린다. 조금 고개를 돌려 바이올렛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기세 좋은 얼굴. 전혀 이상함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남자는 여느 때처럼 태평하게 입을 연다.
“내 옛 이름이다.”
마성에 떨어지기 전, 아직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의 이름, 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정보에 바이올렛이 두 눈동자를 깜빡였다.
“아이아코스님의?”
“그래.”
평소에 자신에 대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던 분이기에 바이올렛은 무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만 되물어버렸다. 그럼에도 남자는 싫은 기색도 없이, 오히려 즐거운 듯 선선이 대답을 돌려준다.
이해불능.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 없다. 바이올렛에게 있어 아이아코스는 이미 신앙과 마찬가지고, 그렇기에 굳이 그의 의중의 탐색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그저 그를 뒤쫓으면 될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이런 상황이 오면 아주 조금 의문이 들고 만다. 아이아코스님은 어째서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건가, 하고.
말없이 계속 쳐다보자 아이아코스가 몸을 바로 돌려 거친 동작으로 턱을 괴고 바이올렛과 시선을 맞췄다.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그녀는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청흑색 눈동자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감출 수 없는 감정을 읽으려는 듯 똑바로 마주 본다. 잠깐 침묵의 공방 후, 천천히 남자가 입을 연다. 낮은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이미 먼 과거에 버려버린, 허깨비의 이름이다.”
딱 잘라 떨어진 말에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날카롭게 베인 것 같다. 아까보다 더욱 심하게 가슴이 수런거린다. 진정되지 않는 심장에 바이올렛은 하지만, 하고 속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아이아코스님.
그렇다면 어째서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계신 건가요.
어째서 그 이름을 그렇게 그리운 듯 부르시는 건가요.
어째서 그 이름을 저에게 말씀해 주시는 건가요.
몸에 새겨진 흉터처럼 그 이름이 마음에 새겨진다. 아주 찰나지만 이 순간을 결코 잊을 리 없을 거라고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의문 때문만은 아닐 터. 분명 그녀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그럼에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그의 감정 때문에.
바이올렛은 여전히 아이아코스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지만,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이아코스는 빠른 발걸음으로 회랑을 걸었다. 기척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 천장과 벽에 부딪힌다. 거기에 여느 때처럼 겹치는 조용한 발소리는 없다. 항상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던 자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사실에 쓸쓸해하는 건 아니지만 맘에 드는 것도 아니다. 반신의 부재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의 날개가 있어야 하는 곳은 당연히 자신의 곁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아이아코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어있는 옆자리 때문에 치미는 충동을 참으며 아이아코스는 바이올렛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시야에 문이 들어온 순간 거침없는 동작으로 난폭하게 문을 연다. 문짝이 떨어질 듯 큰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바이올렛, 있나?”
방안에 커다란 목소리가 울리고 잔향이 남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어 아이아코스는 의아해했다. 분명 소우주를 더듬으면 이곳에 있는 것이 확실한데 대답을 하지 않다니. 평소의 베히모스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충 방안을 둘러 살펴봐도 보이는 자가 없다. 인기척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자문하는 순간 시야 한쪽에 검은 인영이 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조용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벽 쪽에 있는 소파 위에서 바이올렛이 웅크려 잠들어 있다. 그것을 확인하고 아이아코스는 아까와는 다르게 조용히 기척을 죽이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아이아코스는 한 손으로 소파 등받이를 짚고 몸을 숙여 바이올렛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엷은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다. 규칙적이고 얕은 숨소리가 입술에서 새어나오고 있다. 좁은 소파가 불편한 것인지 미간이 살짝 접혀있다. 얼굴에도 희미한 피로가 깔려있다. 이전과 비교해보면 조금 여윈 것도 같다. 무리를 시키고 있는 건가, 하고 아이아코스는 난생처음으로 반성을 해봤다.
조금 전의 그 소란에도 깨지 않았던 바이올렛이다. 무척 피곤하다는 반증이니 이대로 계속 졸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바로 하는데 바이올렛이 입술을 조그맣게 달싹이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낸다. 잠꼬대다. 호기심에 아이아코스는 반사적으로 청각을 곤두세웠다.
“…스이쿄님….”
일반인이라면 들을 수 없을 조그만 소리였지만 아이아코스의 귀는 그녀의 웅얼거림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도대체 누구 이름을……!”
질투 때문에 가슴 속에서 열이 뻗친다. 제어할 수 없는 불길에 당연한 수순으로 화를 내다 아이아코스는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내 이름이잖아…….”
안도와 부끄러움으로 아이아코스는 상체를 무너뜨렸다. 양손으로 벽을 짚고 허리를 구부린 상태로 그녀의 얼굴을 조금 원망스럽게 쳐다본다. 자신이 멋대로 착각한 것뿐이지만 탓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허나 바이올렛이 여전히 옆의 소란 같은 건 전혀 상관없다는 모습으로 잠들어 있어 그는 조그맣게 혀를 찼다.
분명 이전에 바이올렛에게 그 이름을 말해준 기억은 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기에, 적어도 그렇게 가장하고 말했기에 그녀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게다가 잠꼬대로 그 이름을 부를 줄이야. 이미 그에게도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먼 옛날의 이름인데. 전부 버려버린, 이제는 의미가 없는 이름인데.
도대체 바이올렛은 무슨 심정으로 그 이름을 부른 것일까. 아이아코스에게 그 심정을 짐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당초 타인의 마음을 세세하게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닌 만큼 어렴풋하게 짐작하는 것조차 어렵다. 상상을 해보려 해도 무리다. 하지만 그래도.
허리를 숙인 그대로 아이아코스는 한 손만을 뻗어 바이올렛의 머리카락을 한 줌 주워들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검은색이다. 푸른 하늘에서 아름답게 춤추던 검정. 손가락에 휘감긴 부드러운 머리카락 끝에 살짝 입 맞추고 그는 무척 기쁜 듯 웃었다.
“네가 부르니 그것도 나쁘지 않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