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Ω/아리아+겐부] 미래에…
※주의
-퇴고 없음
-설정 날조
-키키겐부키키 성향 있음(원래 그럴 생각 전혀 없었는데…)
-최애끼리 같이 있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인데 문제 있나요?'ㅅ'? (문제 많다)
깊고 아득한 곳으로 가라앉았던 의식이 부상한다. 제일 먼저 돌아온 것은 청각. 그 다음으로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 외의 남은 감각이 모두 돌아온다. 희미하게 이명이 들리고 아직도 시야가 뿌옇다.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 겐부는 현재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과 비슷한 감각에 뇌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순간 왼쪽 어깨에서 가슴께까지 둔탁한 통증이 달려 겐부는 무심코 고개를 내렸다. 상처를 입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의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없다. 슬쩍 손가락을 걸어 옷 안을 들여다본다. 통증이 느껴졌던 쪽의 피부가 흉측하고 검붉게 벌어져 있다. 상처라기보다는 흉터에 가까운 그것을 보고 겐부는 비로소 직전의 일을 떠올리고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자신은 죽었다. 파라이스트라에서, 적의 검에 맞아, 코우가들을 지키고.
거기까지 떠올리고 겐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당연하지만 이곳은 기억에 없는 장소로, 무의식중에 상상하고 있던 어느 곳과도 달랐다.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는 새하얀 공간만이 펼쳐져 있다. 경계가 불분명해서 끝없이 넓은 것처럼도 보이고 굉장히 좁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닥도 천장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묘하게 안정감이 있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것 같은 이 장소는 도대체 어디일까. 알 수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우주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어쩌면 완전히 죽기 전까지의 꿈?’
답지 않은 생각이다, 하고 겐부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찌 됐든 자신은 죽었다. 그것만은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가 천국이든 지옥이든 혹은 꿈이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이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래, 이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일까. 머리로는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 사실이 분했다. 분하고 분해 강하게 가슴이 조여오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건 싫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부지불식간에 눈물이 흘러넘친다. 한번 자각한 눈물은 도저히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아 그대로 기세를 타고 끊임없이 뺨 위로 흐른다.
다 큰 어른이 꼴사납게 뭐하는 짓인지, 하는 생각과 그렇지만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충돌했다. 침묵의 사투 끝에 결국 승리한 것은 후자였다. 겐부는 더 이상 참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양 무릎을 세우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용히, 조용히 가슴의 열이 눈물로 빠져나간다.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일이 참으로 많다. 키키하고 더 많은 얘기를 나눌 걸 그랬다. 하빈져에게 당부의 말을 좀 더 남길 걸 그랬다. 코우가들에게 다른 것들도 가르쳐 줄 걸 그랬다. 시류와 슌레이에게 정식으로 인사하러 가지도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모질게 대했던 것은 나중에 제대로 사과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훨씬, 훨씬, 선배로서 동료로서 해주고 싶었던 일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못해.
울음소리를 물어 죽였다. 이제부터 더욱 힘든 싸움이 시작될 텐데, 비록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형태로 전장을 떠나게 되다니. 자신이 너무 무력하고 한심해서, 겐부는 도저히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옷자락이 젖어든다.
살짝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손이 있었다.
“괜찮아요?”
가느다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겐부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일그러진 시야에 푸른 인영이 비친다. 몇 번을 깜빡이고 나서야 겐부는 상대를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수줍음과 상냥함으로 빛나는 물빛 눈동자. 분명 그 아이다. 예전에 마르스에게 붙잡혀 아테나를 대신하던, 물의 유적에서 스쳐 지나가듯 만났던 소녀. 아리아. 겐부가 얼떨떨해 있는 사이 아리아는 그와 같은 모습으로 쪼그려 앉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맞춰온다.
“상처가 아픈가요? 깨어나는 데 오래 걸렸을 정도로 심했으니까…….”
“……아니, 괜찮아.”
잔뜩 잠긴 목소리로 겐부가 대답한다. 생각해보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한참 어린아이 앞에서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괜스레 부끄러워 겐부는 손가락으로 짓무른 눈가를 문질렀다. 심하게 따끔거리는 것이 살아있는 육체와 같다. 굉장한 위화감이라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여기는 어디……?”
말을 돌리듯 겐부는 조금 아래에 있는 얼굴을 보며 질문했다. 아리아가 우물쭈물 입술을 연다.
“……죄송해요. 말로 설명 못 하겠어요…….”
그렇지만 분명 이해하실 거예요, 하고 애매한 대답이 돌아온다. 풀이 죽은 듯한 소녀에게 겐부는 그런가, 하고 적당히 대답했다. 오래전 죽었던 이 아이가 있는 걸 보면 꿈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대충 사후세계 정도로 해두면 된다. 아까의 격정을 버리듯 사고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실컷 울었기 때문인지 묘하게 상쾌한 기분이 되어 겐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아리아도 따라 일어선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아리아를 겐부는 제지하지 않았다.
