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17 어쩌면 그럴지 모르는 미열
많이들 의심하지만 세인트는 인간이다. 맨주먹으로 바위를 부수고, 물건을 얼리고, 때론 하늘을 나는 둥 비상식적인 행위를 일삼긴 해도 분명 인간이다. 때문에 세인트에게도 한계는 분명히 있었고(한계마저 넘어 기적을 일으키는 소수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막을 수 없는 사건도 당연히 존재했다. 이번 일이 그랬다.
때는 환절기, 날씨가 급격하게 바뀌는 시기. 성역에 전염성 강한 병이 돌았다. 일반인, 세인트를 가리지 않고 성역 대부분을 쓰러트린 병은 결국 골드 세인트까지 굴복시켰다. 제일 처음 쓰러진 사람은 온갖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잔뜩 약해졌던 사가. 쓰러진 곳은 집무실 책상 옆이고, 심지어 발견자는 아테나였다.
그쯤 되자 처음엔 낙관적으로 생각하던 의료진은 몇 남지 않은 생존자와 함께 투쟁에 들어갔다. 이대로 뒀다간 모든 일이 우리에게 쏟아진다! 솔직히 하데스까지 무찔러놓고 병 때문에 망하면 그게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그리하여 질병 퇴치본부가 발족했으나 아직까지는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정도로 강력한 병이었다.
일단 한번 감염되면 발열, 두통, 폐 질환 등의 증상을 보이고 완치약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 병의 이름은 감기라 한다.
거친 돌길을 가벼운 다리가 박차고 나간다. 스물이 조금 넘은 듯한 이국의 여자였다. 어깨까지 닿는 갈색 머리카락과 둥근 갈색 눈동자, 지극히 평범한 인상이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한 번 더 시선이 가는 타입이다. 아득한 눈길과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얼굴 근육이 그녀에게 ―별로 좋지 않은 의미로―오묘한 인상을 더해준다. 다만, 지금은 그 무표정에 느긋함과 다급함이 공존했다. 어딘가 귀찮아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증거로 다른 행동은 여유로운 데 비해 다리만은 바삐 움직였다. 길이 다듬어지지 않은 터라 때론 헛디디고 비틀거리기도 하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한다.
이윽고 그녀가 도착한 곳은 거주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석조건물이었다. 커다랗지만 위압감은 없고 실용성에 따라 지어진 공간이다. 조막만 한 뜰엔 올리브 나무가 한 그루가 있고, 나무 아래 기다란 의자가 놓여있다. 건물 앞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뒤에도 자그만 밭이 있다.
그녀는 문 앞에서 서서 가볍게 노크를 했다. 몇 초 기다렸지만 대답은 없다. 이미 예상했던 터라 실망 않고 바로 문을 연다. 제대로 기름칠을 하지 않은 듯 삐걱거리는 경칩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안에서 흘러나오는 커다란 소란에 조그만 소음 따윈 금방 묻혔다. 그 정도로 아비규환이었다.
잠깐 말을 걸려다 이내 포기하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간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밖과 달리 내부는 땀이 날 정도로 후끈거렸다. 겉옷을 벗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녀는 일단 입고 있기로 했다. 어차피 긴 볼일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누가 온 것도 모를 정도라면 오래 있을 수도 없을 터다. 자, 그럼 어떻게 볼일을 끝마친담?
“아, 사라 님.”
고민하고 있을 때 문득 누가 친한 척 말을 걸었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고 보자 저번에 사라가 입원했을 때 신세를 졌던 의사였다. 마냥 살갑게 굴었던 건 아니지만 워낙 친절한 사람이라 그럭저럭 안면도 트고 인사도 하는 사이가 됐다. 어쩐 일이세요? 라고 묻는 목소리가 부드럽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사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곧 제 목적을 떠올렸다.
심부름이에요. 말하며 여기까지 조심스레 들고 온 보따리를 건넨다. 설명도 없었으나 무엇인지 알아챈 듯 의사가 푸근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지었다.
“일부러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라는 여상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좋단 태도에 의사는 일순 쓴웃음을 띄웠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조금 정신없죠? 다들 증상이 심하진 않은데 치료를 잘 안 받으려고 하더라고요. 떼쓰는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죠. 덕분에 억지로 잡아다가 치료하는 중이랍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화제전환. 그래도 손님 대접할 틈은 있으니까요. 차라도 한잔하시고 가세요.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권유에 사라는 끄덕이려다 잠깐 생각 후, 이내 부드럽게 거절했다.
“아니, 바쁘시니 그냥 가볼게요. 그래도 온 김에 잠깐 좀 들여다봐도 괜찮죠?”
