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18 로맨스는 언제나 흐림, 때때로 맑음
콧잔등 위로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사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끄무레하던 하늘이 어느새 어둑하니 물들어있다. 비가 오려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투둑, 투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소나기의 전조. 빗줄기가 퍽 굵다. 밀려드는 다급함에 사라는 발을 재게 놀렸다. 병상을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감기에 걸리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지금 품 안에 있는 서류가 젖는 건 큰일이다. 이게 망가지면 사가랑 아이오로스랑 기타 등등이 죽는다고.
그렇지만 결국 세인트가 아닌 일반인의 발버둥일 뿐이다. 최대한 품에 숨겼지만 점점 젖어 들어가는 감촉에 결국 사라는 걸음을 멈추었다. 서류는 물론이고 머리카락과 옷까지 쏟아지는 비에 쫄딱 젖어버렸다. 아주 잠깐 사이에 이렇게 완벽한 폭우가 되어버리다니. 아니, 소나기는 원래 국지성 폭우를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시선을 올린다. 교황의 거처, 그곳으로 이어지는 12궁, 그 입구인 백양궁마저 까마득하게 보인다.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다. 내가 어쩌다 이 중요한 걸 들고 이 밖까지 나왔는지.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다. 물론 자신은 크로노스가 될 수 없으니 상상으로만 그친다. 상상 속의 자신은 실컷 맞아도 데미지가 없으니 문제없다. 하지만 한숨은 나왔기에 사라는 참지 않았다.
품을 들여다보면 엉망이 된 서류가 있다. 잉크는 다 번지고 너무 젖어 거의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이걸로 사가나 아이오로스나 기타 누군가는 사망 확정이네. 내가 아닌 누군가 힘내세요, 밤샘 야근. 조용히 명복을 빈다. 추가로 약삭빠르게 자신을 뺀 기분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으니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다른 사람도 이해해 주겠지, 라고 사라는 누군가 들었다면 피를 토하며 아니라고 절절하게 외칠 만한 걸 태평하게 생각했다.
문득 서류가 일부 떨어진다. 아니, 정정하자. 쓰레기가. 사라는 물끄러미 그걸 쳐다보다 모른 척 발을 돌렸다. 함부로 내버려 둬도 괜찮냔 누군가의 소린 무시한다. 어차피 중요하긴 해도 단순한 ―지금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간절한―자료일 뿐인 데다 설령 기밀문서였더라도 저 상태론 알아보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종이란 한 번 망가지면 끝이지. 그러니 사오리 아가씨에게 한시라도 빨리 성역의 전산화를 건의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21세기, 인터넷의 시대에 끝까지 필사를 고집하다니, 시대착오에도 정도가 있는 거 아닌가요. 물론 보안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건 대충 알지만.
늘어진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다리도 무겁다. 어느새 걸음도 현격히 느려져 있었다. 손끝이 차다. 자신은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몸도 약하니 빨리 돌아가서 몸을 데워야 할 텐데. 하지만 그러기엔 이 저질 체력, 이 아니라 성역의 광대함이 문제다. 다른 세인트들의 주거지는 멀리 떨어져 있고, 그나마 가까운 백양궁까지도 한참. 아무리 급하다지만 이 거리를 뛰어가다간 도중에 쓰러지고 말 테지. 그렇게 되면 (조금 비약해서) 사망, 디 엔드. 본말전도다.
결국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핀다. 건물은 없지만 다행히 의미 모를 잔해물은 많다. 사라는 그중 하나를 택해 재빨리 그늘로 숨어들었다. 비가 완전히 들이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상당 부분은 피할 수 있을 정도다. 빗방울이 튕기는 소리가 울린다. 사라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나기라면 금방 그칠 테니 여기서 쉬다가 비가 좀 잦아들면 가야겠네.’
물론 현실이 그리 만만치는 않을 터다. 일단 비가 바로 그친다고 해도 자신이 감기 걸릴 확률은 100퍼센트인 것 같고. 분명히 앓아눕겠지. 그래도 뭐, 한 번 앓아누운 거 두 번 못 앓아누울까. 어차피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되는 거.