조그만 소녀와 보조를 맞추어 걸으며 겐부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고 생각했다. 5분밖에 안 지난 것 같기도 하고 5일쯤 지난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지만 공상 과학 소설에 이런 묘사가 등장하는 것도 같았는데, 하는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직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공간이 있다. 그렇지만 상념을 반복하는 사이 무언가 천천히 잡혀간다. 어쩌면 이 아이는 그 안개가 걷히기를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겐부는 옆에서 걷고 있는 아리아를 힐끔 훔쳐보았다. 원래 조용한 편인 것인지 아리아는 그를 따라오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치면 희미하게 웃어줄 뿐이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약한 한숨을 내쉬려는데 갑작스레 자그만 힘으로 옷자락이 끌어당겨 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리아가 옅게 뺨을 붉히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감사드릴 게…….”
“무엇을?”
물기 어린 눈동자가 크게 한 번 깜빡거린다.
“코우가를 지켜주셔서 고마워요.”
무구한 눈동자로 바라봐져 겐부는 쑥스러움에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따지고 보면 그건 상급자로서, 선배로서 당연한 행동이라 이렇게까지 감사받을 만한 일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적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해 모두를 끌어들인 꼴이나 마찬가지지 않은가. 멋대로 끼어든 코우가들도 잘못이지만 자신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 뭐……, 하고 겐부는 어물쩍 대답했다. 그 순간 무언가 머리를 퍼뜩 스치고 지나간다. 놀람에 눈동자가 커진다.
“너……,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놀란 겐부에게 눈앞의 소녀는 어디까지나 잔잔한 바다처럼 웃어 보였다. 고요하고 깊게, 모든 걸 포용하듯.
“전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전부?”
“네, 전부.”
멍청하게 말을 되풀이하는 겐부에게 아리아가 손을 들어 어느 쪽을 가리킨다. 겐부는 천천히 그곳을 돌아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다. 부드러운 빛깔의 하늘. 너르게 펼쳐진 숲. 머리가 어지러울 것 같던 무채색 공간과는 다른 다채로운 세계. 모두가 염원하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세계.
넋을 잃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이 조금씩 경치가 바뀐다. 한적한 시골 마을, 사람이 없는 해변, 커다란 도시, 파라이스트라, 오로봉,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토록 그리워하던 성역으로.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하듯 겐부는 천천히 걸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확실하게 계단을 밟으며 12궁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양궁의 입구에 도달하여 익숙한 인영을 본 순간, 멈췄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희미하게 색만이 남았다. 눈물에 굴절된 황금빛이 기쁘고, 반갑고, 서글프고, 안타깝고, 무엇보다 사랑스럽다. 가슴 속이 욱신거려 겐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흘러넘친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과 부딪힌 순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모습이 현실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그래, 자신은 분명 죽었다. 하지만 그래도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울고 있는 겐부의 등에 조그만 손이 얹혔다. 조용조용하게, 잘 울리는 목소리로 아리아가 그에게 말을 건다.
“아직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어요.”
겐부는 손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금방 눈물이 멈췄다.
“아직, 모두를 지켜볼 수 있으니까…….”
“그래.”
고개를 들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상대의 얼굴을 본다. 욱신욱신, 가슴 깊숙이 박힌 가시는 그대로였지만 이대로라도 괜찮았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겐부는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자신은 죽었다. 그러니 이제 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닿는 일도, 서로 얘기하는 일도, 상대에게 보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흑백처럼 극명하게 나뉜 세계, 결코 이어질 리 없는. 그래도 나는 너를 계속 지켜볼 테니까. 누구보다 소중한 너를, 계속─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고개만 돌려 아리아를 바라보고 겐부는 조그맣게 웃었다.
“너도 그렇지?”
화답하듯 똑같은 웃음을 되돌리고 아리아는 천천히 사라졌다. 겐부는 눈으로 그녀를 전송했다. 분명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보러 갔을 것이다.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강하게 기원하며. 지금의 자신이 그러하듯.
다리를 움직여 상대에게 다가갔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상대는 역시나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니, 저 멍한 얼굴을 봐서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못 알아차릴 것 같다. 바보 같긴. 의식하지 않아도 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기에 저렇게 얼빠진 얼굴인 걸까.
“뭐어, 나는 죽어버렸으니까 바람피우지 말라고 하진 않겠지만 말이지…….”
그래도 자신을 떠올리고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가 자신이 있는 쪽을 보고 겐부? 하고 속삭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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