누구를, 이라고 의사는 묻지 않았다. 다만 예상했던 것처럼 사라를 빤히 바라보다 담담히 무언가를 건넬 뿐이었다. 사라는 내밀어진 물건을 바라보다 의미 없이 어깨를 한 번 더 으쓱이곤 얌전하게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안내는 필요 없으시죠? 란 말을 배웅으로 사라는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목표는 골드 세인트들의 입원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 감기는 계급이 높을수록 증상이 심했다. 최고봉은 골드 세인트로, 그들 반수 이상이 감기 바이러스에 패배했다. 덕분에 이번 감기는 성역을 노린 누군가의 음모라는 설도 암암리에 도는 모양이다. 사라는 절대적으로 본인의 체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인한 방심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찌 되었던 간에 골드 세인트 대부분이 드러누운 건 사실. 덕분에 의료실에서는 한때 곤욕을 겪은 모양이었다. 다들 입원시키기는 해야겠는데 병실은 적지, 그렇다고 실버 이하랑 같은 병실에 두기는 서로 불편하지, 모두의 궁으로 왕진을 하러 가기엔 일손도 없지. 다행히 상냥하신 아테나께서 그냥 다들 한 방에 집어 넣어버리라고 말씀해 주신 덕분에 살아난 듯 싶지만.
문득 기척을 느낀다. 시선을 돌리니 기다린 것처럼 여, 하고 짧은 인사가 건네진다. 그렇게까지 가깝지는 않은 얼굴에 사라는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스마스크?”
어제까지 멀쩡했던 거로 아는 데 왜 여기 있나요? 라는 의미를 담아 묻자 용케 알아듣고 데스마스크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팔랑거려 보였다. 익숙한 저 모습은 분명 약 봉투다.
“가벼운 증상이 나타나서 약을 받으러 온 것뿐이라고.”
우리 자애로운 여신께서는 걱정이 많으셔서 정말 큰일이지, 라고 누가 들었으면 당장에라도 덤벼들 불경한 말까지 덧붙여주는 건 서비스인가. 아테나에 대한 신앙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사라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인간이 이미 아테나에게 꼼짝 못 한다는 건 너무 잘 안다.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재미가 없는지 데스마스크가 가볍게 혀를 찬다. 사라는 그대로 남자를 무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를 데스마스크가 투덜대며 따라온다. 아무래도 목적지가 같았던 모양이다.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겹친다.
“그런데 너 그 꼴은 뭐냐?”
“네?”
느닷없는 데스마스크의 지적에 사라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장갑, 얼굴 절반을 덮는 마스크, 겉에는 의사용 가운까지, 완벽한 대(對) 바이러스 복장이 아닌가. 무슨 문제라도? 진심을 담아 눈으로 묻자 데스마스크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진다.
“사람을 무슨 병원균 취급하고 있어?!”
“실제로 바이러스 보균체이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 정도 방비는 해야죠. 아니면 저도 같이 감기에 걸리시길 바라나요?”
걸려도 돼요? 진짜로? 그럼 저 진짜로 감기 걸려서 계속 드러누워 있어요? 성역에 일할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란 시선을 팍팍 보내자 데스마스크가 바로 태도를 바꾼다.
“부디 계속 그러고 있어라.”
심지어 정중해지기까지 했다. 이게 바로 권력! 데스마스크가 들었으면 코웃음 쳤을 생각을 아무렇게나 하며 사라는 어느새 도착한 방문 앞에서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잔뜩 쉬어서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응답한다. 감기가 심하긴 정말 심한가 보다. 사라는 새삼 걱정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데스마스크와 사라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아픈 주제에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벌 받듯 두 손을 들고 있는 카뮤였다.
“……야, 저게 도대체 뭐냐.”
천하의 데스마스크조차 한순간 할 말을 잊을 정도로 괴상한 광경이었다. 그나마 사정을 미리 들어 알고 있던 사라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성역을 시베리아로 만들려고 했다가 벌을 받는 거라던데요.”
출신지는 프랑스지만 수행지와 효가를 사사한 곳이 시베리아였던 터라 카뮤는 생애 대부분을 얼음과 눈의 땅에서 보냈다. 즉, 감기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단 소리다. 덕분에 자신의 병명을 알아채는 것도 늦었고, 알아차렸을 때는 쉽게 패닉에 빠진 모양이다. 성역을 시베리아와 같은 기후로 만들면 감기 바이러스가 활동하지 못해 모두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니. 정말 질 나쁜 건 엉터리 발상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거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이 쓰러진 카뮤를 발견했을 땐 이미 보병궁과 그 주변이 절대영도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사라가 이래서 머리만 좋은 괴짜는 안된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던 건 물론 비밀이다.
대강의 전말을 듣고 데스마스크의 얼굴이 잔뜩 구겨진다. 남자의 심정이 훤했던 터라 사라는 툭툭 어깨를 두드려주며 신호를 보냈다. 무시할까요? 당연하지. 두 사람의 합의는 이제까지 없을 정도로 빨랐다.