내친김에 쓸모없어진 종이 뭉치도 내던진다. 옷자락을 비틀어 물을 짜낸다. 발밑에 찰박거릴 정도의 웅덩이가 생긴다. 찝찝하니 신발과 양말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바로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여기서 발을 말릴 수단도 없으니 벗어도 의미가 없긴 하다. 얌전히 포기하고 얼굴만 대충 닦는다. 추위는 가시지 않았지만 그나마 몸은 가벼워졌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물을 짊어지고 있었던 거야.
“사라?”
갑자기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니 자신과 사가가 빗속에 서 있다. 왜 여기에. 필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둥글어진 푸른 눈동자가 이쪽을 살핀다. 곧 사가가 슬프게, 흐리게 웃었다. 앗, 이 인간 서류 젖은 거 알아챘구나. 그래도 여기서 대뜸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책망하지 않는 게 동생인 카논과 다른 점이다.
“비가 갑자기 내려서…….”
그 점이 되려 찔려서 밑도 끝도 없이 변명을 꺼낸다. 이해한다는 듯 사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어둑한 운영(雲影). 시끄러운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정적. 얼굴 위로 한 번 더 그림자가 겹친다. 사라는 조용히 사가를 올려다보았다. 속눈썹 끝에 아롱거리는 물방울.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처연하다. 무심코 입술을 감문다. 우연히 단둘이서 비를 피하게 된 두 사람이라니. 로맨스 소설에서 클리셰적으로 나올만한 장면이지만 현실은 지긋지긋한 과로 끝에 괴상한 유대감만 형성해버린 좀비 둘이다. 참 불쌍타.
사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린다. 추운가? 가벼운 속살거림. 대답도 전에 머리 위로 커다란 천이 푹 둘러씌워 진다. 사가가 언제나 두르고 다니던 망토다. 없는 것보단 낫겠지. 의미없는 말이 덧붙여진다. 젖은 건 마찬가지지만 확실히 방금 전보다 따뜻해진 것 같기도 하다. 사라는 망토를 꽉 여몄다. 축축한 비 냄새와, 거기에 섞여 청량한 향이 났다. 사가와 매우 어울리는.
“……그나저나 정말 엄청난 비로군.”
뭔가 심히 기계적으로 대사를 읊은 사가가 옆에 자리를 잡는다. 아무래도 같이 비를 피할 모양인가보다. 이전, 비가 얼마다 오든가 말든가 열심히 맞고 다녔던 모습을 생각하면 나름 배려해주는 건지도 모른다. 무엇에 대한 배려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러네요. 무안하지 않도록 적당한 대답을 던진다. 당연히 그 후로 대화는 단절. 서로 원래 그러려니 하는 인간들이라 별로 어색하지는 않다. 오히려 긴장이 풀려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살짝 몸을 뒤로 기댄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체온. 심히 안심되는. 빗소리는 여전히 요란하다. 오롯한 둘만의 공간.
두근, 고동이 들렸다. 사라는 조심스럽게 심장 위로 손을 얹었다. 음, 여전히 정상작동 중이다. 평소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나름대로 로맨틱한 상황인데 두근거림 한 점도 없다니 어떤 의미에서 참으로 강철 심장이구나, 나. 아니, 이건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힐끔 사가의 얼굴을 본다. 아프로디테와는 종류가 다르지만 아름다운 용모, 라고 생각한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억지로 언어를 만들어내자면 엄격하고 단단한 아름다움이다. 아프로디테처럼 누군가를 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절하고 단절하는, 그렇지만 경외하지 않을 수 없는. 취향이 아닌 건 부정할 수 없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렘은 티끌만큼도 없다. 상대가 아프로디테였다면 얼굴을 본 순간 이미 반쯤 설레고 있었을 텐데. 카뮤나 수라였다면 심장 어딘가가 찡― 했을 텐데. 악의는 없지만 하는 일마다 호감도를 깎어 먹고 있는 미로였더라도 두근거렸을 텐데. 그 외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라다만티스나 미노스였더라도, 심지어 얼굴이 똑같은 카논이었더라도 로맨틱한 상상 정도는 꽃피울 수 있었을 텐데. 왜인지 사가에게만은.
너무 빤히 바라본 탓인지 문득 사가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사라? 명백한 의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소리가 떨려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추위에 오래 노출되어있었으니. 허나 어떻게 생각했는지 남자의 안색이 갑자기 바뀐다.
“미안하다. 멍청하게 여기 계속 있을 게 아니었어.”
