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어감에 따라 점점이 별이 떠오른다. 낮에 소나기가 내린 탓에 공기 중엔 축축한 풀과 젖은 흙내음. 조금 쓸쓸해지는 초가을의 향기에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든다. 때마침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모처럼이니 포도주 한잔 하시지 않겠어요? 지나칠 정도로 담백한 유혹에 파에투사는 잠시 틈을 두다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이란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좋은 기분전환이 되리란 건 알았다.
그대로 정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딱히 거절을 예상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혼자라도 상관없었던 건지 테이블엔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주인이 따라주는 술을 받는다. 술잔 위에서 좀처럼 없는 모양의 양각이 둔하게 빛난다. 부드럽고 깊은 주향이 코끝에 닿고, 이끌려 한 모금 마시면 매끄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좋은 술이네. 별것 없는 감상을 던지면 이 술을 빚었을 상대는 그렇지요, 라고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대단찮은 건 없단 담담한 태도가 오히려 그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듯해 웃음이 나왔다.
침묵을 즐기며 드문드문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눈다. 안주는 말린 과일과 별 하늘. 밤의 청량한 바람이 들뜬 뺨을 적당하게 식히고, 머리가 적당히 어질어질 녹아간다. 낯선 감각에 문득 그리움을 느낀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으면 섬에서 오랜 지인과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게 벌써 아득히 느껴질 정도로 옛날이 되었음에 파에투사는 조금 쓸쓸해졌다. 내가 너희를 잊은 적이 없음인데. 다만 전부 제 선택이었고 모든 것은 재회를 위함이라 슬픔에 빠지는 일은 없다.
조금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조함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고 상대가 재빠르게 물어온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도 있는 건가요? 파에투사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옛날 생각이 났을 뿐이야. 잠깐의 망설임. 불쑥 그가 뇌까렸다.
"가족 생각이라도 나셨습니까?"
정답은 아니었지만 관계를 설명하기가 귀찮았기에 대충 그런 것이라고 답한다. 애매한 말에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그렸다.
"주제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알 것 같습니다. 저도 동생이 있거든요."
"동생?"
"네. 현재는 결혼해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남은 유일한 가족입니다."
이야기하는 얼굴이 지극히 온화하다. 요 며칠 간의 무뚝뚝한 얼굴과 비교하기 힘든 부드러움에 그가 동생을 많이 아낀다는 걸 눈치챈다. 저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건만 절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마음 언저리가 스르르 풀린다. 있을 리 없는 동질감은 입술의 빗장을 쉽게도 벗겨냈다.
당신도 쓸쓸해? 무례하기까지 한 질문이었지만 솔직한 감상이다. 이를 알기 때문인지 상대도 순순히 수긍한다. 쓸쓸합니다. 그러면서도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애정만이 한가득. 팔불출이네. 그 대사는 삼켜둔다.
"파에투사는 동생이 있습니까?"
당연한 것처럼 별것 아닌 질문이 덧붙여진다. 파에투사도 술을 홀짝이며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동생은 없어. 오라비가 있었지."
"과거형이군요."
틈 없는 즉답. 그에 비해 심드렁하기까지 한 태도는 역으로 상대가 이쪽을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걸 알게 한다. 파에투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술잔을 내려놓는다. 청량한 바람의 냄새. 어디에 꽃이라도 피어있는지 거기에 섞여 술과는 전혀 다른 달콤한 향기가 난다. 어느새 뜬 달을 바라보고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인다. 취기가 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와 관련 없는 이이기에 도리어 경계심이 풀렸을지도 모르고, 방금의 미소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 때문이든 평소라면 뱃속을 무겁게 두드렸을 말이 너무도 매끄럽게 혀 위를 기었다.
"그래. 과거형일 수밖에 없지. 갑자기 사라져버렸거든."
"사라졌다?"
"말 그대로야. 어느 날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어. 실제로 피가 이어진 사이는 아니라 내게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아볼 생각도 안 했지만 아마 사형이나 추방, 둘 중 하나겠지. 뭐, 추방당했다고 해도 그 성격으로는 어디서 헤매다 죽었을 게 분명하긴 해도."
답지 않게 요설이 되어버린 건 어떠한 감정의 반증일까. 잘 모르겠다. 불안일 가능성이 크나 이제 와서 새삼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상관 없으려나.
그렇다 하더라도 오라비에 대해 말하는 것치곤 퍽 매정한 말투가 되어버렸다. 울부짖던 과거의 자신이라면 잘도 지껄인다고 매도하지 않으려나. 하지만 이 밤에는 이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한다.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애수를 떠올리지 않도록. 깜빡, 하고 눈꺼풀 안에서 잠깐 옛 모습이 떠오른다.
"그다지 믿음직하지 못하신 분이었나 보군요."
"부정은 못 하겠네."
오랜만에 소리를 입힌 웃음이 나왔다. 지금 여기 그의 혼령이 있다면 너무하다느니 매정하다느니 온갖 투정을 부렸음이 틀림없다. 그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어 다시 웃음을 흘린다.
“어떤 분이셨습니까?”
상대의 질문에 퍼뜩 정신이 든다. 눈과 눈을 마주친다. 추운 날 들판에 내린 서리처럼 서늘하고 뾰족한 눈동자. 그 안에서 흔들리는 불꽃. 어쩌면 닮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마주하지 못하고 살짝 시선을 내렸다. 글쎄. 너무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안 나. 약하게 중얼거린다. 거짓말임은 양쪽 다 안다. 파에투사는 절대 오라비를 잊지 않는다. 너무 선명하여 곤란할 정도다. 이야기를 하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과거의 모든 것, 상냥하던 손끝도, 저를 볼 때마다 물러터졌던 눈빛도, 흔들리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지겨울 정도로 반추하였기에 입에 올리기도 물릴 정도로.
생각하면 이상한 얘기다. 기억은 언제나 추억으로 변해가는 법이다. 무언가에 붙잡혀선 나아갈 수 없는 법이므로 적당히 흐려지고, 적당히 미화되고. 그리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파에투사는 그러지 못했다. 함께 있었던 나날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만 잃은 후의 감정만이 변했을 뿐이다. 상실감은 흐려지고, 절망은 안도로 바뀌었다. 그것뿐이다. 딱 그 부분만 도려내어 굳힌 것 같은 과거. 하나의 사실. 파에투사는 절대 오라비를 잊지 못한다.
기억이 어찌 이리 선명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의문을 던진다. 아무도 이유는 알지 못하겠지. 자신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어떤 말을 던져도 옳지 않았다. 슬픔 때문이라기엔 너무 늦었고 미련 때문이라기엔 너무 홀가분하다.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음만이 분명하다. 오라비를 향한 제 감정은 세상의 모든 복잡을 섞어놓았으므로. ―그저,
“그저.”
분명한 것은 단 하나.
“세상이 허용한 온갖 다정함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사람이었어.”
파에투사는 여전히 라데스를 사랑한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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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앞으로도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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