재주 좋게 시선을 비낀 데스마스크가 병실을 휙 둘러본다. 어쩐지 작정한 듯 태도가 영 껄렁하다.
“그래서 쓰러진 건 몇 놈이야? 하나, 둘……. 핫! 나랑 알데바란이랑 아프로디테 빼고 전부냐. 아니, 사가도 없는데 벌써 퇴원했나?”
대놓고 이죽거리는 말을 쓰러진 상태에서도 용케 캐치했는지 병자들 사이에서 발끈한 기색이 선명하다. 뭐, 저래봤자 어차피 다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할 거란 걸 알기에 사라는 모른 척했다. 이제 이 바보들 사이를 중재해주기도 지쳤다.
“사가라면 특별실에 있어요.”
“앙? 그렇게 상태가 심각한 거야?”
“상태도 심각하지만 그보다는 눈만 떼면 탈출해서 서류를 처리하려 하기에 감금 차원에서.”
“…….”
덧붙여 깨어있을 때뿐만 아니라 잠들었을―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절했을― 때도 계속 서류가, 세이야들도 멀쩡한데 내가 이러고 있을 수는, 하고 잠꼬대를 한다고 한다. 세이야들이 멀쩡한 건 건강하고 스트레스 없는 생활을 하기 때문이니(감기 따윈 뭔지도 모르는 듯한 최고령자 두 명만 봐도 알 수 있다.) 신경 안 써도 좋을 텐데.
“그리고 샤카도 여기 없어요. 뭐, 샤카는 처녀궁에서 잘 안 나오니까 쓰러졌는지 아닌지 모르겠는 거지만.”
어제까지는 멀쩡했던 것 같으니 괜찮겠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데스마스크를 보고 사라는 슬쩍 덧붙였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은 아니다. 처녀궁에서 모습을 봤던 건 사실이니까. 스쳐 지나가듯 본 거라서 정말로 멀쩡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샤카니까 괜찮을 거다, 분명. 아마도.
그때, 샤카의 이름을 들은 건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므우가 꿈틀했다. 흐릿한 녹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환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강한 눈빛에 사라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이불 위를 토닥였다. 메마른 목소리가 떨어진다.
“반드시, 쓰러져 있어야……. 아니면 저랑 아이오로스가,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할지…….”
“아무리 샤카라도 성역이 이런 상태에서 사고를 칠 것 같진 않은데요.”
열에 몽롱한 상태로 잘도 말한다 싶다. 물론 평소라면 어느 정도 돌려 깠을 걸 집어치우고 직접 까는 걸 보니 아프긴 아픈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은 동룐데 이렇게까지 사이가 나쁘니 오히려 쓴웃음이 난다. 물론 사라는 자신이 성역이 오기 전까지 샤카와 그나마 친한 사람 중 하나가 므우였단 걸 전혀 몰랐다.
처녀궁에 다가가지 말고 만약 지나갈 일이 있으면 꼭 누군가를 데려가란 헛소리 같은 중얼거림에 적당히 대꾸를 하며 사라는 억지로 므우를 재웠다. 다행히 약 때문인지 열 때문인지 므우는 금방 잠이 들었다. 약간이나마 편안해진 호흡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우직하게 계속 벌을 서는 카뮤를 제외하고는 전원 실신 상태다. 위세 좋던 골드 세인트들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아주 조금, 새끼손톱의 반의반만큼 들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어쨌거나 이런 상태라면 자신이 할 일은 없었기에 사라는 조심히 몸을 움직였다. 웬일로 조용히 있던 데스마스크도 나름의 배려를 하는 건지 조그만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래서 이젠 어쩔 건데?”
“돌아가야죠.”
물론 돌아가는 도중에 처녀궁에 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라의 생각을 눈치챈 건지 어쩐 건지, 데스마스크는 건들건들 손을 흔들며 그답게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새삼스럽게 되새겨본다. 처음 이 길을 걸어 올라갔던―과연 그걸 걸어 올라갔다고 표현할 수 있을 때의 얘기지만― 날을. 아무것도 몰랐고, 너무나 느닷없었고, 패닉에 빠져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던 납치극. 이런 일은 죽어도 사양이라며 탈출하게 된다면 다시는 이쪽으론 얼굴도 안 돌리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랬던 게 지금은 이 꼴이다. 제법 익숙하게 계단을 밟고, 의미 없을 정도로 풍경을 익히고, 심지어는 그리 피하던 상대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하는. 세상만사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사라는 다시금 깨달았다.
‘아니, 그렇지만 이건 인도적으로 당연한 일이고.’