아니, 그렇게 말하면 여기서 버티고 있으려던 제가 엄청 멍청해지는데요. 당연한 항의의 말은 미처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사가가 자신을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사라는 몸을 딱딱하게 경직시켰다. 이 또한 불가항력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미안해서 죽고 싶단 시선은 보내지 말아 줄래요. 잘못한 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아니니까.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줘.”
“……아뇨.”
갑자기 들어 올려져서 놀랐을 뿐, 이라기보다는 동생 쪽과 반대로 너무 정중하게 안아줘서 놀랐을 뿐이다. 카논은 날 맨날 짐짝처럼 들어 올렸는데! 그런데 갑자기 왜 안는 건가요!?
의문은 금방 풀렸다. 사람 하나를 들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몸놀림으로 사가가 달려나간다. 일반인인 자신을 배려해서 광속은 아니지만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속도로. 너무 빠르기 때문인지 쏟아지는 빗줄기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망토 덕분이기도 하지만.
넓직한 남자의 품에서 얼굴을 빼자 주변 풍경이 휙휙 지나간다. 상쾌하다든가 속이 뻥 뚫린다든가 하는 느낌은 안 든다. 비 때문에 안 그래도 시야가 안 좋은데 빨리 감기까지 되니 오히려 어지럽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너무 아파! 픽션 속 히로인들은 용케 이런 상황에서 감탄사를 터트리는구나. 자신은 전혀 다른 의미로 감탄사를 터트릴 것 같은데.
주변 구경은 포기하고 얌전히 사가의 품에 파묻힌다. 이러면 사가가 막아주기에 그나마 좀 낫다. 심장은 여전히 나대지 않는다.
“참 신기하지…….”
“뭐가 말인가?”
무심코 속말을 흘리자 용케 알아듣고 사가가 말을 건다. 살짝 위를 본다. 같이 움직이기 때문인지 보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얼굴. 사라는 망설이다 입술을 열었다.
“사가랑은 아무리 이런 행동을 해도 로맨스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게요.”
아름다운 얼굴이 퍽 미묘해진다. 그래, 그렇겠지. 칭찬은 분명히 아닌데 딱 잘라 욕이라 말하기도 미묘하고, 그럼에도 어딘가 자존심을 건드릴 테니까. 일단 별 뜻이 없는 것처럼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사가도 제가 상대라면 로맨스가 싹틀 거라 생각하진 않잖아요.”
그 말에 사가가 바로 수긍했다. 역시 기분이 매우 미묘했다.
형용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어느새 백양궁에 도착했다. 사라 혼자였다면 30분은 걸렸을 걸 5분 만에 돌파한 사가의 쾌거다. 그래도 타이밍이 조금 늦었는지 열이 오르는 듯했다. 어질어질 붕 뜨면서도 불쾌한 이 기분. 땅에 다리를 붙였는데 비틀비틀한. 감기의 전조다.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또. 허약한 몸뚱아리같으니. 앗, 방금 엄청나게 불쾌해하는 카논의 얼굴이 보인 듯한데. 기분 탓이지만 마냥 기분 탓인 것도 아닌지라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쉽게 말해 사가의 말을 무시한 건 삐져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소리다. 고의가 아예 안 섞였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사가는 계속 말을 건다. 등을 미는 손이 단호하다. 성실한 남자 같으니라고. 삐진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 모르려나? 사라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며 사가의 지시에 따랐다. 애당초 자기가 먼저 지껄였던 터라 그다지 삐진 것도 아니긴 했다. 침묵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발을 옮긴다.
남자가 이끄는 대로 궁 안으로 들어갈수록 걸음 끝에 붙는 질척함이 커졌다. 덩달아 온도도 내려갔다. 어깨가 심하게 떨린다. 보온이라고는 코빼기만큼도 신경 안 쓴 쓰잘데기 없는 석축 건물 같으니라고. 사라는 속으로 있는 힘껏 욕을 지껄였다. 물론 그렇다고 상황이 호전될 리는 없지만 기분 전환은 된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아테나를 까는 건 아니다.
“괜찮은가?”