속으로 슬쩍 변명을 해본다. 감기가 유행하는 지역에서 지인이 병에 걸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분명 어제도 보긴 했고, 멀쩡한 것 같긴 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몸 상태는 얼마든지 급변할 수 있는 일이고. 다른 사람이라면 금방 생존 신고가 되겠지만 샤카는 한번 사고를 칠 때마다 순위권에 들 정도로 거하게 치면서 안 칠 때는 그 반동인지 또 지나치게 얌전하니까. 라는 어설픈 합리화. 자신이 왜 변명이나 합리화를 하고 있는진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어차피 방으로 돌아가려면 처녀궁을 지나긴 지나야 한다. 어라, 그럼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는 거네. 그래, 어쩔 수 없지. 괜히 합리화를 했잖아. 당연히 그냥 지나가는 거랑 슬쩍 들여다보고 지나가는 거랑은 차이가 있지만 사라는 그건 쌈박하게 무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길을 빌리면서 주인에게 인사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서. 인간은 원래 저 좋을 때만 평소에 무시하던 사실을 꺼내는 법이다.
소소한 회피 사이에 사라는 처녀궁에 다다랐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본다. 해가 기울어짐에 따라 어둑해져 가는 푸름. 곧 노을이 질지도 모르겠다. 한눈팔기는 아주 잠깐. 가벼운 숨과 함께 다리를 더욱 부지런히 움직인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기엔 이제껏 겪은 경험이 아깝다. 긴장 없는 몸이 미끄러진다.
창이 거의 없는 궁은 밖의 날씨에 상관없이 언제나 어슴프레하다. 이따금 쓸쓸한 인상을 받는 건 그 탓이라고 지금 깨닫는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고. 아니, 정말로 그렇다. 저랑 상관없다든가, 어찌 되어도 좋다든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들 상처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있는 힘껏 살아가니까.
‘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다들 매번 개그 비슷한 짓만 해도 슬쩍슬쩍 흘리는 얘기에 과거에 상당한 일이 있었던 것 정도는 눈치챘다. 갈기갈기 찢어지고, 너덜너덜 허물어진 상처. 그 모든 고통, 되돌릴 수 없는 눈물. 자신은 상상조차 못 하는. 그래도 모두 웃는다. 정말로 괜찮은 건지, 그런 척만 하는 건지조차 모르더라도. 가장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사라는 생각해버리고 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그럭저럭 평탄하게 살아와서, 힘들다느니 싫다느니 하는 말을 입에 올려도, 격렬한 증오도 숨 막힐 듯한 슬픔도 모를 정도로 무디게 삶을 보냈으니까. 물론 이게 보통이고 좋은 거지만.
‘샤카는 어떠려나.’
자연스럽게 처녀좌의 세인트를 떠올린다. 그 남자는 왜인지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물론 샤카가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의외로 어린애 같은 면도 많고, 겉보기보다 감정적으로 군다, 고 할까 이성적이지 않다는 건 충분히 안다.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 유치할지도 몰라. 하지만 때때로 보이는 초연한 모습에, 어쩐지 이 사람은 모든 걸 차곡차곡 정리해 자신과 분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혹은 너무 능숙하게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당신의 아픔은 어디에 있나요?
“뭐, 일단.”
걸음을 멈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금빛이 흐드러졌다. 사라는 한숨과 함께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어 실타래를 그러쥔다. 스르르 흘러나가는 감촉이 소름 끼친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설마 했지만 정말이지.
“몸의 아픔은 여기 있는 것 같네요.”
바닥에 쓰러진 샤카가 자신을 맞이할 줄, 사라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앞서 데스마스크에게도 말했지만 샤카는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멀리서 슬쩍 본 게 전부였지만 진짜로 멀쩡했다. 적어도 이렇게 쓰러져 있을 정도로 아파 보이진 않았다. 고백하자면 아플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안 했다. 바이러스도 샤카 얼굴을 보면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뭐라 변명하든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샤카가 갑자기 바닥에 엎드리는 기행을 일으키지도 않을 테니(아무리 신뢰도가 떨어져도 이런 한심한 짓은 벌이지 않을 거라고 사라는 굳게 믿었다. 상대가 미로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가 아픈 건 사실이다. 근데 하루 만에 상태가 너무 나빠진 거 아닙니까. 다들 그러긴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감기 걸리면 안 되겠다. 혼자 납득하며 사라는 남자의 손끝을 두드렸다.
“이렇게 아플 때까지 왜 말을 안 한 거예요.”
무심코 타박하자 샤카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일단 의식은 있는 모양이다. 부스스 머리가 흔들리고 열에 들뜬 얼굴이 나타난다. 참담한 몰골에 사라는 탄식했다. 진짜 좀비가 다 되어가네. 그러거나 말거나 샤카가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떨어지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거칠다.
“……아프지 않다.”
아무래도 일단 우길 모양이다.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어차피 아테나에게 들키면 바로 병실까지 강제송환이니까. 그럼 안 들키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아무리 탈인간 단계에서 뛰어놀고 있다고 한들 성역에서 주인의 눈을 피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다. 게다가.