너무 심하게 떨었는지 사가가 걱정스레 말을 걸어온다. 사라는 가볍게 사가를 쏘아보았다. 안 괜찮은데요. 상대가 미로만 됐더라도 그렇게 말해줬을 텐데. 하필 상대가 상대라 그러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다. 너무 진지한 성격인 건 둘째치고 또 자책한 끝에 땅 파고 들어갈까 봐 걱정이 돼서. 진짜 이 남자 멘탈이 너무 약해. 심장은 유리로 되어있다야? 사오리 아가씨나 다른 사람들에게라면 몰라도 자신에게까지 그럴 필욘 없을 텐데.
“괜찮아요.”
일단은. 속말은 꾹꾹 삼킨다. 입이 근질거리지만 어쩔 수 없다. 사가는 미로가 아니다. 함부로 입을 털어도 좋은 미로가 아니란 말이다.
당연히 사가는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긴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심한 떨림인데 믿으면 그게 바보다. 여기서 믿는 척해주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아무래도 사가는 후자인 모양이다. 노골적으로 일그러지는 표정에 사라는 알아채지 못한 척 몸을 돌렸다. 자신을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계속 이러니 솔직히 부담된다.
“사라? 사가?”
다행히 갑자기 난입한 백양궁의 주인 덕분에 미묘한 대치상황은 미수로 끝났다.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로 다가오는 므우를 보고 사라는 반색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병상련의 회사 동료보다는 가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고 때때로 위험한 동생이 편한 법이다. 물론 세이야들이 최고이긴 하지만. 비밀은 아니더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잔잔한 므우의 얼굴에 풍랑이 인다. 사라는 새삼스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음, 완벽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네. 은근히 과보호인 므우가 걱정할 만하다. 그래도 좀 적당해 해줬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매일 두르고 다니는 머플러인지 뭔지도 억지로 둘러주려고 하지 말고. 잠깐, 너무 빈틈없이 둘러서 숨이 막히는 데요?!
허우적대는 자신과는 반대로 사가는 도리어 안심한 듯하다. 방금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으로 부탁한다, 같은 말을 지껄이고 떠난다. 므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아니, 잠깐. 진짜 잠깐. 므우 씨 지금 저 사람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건가요? 사가도 엄청나게 젖었는데요?! 아무리 쌍아궁이 가깝고 바로 위에 알데바란이 있어도 그렇지 수건 하나는 쥐여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슬프게도 사라의 외침은 전부 머플러에 먹혔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므우가 일부러 모른 척했다. 가만 보면 므우도 은근히 사가한테 냉정하단 말이지. 물론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렇지. 계속 주변에서 이러니까 사가가 저렇게 귀찮은 성격이 된 거 아니냐고.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므우는 끝까지 사가를 보지 않았다.
“빨리 몸을 데우세요.”
단호한 명령에 사라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건 일단 사양이다. 사오리 아가씨가 알아서 해주겠지.
샤워를 하고 나오자 므우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이 정갈하게 개인 채로 놓여있었다. 입어보자 예상대로 질질 끌린다. 므우랑 자신의 키 차이가 거의 30cm니까 어쩔 수 없다. 소매랑 바짓자락은 돌돌 말면 되니까 불평 말고 입기로 한다. 다만 헐렁한 상의에 비해 바지 허리가 별로 흘러내리지도 않고, 가볍게 묶으면 입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 굴욕적이다. 므우 씨, 너무 나이스 바디에요! 속옷은 상상에 맡긴다.
거실, 비슷한 공간으로 나가면 이미 벽난로에 불이 붙어있었다. 저거 장식이 아니었구나. 근처에 놓인 의자는 필시 자신을 위해서다. 주인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미리 의자에 앉는다. 딱 좋은 온기가 노곤노곤해 녹은 치즈처럼 흘러내릴 것 같다.
“여기.”
뒤에서 불쑥 컵이 내밀어진다. 고개를 돌리자 깔끔하게 정리된 므우의 얼굴이 나타난다. 사라는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얌전히 컵을 받아들었다. 데운 우유다. 내용물을 입에 댄다. 은은하게 단맛이 났다. 꿀을 넣었구나. 이거 은근히 맛있네. 우유 별로 안 좋아하는데.
므우가 다른 의자를 끌고 와 근처에 앉는다. 많은 말은 없다. 이런 점이 대놓고 과보호인 아이오로스와 다르다. 아이오로스였다면 분명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부터 캐묻기 시작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을 텐데. 둘 다 자신을 염려하는 건 똑같지만. 그러니 싫은 기분은 절대로 아니다.
온기에 감싸여 꾸벅꾸벅 졸고 싶었다. 불똥 튀는 소리만 조용하게 울린다. 사가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평화로운 침묵.
문득 사라는 기시감을 느꼈다. 자신에게 이런 경험이 없는 건 분명한데 이런 상황은 어디선가 본 것 같다. 기억을 더듬는다. 답은 어렵지 않게 찾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로맨스 소설에서 지금과 비슷한 씬이 나왔더랬지. 어? 근데 이것도 로맨스의 범주에 들어가나?
의아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납득이 안되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집에서 씻고, 타인의 옷을 빌리고, 타인의 보살핌을 받고, 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어딜 봐도 수상쩍고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다. 상대가 가족 포지션이라고 못을 땅땅 박아놓은 므우라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괜히 설렜을지도 모르잖아.
그나저나 아까 사가와도 그렇고, 갑자기 오늘 하루 동안 로맨스 소설에 나올법한 상황이 반복되다니. 이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없다가 갑자기 왜. ……아니, 정말 없었나? 진짜로? 사라는 갑자기 든 의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며 필사적으로 전 생애를 떠올렸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애매하지만 잘하면 로맨스로 보일지도 모르는 장면이 없지 않아서. 근데 왜 그때는 전혀 몰랐지?
“……요즘 로맨스 소설을 찾아 읽어서 눈치가 좀 생겼나?”
“로맨스요?”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므우가 즉각 반응한다. 눈이 크게 뜨인 게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다. 응, 이해해요. 내가 로맨스란 말을 꺼낸 게 엄청 안 어울리겠죠. 그러니 못들은 걸로 해줘요. 기원을 가득 담아 딴청을 부린다. 그러나 므우는 굳이 그 뒤를 캐물었다.
“갑자기 왜 그……, 로맨스…… 소설을?”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이지만 사라는 우물쭈물 대답을 피했다. 기분 탓인지 므우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지는 것 같다. 그렇게 충격이었나.
물론 이유가 없진 않았다. 자신은 장르 가리지 않고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보는 타입이지만 특정 장르만 찾아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다만 그 이유란 게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엔 좀 부끄럽고, 무엇보다 너무 자뻑같아서. 하지만 계속 입을 닫고 있기엔 므우가 너무 필사적이었다.
“……알았어요. 말할게요. 다만 웃진 말아 주세요?”
“물론입니다.”
확답을 받고 사라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든 일의 원흉인,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와 비슷한 색을 가진 소녀의 얼굴을. 감기가 유행하던 그 날, 소녀는 무어라 말하며 자신을 놀렸던가.
“그…… 있잖아요. 사오리 아가씨가 아무래도 저랑 샤카를 엮어주려는 것 같더라고요.”
“………….”
“뭐, 그것까진 괜찮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다른 사람도 툭하면 샤카를 들먹이는 게 어쩐지 비슷한 목적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저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만.”
“물론 므우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왠지 그런 느낌이.”
“아니, 아니, 아니. 잠깐, 잠깐, 잠깐.”
“여하튼! 어차피 착각이겠지만 그런 이유로 좀 찾아봤어요. 어떻게든 로맨틱한 상황을 피하려고요. 아무리 샤카가 저를 괴롭히는 데 관심 있다지만 그걸 기회로, 이런 방식으로 저에게 샤카를 떠넘기려는 건 너무하잖아요.”
“……………………네?”
므우의 눈이 점이 된다. 아무래도 역시 어처구니없는 망상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다들 시간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샤카를 이어줄 리가 없지. 까지 생각했을 때 이번엔 커다란 한숨. 사라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혹시 이유가 너무 황당무계해서 질려버린 건 아니겠지?
“사라.”
“……네?”
다행히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다시 마주한 므우의 얼굴은 평소대로 온화하게 돌아와 있었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된 걸까. 고민하는 사라에게 므우는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사라의 그런 점을 매우 좋아한답니다.”
“……? 감사해요?”
영문을 몰랐지만 사라는 일단 수긍하기로 했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한 사람의 희망이 바스러지는 것만으로 끝나는 참으로 평화로운 결말이었을 터다. 하지만 언제나 모두의 바람을 무시하는 게 사라라는 존재. 아이오로스가 뒷목을 잡게 만들고, 므우가 위장약을 챙기게 만들고, 카논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최종 병기. 그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주변에서 과민반응하게 되는 사라의 호기심이 일을 시작했다.