“이렇게 엎어져서 무슨 소리예요.”
신뢰도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이 상태라면 앞으로 몇 시간 안에 잡혀갈지 내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닥이 시원해서 일부러 이러고 있는 것뿐이다.”
“겨울에요?”
“그리스의 겨울은 따뜻하지.”
그리스의 겨울이 아니라 지중해의 겨울이겠죠. 그리고 확실히 한국에 비하면 따뜻하지만, 상온인 날씨가 계속되지만, 그래봤자 북반구의 겨울이다. 저렇게 시원한 걸 찾을 정도로 더운 것도 아니고, 오히려 비가 자주 와서 체감온도는 상당히 낮을 정도다. 당연히 샤카도 다 알고 있는데 박박 우기는 것뿐이라 사라는 굳이 반박하는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일어나서 침대에 기어들어 가기나 하세요.”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박정하구나.”
아까까진 아프지 않다면서 금방 말을 바꾼다. 하나 제가 생각해도 깡따구가 제법 늘었던지라 사라는 머쓱하게 뒷목만 쓸었다.
“제가 당신을 옮기긴 힘들 테니까요.”
샤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가볍다고는 해도 사람 하나 분의 무게다. 드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신장 차도 있다. 게다가 상대가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진 상태란 걸 따지면 제가 멀쩡히 샤카를 옮길 확률은 제로로 수렴한다. 잘 봐줘야 질질 끌고 가는 정도일까. 매트리스 위로 올리는 건 아예 불가능일 테고.
그래도 어깨를 빌려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사라는 남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의도를 알아챘는지 샤카가 반항 없이 딸려온다. 곧 묵직하게 어깨가 눌린다. 아, 큰일이다. 이 인간 생각보다 무거워.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뜨거워. 그러나 이제 와서 뿌리치는 건 무리다. 그 정도 깡따구는 아직 장착하지 못했다. 그나마 침실 앞에 쓰러져 있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인가.
복잡한 상념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샤카도 보조를 맞췄다. 휘청거리는 감이 있긴 했지만 제법 또렷이 걷는다.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침대까지 남자를 옮길 수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예상보다이지 힘들이지 않고는 아니다. 그러니 이 노동력 꼭 보상해주세요.
깨끗하고 푹신한 시트 위로 가는 몸이 가라앉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딱딱한 바닥보단 침대가 나은 게 당연한지라 샤카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진 느낌이다. 사라는 지그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야트막하게 벌어진 입술, 뜨겁게 새는 숨,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그 아래서 흔들리는 그림자. 익숙하고, 익숙하지 않고. 뱃속이 꾹 조인다. 말이 혀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샤카가 아픈 걸 보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어째서 그렇지?”
혼잣말에 생각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사라는 망설이다 손을 뻗어 샤카의 앞머리를 건드렸다.
“……로봇이 아파하는 걸 보는 느낌이라?”
농담을 섞어 끝은 의문으로 말할 정도로 채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었으나 필히 그가 토라지리라 생각했다. 어린애 같은 면모가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샤카는 웃었다. 웃을 뿐이었다. 그러리라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어쩌면 조금 서글프게.
이상한 사람. 아파서 그런가 왜 이렇게 평소답지 않아. 입속말을 삼키며 이불을 끌어 올려 준다. 만화나 소설이었다면 물수건을 올리고 죽을 만들며 간호라도 해줬겠지만 지식도 경험도 없었기에 관둔다. 무엇보다 바로 의사를 부르는 게 훨씬 빠르고 확실하고. 다만, 당장은 아니라. 아주 잠깐,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닿을 듯 말 듯 한 도닥임을 더한다.
샤카의 기색을 확인한다. 항상 감고 다니는 눈꺼풀은 덕분에 그가 자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게 한다. 뭐, 아무리 아프다 해도 그렇게 빨리 잠들진 않겠지. 그리고 샤카라면 자면서도 자기 얘기 하는 건 다 들을 것 같고. 따라서 사라는 속으로만 조용히 기원했다. 남자의 쾌유를. 손 끝에 미지근한 열이 들러붙었다.
길지 않은 도닥임에 환자의 숨소리가 조금 고르게 변한다. 안온한 정적. 굳게 닫긴 입술은 미동도 없다. 지금은 정말 잠들었다 해도 믿을 수 있다. 휴프노스의 손길은 언제나 가리는 이 없이 찾아온다.
사라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사실 평소대로 행동한다 한들 아무 문제는 없겠지. 홀로 남겨질 예감에 상대가 눈을 떠 손을 붙잡지도, 옆에 있어달라고 구슬피 말하지도 않을 테니까. 현실은 소설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게 샤카이기에. 왜인지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는 제멋대로지만 구속은 하지 않을 거라는. 흐르는 강물 같은 사람이기에. 고요히, 모든 것을 머나먼 바다로 흘려보내는.
……아니, 생각해보니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 남자 처음에 납치한 건 둘째 치고 그 뒤로도 사람 말 안 듣고 억지로 날 제자로 만들려고 했었지. 진짜로 붙잡힌 이유는 돈, 이 아니라 사오리 아가씨 때문이라 까먹고 있었지만.
깊게 파고들어 봤자 딱히 좋을 게 없는지라 사고를 멈춘다. 어쨌건 샤카는 자신을 잡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이 방을 빠져나갈 때까지.
밖으로 나가자마자 사라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별다른 일은 없는데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이다. 하긴, 하루 종일 환자들한테 치였으니 누군들 안 그러겠느냐만은.
문득 인기척을 느낀다. 고개를 드니 지척까지 사오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매우 의기양양한 얼굴로. 사라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짚었다. 이때까지의 답답한 기분은 지금의 예감이었던 걸까. 사라는 알 수 있었다. 우연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이거 전부 계획된 거다. 하여튼 저 어린 사장님은 제일 예측하기 어렵고 담대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주제에 일반인을 가지고 노는 데 프로페셔널이셨으니까.
“의사는 이미 불러뒀어요.”
보라 이 숨김없는 작태를. 샤카의 상태도, 자신이 의사를 부르려고 했던 것도 이미 안다는 걸 당당하게 드러내지 않는가. 그것도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사라는 따지는 대신 그냥 그러려니 납득하기로 했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돈의 힘은(이하생략). 더불어 말하자면 샤카에게 개길 배짱은 생겨도 사오리에게 개길 배짱은 생기지 않았다. 미래에도 영원히.
미약한 침묵. 사오리가 제게 한 번 눈짓을 하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아무래도 같이 걷고 싶은 듯해 사라는 얌전히 뒤를 따랐다. 약간의 틈이 생겼다. 아주 조금, 한 발짝 정도의 차이. 발소리가 자연스레 섞인다. 틈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완전히 처녀궁을 벗어나자 노을이 지고 있었다. 황금과 분홍이 살짝 섞인 붉음. 어느 소년의 눈동자와 닮아 좋아하는 색이다. 사라도, 사오리도. 붉게 물든 계단을 계속해 오른다. 세상이 홍차 속에 잠긴 것 같다.
문득 과거를 떠올린다. 머나먼 날의 일이 아니라 그리 오래지 않은 날의 일을. 미아가 되었던 소년. 자신의 동생과 동일인물이었고 동일인물이 아니었던 아이. 세이야보다는 텐마의 눈동자가 이 하늘을 더욱 닮았기 때문일까. 잊어버리진 않았지만 부러 떠올리지도 않았는데. 이리 자연스럽게, 이리 당연하게. 하긴, 당시의 임팩트가 너무 강했기에 의아해 할만한 일은 아니다. 어지간한 일은 아무래도 좋을 정도의 충격이었으니까. 뭐, 명계에 갔던 거나 고양이가 되었던 것도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지만.
“사라?”
온화한 부름에 정신을 차린다. 어느새 발이 멈춰있었던 모양이다. 사오리의 부드러운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결코 책망이 아닌 의문. 사라는 이끌린 듯 벌려진 거리를 좁혔다. 어깨를 나란히 한다. 시야가 비슷하다. 아, 이건 좀 굴욕인데. 나보다 10살이랑 어린 애랑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니. 하긴 다른 남동생들과 비교하면 머리 반 개에서 한 개는 작긴 하지만.
“그냥 여기 와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구나 싶어서요.”
“그렇군요.”
변명은 아니지만 두루뭉술하게 느껴지는 대답을 하며 기억을 더듬는다. 성역에 온 지 얼마나 되었더라. 아직 일 년도 안 된 건 확실한데 떠오르는 게 빽빽하다. 비슷한 생활만 반복하던 이전과 전혀 다른, 밀도 높은 삶. 어느 게 더 좋으냐고 묻는다면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이전이 더 좋지. 평화롭고 지루한 삶과 위험하고 자극적인 삶 중 하나를 택하라면 전자를 택하는 게 인지상정. 동생들과 돈이 아니었으면 아직까지 자신이 여기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심정도 모르고 되새기듯 사오리가 말을 반복한다. 깊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무심코 사오리를 본다. 시선이 교차한다.
“그래서 사라, 당신은 얼마나 바뀌었나요?”
“……무슨 뜻이죠?”