쉽게 말하자면 사라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장면을 주변인들과 재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첫 번째 타자, 아프로디테.
그녀가 두 손을 마주 잡고 눈을 빛낸다. 간절한 몸짓,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시선. 그럼에도 지나치게 순수하고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시원스러울 정도의 자기 본위. 그 언젠가의 재현에 아프로디테는 터져 나오는 탄식을 참지 못했다. 방관하며 지켜보는 건 꽤 재밌었고, 가끔씩 참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 나에게?”
당연한 의문이 튀어나온다. 말투에 저도 모르게 원망이 섞였다. 그걸 못 알아챈 것처럼 사라가 슬그머니 볼을 붉혔다. 이전에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엮어주었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수줍어하고 있는 건지 멋쩍어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행동이다.
“그거야 아프로디테가 미인이니까요.”
반대로, 내뱉는 말은 어디까지나 대담하다. 당당한 찬탄. 틈을 주지 않는 스트레이트 한 태도에 아프로디테는 이번에도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미인이라는 데 어쩌겠어. 내가 너무 미인이라 두근두근한 상황 좀 당해보고 싶다는 데 어쩌겠어. 말하다 보니 자화자찬이 되어버렸지만 어쩔 수 없는 걸로 치고.
자포자기한 아프로디테는 피식 웃고 사라에게 다가갔다. 기대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사라가 슬금슬금 물러선다. 의미 없는 반복. 곧 사라의 등이 벽에 닿았다. 물러설 곳 없는 상황에서 한 발짝 더. 벽에 손을 짚고 고개를 아래로 내린다. 둥근 갈색 눈동자가 곧게 이쪽을 본다. 새삼스럽게 작다고 아프로디테는 생각해버렸다. 성역에 온갖 풍파를 몰고 다니지만 그저 작고 평범한, 조금 특이할 뿐인 제 또래의 여자.
아프로디테? 조그만 입술이 제 이름을 부른다. 얼굴을 더욱 가깝게 한다. 서로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 이걸로 만족했어? 의식해서 낮게 속삭인다. 알기 쉬울 정도로 사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프로디테……. 진짜 미인이네요.”
반복되는 칭찬. 다만 어조가 심히 여상하다. 정말로 두근거려서 내뱉는 게 아니라 그저 예술품에 대한 감상이랑 다를 바 없는. 이 무덤덤한 감탄이 너무 그녀답고 너무 예상대로였던지라 아프로디테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두 번째 타자, 미로.
“……도저히 상황을 이해 못 하겠는데 말이지.”
미로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정말로 상황을 이해 못 한 건 아니다. 어째서는 이해 못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는 이해했다. 그럼에도 이리 말한 것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전갈의 미약한 반항은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해 못 해도 이해하세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저에게만 매정한 태도에 미로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켰다. 사실 성질대로였다면 당장 길길이 날뛰었어야겠지만 도무지 그리 할 용기가 없다. 제아무리 미로라도 아이오로스와 므우를 뒷배로 삼고 있는 사라에게는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비겁하다고 욕하지 마라. 잘못하면 대련을 가장한 체벌이 이어지는데 어쩌라고.
“근데 꼭 내가 아니라도 괜찮지 않냐……?”
너 내가 맨날 피해가 끼친다고 싫어했잖냐. 일단 비굴하게 상황을 회피해본다. 반항해도 대련이지만 이 사실이 알려져도 대련이다. 불합리의 극치다. 차라리 제가 샤카처럼 이 녀석한테 흑심이라도 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물론 미로의 두 번째 반항도 속절없이 씹혔다.
“저도 어쩔까 생각했는데요. 뭐, 다른 건 별로라도 일단 얼굴은 나쁘지 않으니까 한 번 해보기로 했어요.”
“그러세요…….”
여기까지 와서 회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니었냐고. 랄까, 너 이전에는 은근히 돌려 까더니 이제는 대놓고 깐다?! 이런 건 카논에게만 했으면서!! 여기서 카논에게 하는 건 장난 같은 거고 자신에게 하는 건 진심이라는 건 미로도 알았다. 슬프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라가 두 팔을 쭉 뻗는다. 모든 걸 포기한 미로는 그에 맞춰 사라를 얌전히 안아 올렸다. 공주님 안기는 아니고 한쪽 팔로. 자세가 불안정하니 자연스레 사라의 팔이 목을 감싸 안는다. 가까워진 체온. 매일 황금 성의를 걸치고 다니기 때문인지 무게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 온기만은 가깝다. 이제 됐냐? 그런 심정을 담아 사라를 올려다본다. 평소와 전혀 다른 앵글. 그림자 진 속눈썹이 팔랑거린다.
“……생각 보다 두근거리진 않네요.”
“나는 다른 의미로 두근거려 죽을 것 같다만.”
그러니 빨리 내려오란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세 번째 타자, 미노스.
“상당히 흥미로운 생각을 하시는군요.”
모든 전말을 들은 미노스는 싱긋 웃었다. 평소와 같은, 그러니까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다. 그에 사라가 시선을 보내온다. 그래서 거절하실 건가요? 라는 말이 얼굴에 다 쓰여있다. 간절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 표정이다. 미노스는 예의 그 미소로 다시 화답했다.
“설마요.”
별로 대단한 부탁도 아니었고, 사라에 대한 호감도 어느 정도 있는지라 굳이 거절할 필요까진 없을 정도다. 상황에 직접 끼어든 적은 없지만 얼핏얼핏 건너 들은 걸로 상황은 파악했던지라 재밌겠단 생각도 했고. 무엇보다 가장 매력적인 점은 소속이 다른지라 이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문제의 세인트들이 제게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세인트는 단순하고 감정적인 게 미덕이니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상당했지만. 어찌 되었든.
“당신이 원하신다면 어떤 여왕님도 부럽지 않게 에스코트해드리죠.”
미노스는 사라에게로 우아하게 손을 뻗었다. 잠시 망설이다 사라가 그 위로 손을 얹었다. 작은 손이다. 이야기 속의 귀부인처럼 마냥 부드러운 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전사의 손도 아니다. 명계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인 판도라의 손도 이처럼 여리진 않을 터다. 사라가 얼마 전까진 아무것도 모르던 일반인이었단 자각이 새삼스럽게 밀려왔다.
일순의 당황을 능숙하게 감추고 그녀를 이끈다. 자신에 비하면 작은 보폭에 맞춰 나란히 계단을 오른다. 천천히, 한 발짝씩.
이는 미노스에게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보통 누군가와 같이 걸을 때에 자신은 앞에 서는 입장이었다. 라다만티스나 아이아코스와는 대등하게 걸었지만 이리 친밀할 리는 없었고, 이처럼 배려해줄 일은 더더욱 없었다. 과연. 약간이지만 그녀가 이런 경험을 하고 싶었던 이유가 이해됐다.
슬쩍 옆으로 시선을 흘린다. 어색한 듯 시선을 방황시키는 사라의 모습이 보였다.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에 미노스는 조금 짓궂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가요? 예상했던 대로인가요?”
“……음, 아뇨. 조금 장소 선정을 잘못한 것 같달까…….”
“뭐, 그렇겠죠.”
확실히 명계는 데이트를 즐길만한 곳이 못 되긴 했다.
등등. 이럭저럭 사라가 유사 로맨스 소설 체험을 마칠 때 즈음 샤카가 찾아 닥쳤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예상하고 있던 사라는 당황하지 않고 읽던 책을 덮은 채 침착하게 손님을 맞아들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상황이 너무 패턴화된 것 같은데요.”
“사라, 그런 건 말로 하지 않는 게 암묵의 룰일 텐데.”
“그런가요.”
담담히 말은 하는 데 사실은 입이 멋대로 지껄이는 것 뿐이다. 머리로 예상은 하고 있었어도 심정적으론 못 따라가는 것이다. 샤카가 딱히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한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샤카가 무언의 재촉을 계속한다. 감은 눈으로 보내는 시선이 뜨겁다. 그 의미는 분명하면서도 의도는 전혀 알지 못해. 도대체 어떤 명탐정이 와야 이 남자의 와이더닛을 알아낼 수 있는 걸까. 역시 당신은 말을 해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어떤 것이든 그건 제게 큰 의미가 될 테니.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아, 사라는 포기하고 조용히 말을 자아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아요?”
“………….”
“남들과 똑같은 걸로 괜찮은 건가요?”