순간 대답을 망설인 것은 무슨 꿍꿍이를 느껴서가 아니라 질문이 너무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얼마나 바뀌었냐니. 말할 게 너무 많다. 포기와 체념이 늘었다든가, 비정상적인 상황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든가, 성격이 제법 더러워졌다던가. 특히 마지막 게. 이렇게 된 원인은 하나하나 꼽기도 지칠 정도로 많다. 그래도 굳이 꼽아보자면 미로 때문이거나, 전갈좌의 세인트 때문이거나, 8번째 궁의 수호자 때문이다.
다만 사오리가 원하는 건 이런 대답이 아닐 터다. 이걸 어떻게 잘 포장해 말한다. 고민하는 사이 사오리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재개한다. 질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정말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닐 거다. 문답은 계속해 이어졌으니.
“성역은 좋아졌나요?”
사오리가 볼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일단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성역은 자신의 기반이 되는 한국과 문화가 전혀 다르다. 이런 신앙적인 분위기, 익숙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이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것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열렬히 긍정할 정도로 좋아지진 않았으나 나름 적응도 했고 정도 붙였으니 어느 정도는 좋아한다. 동생들이 있으니 헤어질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해 애착도 있고. 아니, 그런데 지금 떠올린 거지만 여기서 적당히 돈 모은 다음에 가까운 데서 집 구해 유유자적 살면서 애들한테 놀러 오라고 하면 헤어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사람들은 좋아졌나요?”
사념을 끊듯 사오리가 질문을 노래한다. 이번엔 좀 더 확실하게 긍정을 표한다. 아직 데면데면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모두에게 미운 정, 고운 정은 다 붙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질문을 받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로.
“샤카는 여전히 싫은가요?”
“……딱히 싫어한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에 므우한테도 말했지만 사라는 딱히 샤카를 싫어하지 않았다. 일단 얼굴이 취향이었으니까. 멋진 외모지상주의 같으니라고.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얼굴을 보자마자 저 얼굴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해버리게 되는 건 정말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원래 삶은 그렇다.
뭐, 납치라든가, 온갖 기행이라든가, 수시로 자신을 놀리는 행태에 처음에는 호감도가 밑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으니 주변에서 저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때 샤카를 피해 다녔던 적도 있고. 지금이야 뻔뻔스레 방에도 쳐들어가곤 하지만.
“그렇다면 좋아하나요?”
“너무 양자택일인데요.”
원하는 답이 너무 빤히 보여 사라는 한숨을 물어 죽였다. 왜 저렇게 단정을 원하는지. 물론 호오(好惡)는 중요한 분류지만 어디든 중간은 있는 법이다.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 중용의 도라고 모르시나요. 참고로 사라는 굳이 따지자면 주자학보다는 도학을 밀고 있긴 하다. 어느 것도 공부는 안 했지만.
그렇지만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이 감정은 호의에 가까우리라. 몇 번이고 말해 지겹지만 얼굴이(이하생략). 아니, 그치만 진짜 예쁘단 말야.
‘하지만.’
그러한 외모가 아니었어도 자신은 샤카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 확인하기 어려운 가정이지만 그래도. 샤카는 이해하기 어렵고, 언제나 뜬금없고, 심히 제멋대로지만 어쩐지. 어째서일까. 처음에는 싫어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당연히 호의를 표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람의 감정은 왜 별다른 계기 없이도 변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몰랐을 뿐이지 쌓인 일상 중에서 조그만 계기라도 있었던 걸까. 차근차근, 자연스럽게.
“사라?”
사오리가 대화의 다음을 재촉한다. 녹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상기된 얼굴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저런 얼굴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기억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학창시절 지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이나 연예인의 얘기를 할 때의 얼굴이다. 특히 자신이 밀고 있는 커플링을 얘기할 때의 소녀의 얼굴.
혹시 사오리 아가씨 샤카랑 날 밀고 있는 건가? 사라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부정했다. 망상에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봐도 샤카나 자신이나 로맨스가 어울리는 타입은 아니다. 차라리 개그가 낫지. 애당초 이 주식은 망한 주식이라고.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답, 모르지 않잖아요.”
상념을 끊어내며 간신히 목소리를 뽑는다. 퉁명스럽게도 들리는. 사오리는 전혀 상관 않고 그렇다며 웃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목덜미가 뜨거워진다. 어떠한 종류든 간에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너무 어렵고 부끄러운 일이다. 처음에 자신들이 어떤 상태였는지 주변이 다 알았다면 더욱.
거기서 끝냈으면 좋았을 걸 보스가 굳이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인다. 얼굴이 붉은 것 같네요. 이번엔 명백한 놀림이다. 사라는 힘겹게 얼굴을 위로 올렸다. 노을에 물들어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혹은 변명이 먹혀들도록.
“열이 조금 오르나 봐요.”
해질녁이 지독하게도 아름다웠던, 어느 날의 일이다.
덤 1.
그리고 사라는 진짜로 열이 올랐다.
“변명이었는데……”
진짜가 되어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였다. 어쩐지 지나치게 뜨끈뜨끈하고 어지러운 느낌이더라니. 푸욱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불쾌해하는 건지 조롱하는 건지 모르겠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녀석은 참 질리지도 않는군. 어떻게 하면 매번 감기에, 매번 쓰러져 나한테 운반되어 오냐?”
카논이다. 평소보다 200% 상향한 이죽거리는 말투가 참으로 일품이다. 순간적으로 울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내용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사라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도 이렇게 내가 약한지 몰랐단 말입니다. 그래도 일단 변명은 해본다.
“사가나 아이오로스나, 다른 골드세인트들도 걸렸을 만큼 지독한 바이러스였으니 불가항력이라 생각합니다만.”
“멀쩡한 녀석들도 많은 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 해계에 있어서 운 좋게 감기 테러를 피한 카논에게 듣고 싶진 않았지만. 아니, 근데 이 인간 생각해보니 예전부터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은근슬쩍 해계에 가 있어서 피해가 없었던 것 같은데? 설마 미리 알고 피한 건 아니겠지?
물증은 없고 심증도 미약했지만 일단 의심의 눈길을 보내보자 카논이 불쾌한 듯 혀를 찬다. 확실히 지금 제 눈빛이 퍽 불손하긴 할 터다. 그래도 환자를 때릴 순 없단 마지막 양심 덕분인지 딱히 폭력은 행사하지 않는다. 억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씌웠을 뿐.
“잠이나 자라.”
그리고 깊은숨. 질려서 돌아가려는 것일까, 생각하는 찰나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다. 삐걱거리는 낡은 의자에 걸터앉는 소리. 뜻밖의 상황에 사라는 이불 속에서 눈만 빼꼼 내밀었다. 방금 들은 소리가 환청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카논이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침대 옆에 앉아있다. 어깨에서 파도와 같은 머리카락이 미끄러진다.
“카논?”
돌아가는 거 아니었나요? 타당한 의문에 터키석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아무래도 좋은 듯 심드렁한, 그러나 목소리는 어찌 생각하면 지독하게 부드러워서.
“파수꾼 역할은 해야 하니까.”
“파수꾼? 갑자기 무슨…….”
“됐으니까 잠이나 자.”
다시 이불이 끌어올려 진다. 완강한 거절은 아니었으나 썩 말하고 싶은 눈치도 아니라 사라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괜히 깐죽거리다 이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이번에야말로 꿀밤형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사라가 카논이 한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건 삼십 분 뒤 감기라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오로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덤 2.
그럭저럭 감기 소동이 일단락되었지만 아직 사라가 입원해 있던 사이, 세이야가 문병을 왔다. 드물게도 혼자서. 맨날 넷이서 세트라도 되듯 우르르 몰려다니더니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다. 본인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귀여운 막내가 자신을 걱정해서 찾아온 거다. 때문에 사라는 반갑게 세이야를 맞이했다.
“하지만 가까이 오지는 마렴. 열 발자국 이상 떨어져. 아니, 그냥 방에 들어오지 마.”
“어째서?!”
당연히 세이야가 불만을 토한다. 하지만 사라에게도 변명할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게 일반적인 감기였다면 사라도 본의 아니게 세이야를 거절할 일은 없었다. 동생이 얼마나 씩씩하고 건강한지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번 감기는 골드 세인트들조차 반항 못하고 픽픽 쓰러지고만 최강의 감기. 그러니 조심할 수밖에 없다. 설령 피눈물을 머금고 동생을 떠나보내는 일이 있더라도.
“제아무리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지만 무작정 믿을 순 없으니까.”
“은근슬쩍 내 욕하고 있지 않아?!”
“애초에 그 말이 진짜였다면 아이오리아가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겠지.”
“그건 그렇지만!”
“알겠으면 누나 말 들어.”
나름 완강한 거절에 세이야의 눈썹이 축 늘어진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다. 작위적이진 않지만 노골적인 공격에 사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추가타.
“그래도 걱정된단 말야! 옮아도 상관없으니까 가까이 가게 해줘!”
브라콤이 심장에 크리티컬 히트를 먹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더불어 세이야가 가까이 와봤자 호전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슬쩍 무시당했다. 여기 있는 건 욕망에 먹혀 동생을 귀여워해 주고 싶을 뿐인 한 마리의 짐승뿐.
“세이야……. 누난 진짜 세이야 때문에 사는 거야.”
“응? 뭔진 모르겠지만 힘내!”
분위기, 혹은 사라의 욕망에 따라 두 사람은 서로를 힘껏 얼싸안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슬쩍 눈물을 적실 정도로 퍽 감동스럽게.
“……나한테는 그런 걱정도 안 한 주제에 말이지.”
불행히도 그런 남매에게 ―사실 처음부터 있었던―카논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안 올렸었다. 일단 살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