일순, 공기가 조이고 샤카의 입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웃는 듯, 우는 듯.
“괜찮지 않다. 그렇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되지 않느니 차라리 남들과 같기라도 바라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샤카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조였다. 지독히도 자조적이고, 산뜻하리만치 처연한. 심장이 꽉 쥐어짜이고, 뱃속에서 온몸의 피를 쏟아내는 듯한. 그리하여 모든 말을 빼앗기기에 충분한. 사라는 버금, 입술만 벌렸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침묵 후, 한꺼번에 힘이 빠진 것처럼 샤카가 축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래서 이건 어디서 나온 장면이지?”
“방금 전까지 보던 책에서요.”
“……그런가.”
샤카의 어깨가 더더욱 늘어진다.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너무 재미가 없었나? 어찌 되었든 미션은 완수했기에 사라는 더는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책을 펼쳤다.
덤 1.
이리하여 사라의 로맨스 소설 체험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로맨스 소설 읽기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그거 재밌어?”
그런 그녀를 보고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성역에 온 세이야가 툭 질문을 던졌다. 아직 새콤달콤한 사랑을 모르는 소년에겐 비록 유사라지만 이런 소설에 열중하는 누나가 이해되지 않았나 보다. 어떻게 보면 타당하기까지 한 질문에 반대로 새콤달콤한 사랑을 알기엔 충분한 나이지만 관심은 그다지 없던 사라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럭저럭.”
애당초 사라는 심오한 철학이나 문학적 가치를 따져가며 책을 읽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취향에 크게 어긋나지만 않으면 어지간한 책은 다 좋아했다. 로맨스든 판타지든 추리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가끔 이게 뭔가 싶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픽션이란 걸 처음부터 머릿속에 넣어놓고 있으면 의외로 재미있기도 했고.
“난 이런 거 조금만 읽어도 잠이 오던데.”
“로맨스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잖니.”
“윽! 그건 그렇지만!”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세이야가 책을 뒤진다. 어쨌든 누나가 좋아하는 거니까 자신도 관심이나마 가져보려는 걸까. 만약 정말 그렇다면 매우 흐뭇한 일이다. 라고 행복한 상상에 빠지던 사라는 문득 깨달았다. 잠깐, 그쪽의 책은……!
“응? 누나. 이거 로맨스 소설인데 왜 표지엔 다 남자들끼리나 여자들끼리만 그려져 있어?”
“……그런 종류의 로맨스도 있는 거란다.”
이 일을 계기로 사라는 한동안 로맨스 소설은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덤 2.
일련의 소동 속에서 극히 일부지만 사라의 마수를 피한 인물이 몇몇 있었다. 아이오로스와 아이오리아와 알데바란과 카논이 그 예다. 모두 납득할만한 인선(?)이었고, 그랬기에 반발은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사라의 차별대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다만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하나인 카논은 대충 짐작하면서도 그 이유를 묻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에 잡혀 멀쩡히 잘 있던 사라를 굳이 납치해 와 굳이 질문을 던졌다. 이때 사라가 이것도 패턴화……. 라고 중얼거린 건 무시하기로 하고.
“그래서 아이오로스한텐 왜 안 했지?”
말하다 보니 지나치게 심드렁해진 건 봐줬으면 한다. 그러니까 이유는 대충 짐작하고 있다니까 그러네.
“가족에게까지 그런 걸 요구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덩달아 답하는 사라의 목소리도 심드렁했다. 심지어는 질문도 안 했는데 답을 따박따박 뱉어내기까지 한다.
“아이오리아는 마린이 있어서, 알데바란은 너무 성실한 사람이라 미안해서요.”
너무 예상했던 대로라 오히려 그게 놀라울 지경이다. 하긴 사라가 말한 것 말고 무슨 별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보기보다 단순하고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딱 세이야의 누나다운 게 사라다. 그랬기에 카논은 이어질 그녀의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카논에게 안 한 건 너무 안 어울려서요. 원래 우리가 그럴 사이도 아니고요.”
거봐라. 상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말에 카논은 시원스럽게 파안했다.
“그렇지.”
역시 자신들은 이 정도가 딱 어울렸다.
모 사이트에도 이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만 최근 습작으로 돌릴까 고민중입니다
왜냐면 블로그랑 다르게 거기는 안 올리면 재촉당하는 듯한 죄책감이 들어서<(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