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데프텐]상냥한 달 외전2
달을 얻다
이상하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텐마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부드럽게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팍은 부럽다. 잘 단련되어 섬세한 모양의 근육은 동경하고 있다. 의외로 잘 갖추어진 이목구비는 잘생긴 편에 속할 것이다. 맨날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서 알기 어렵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불쾌하다는 티를 팍팍 풍긴다면 더더욱.
그래, 현재 데프테로스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것도 상의를 다 벗어 던진 채로. 당연히 몸매를 과시하고 있는 건 아니다. 텐마도 자세히는 몰랐지만 듣기론 그냥 평상복으로 밖에 나왔다가 사고로 물벼락을 맞아 별수 없이 벗어던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건 별로 책망할 만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동정이라면 잔뜩 하고 있다. 문제는 안쓰러움과 함께 밀려드는 정체 모를 감정이었다.
물론 텐마도 상체로 한정한다면 남자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없지는 않다. 더운 것인지 옷이 방해되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역 내에서는 다들 잘만 벗고 다녔다. 가까이에 있는 도코만 해도 툭하면 상의를 벗어 던지곤 했으니 오히려 익숙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이 옳다. 남자의 맨몸따위 뭐가 대수라고.
대상을 데프테로스로만 한정해도 그렇다. 잘 생각해 보면 어째서인지 카논 섬에서도 데프테로스는 바지만 걸치고 있었다. 즉, 새삼 데프테로스가 벗고 있다고 해서 동요할만한 일은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그런데 왜, 어째서,
이제 와서 만지고 싶다고 생각해버리는 걸까.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수상했는지 데프테로스가 이쪽을 흘끔흘끔 바라본다. 원래라면 벌써 한마디쯤 했겠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이 영 이상하다 보니 참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동자가 어쩐지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양쪽 다일까.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욕망만이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텐마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남자를 불렀다.
“데프테로스!”
“……뭐야.”
겨우 말을 걸자 안심하기라도 했는지 평소보다 누그러진 어조로 데프테로스가 답한다. 저런 얼굴은 드문 일이라 죄책감이 따끔따끔 찔러왔다. 하나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는 법. 텐마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 만져봐도 돼?”
“……뭐?”
데프테로스의 눈동자가 점이 된다. 상당히 얼빠진 얼굴. 이 또한 드문 일이었으나 더 이상 참을 여유가 없었다. 넋이 빠진 데프테로스를 무시하고 텐마는 손을 뻗었다. 제지가 없었기에 닿는 건 손쉬웠다. 아주 작은 면적의 접촉. 손끝에 닿는 감촉이 단단하고, 거칠고, 놀라울 정도로 따뜻하다. 생각보다 기분 좋다. 조금만 더 만지면…….
“핫!”
텐마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데프테로스?”
어째서인지 화를 안 낸다. 머뭇머뭇 살피니 데프테로스는 반쯤 기절상태였다. 화를 안 내는 게 아니라 화를 못 내는 것이다.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살짝 벌어진 입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게 보이는 것 같다. 어, 당황할 만도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까지 생각했을 때 텐마는 제가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했다. 얼굴에 확 열이 오른다. 소리 없는 절규가 깨졌다. 내가 미쳤나!!
결국 텐마는 그대로 도망쳤다.
그리고 왜인지 다음 날 자연스럽게 만나고 있었다.
버릇처럼 데프테로스 가까이로 다가갔던 텐마는 앞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데프테로스도 마찬가지다. 서로 뻘쭘해서 얼굴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는 상태다. 그런데도 앉은 거리는 지극히 가깝다. 자신들의 관계가 기묘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아슬아슬한, 아직은 그것뿐인.
침묵 속에서 우연처럼 얼핏 손끝이 맞닿았다. 별것 아님에도 텐마는 어깨를 떨고 말았다. 스친 부분이 지독히도 따갑다. 안 그래도 수그러들었던 고개가 더더욱 숙여진다. 옆에서 희미하게 데프테로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마치 스스로 긴장을 풀기 위한 것처럼 한없이 무거운.
“……도대체 왜 그랬던 거냐.”
데프테로스의 말은 책망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의문에 가까웠다.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텐마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나도 모른다고.”
성의 없는 대답이나 진심이다. 진짜 왜 그랬던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마가 씌였던 게 틀림없다. 마니골도에게 부탁하면 쫓아내 주려나. 쫓아내 주기 전에 엄청 놀려먹을 것 같긴 한데.
“텐마.”
자기 혐오에 빠져 미처 몰랐다.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체온이 친밀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지척에 데프테로스가 있었다. 닿지는 않겠으나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도 없는 거리. 텐마는 무심코 데프테로스에게서 멀어지려고 몸을 뺐다. 아.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감각이 이상하다. 발을 헛디뎠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넘어진다.
“어이!”
데프테로스가 손을 뻗는다. 도와주려던 것임은 알았다. 그래도 텐마는 아까의 감각을 기억하고 무심코 그 손을 뿌리쳐버렸다. 바보가! 짧은 시간에도 데프테로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떨친 반동으로 더욱 몸이 기울어진다. 얼결에 데프테로스도 함께 엉켰다. 곧 커다란 충격이 닥쳤다.
“아, 아파……!”
절로 비명이 나온다. 온몸이 아팠지만 다른 곳보다 등이 매우 아팠다. 돌바닥에 그대로 떨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통증 때분에 짜증 나는 데 자업자득이라 뭐라 할 수도 없으니 더 짜증이 난다.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참으며 일어나려던 텐마는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이유로.
“……큭.”
이상하다. 왜 가까이에서 데프테로스의 목소리가 들리지. 게다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건 뭘까. 눈을 내리깔자 시야에 푸른색이 펼쳐진다. 제가 평생 볼 리 없으리라 생각했던 남자의 정수리다. 이게 왜? 굳어있는 사이 데프테로스가 몸을 일으킨다. 흐르는 머리카락 사이로 천천히 얼굴이 드러난다. 아. 거짓말처럼 시선이 맞았다. 아슬아슬하게, 실 자락만큼만 움직여도 맞닿을 거리. 텐마는 남자의 눈동자 속에서 별을 발견했다.
“아…….”
숨결이 섭슬렸다.
바닥 위로 머리카락이 펼쳐져 있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눈동자가 들여다보인다. 언제고 좋아했던 눈동자다. 상냥하고, 따스하고, 눈물겹고, 사랑스러운. 기나긴 시간 동안 그리워했던, 그리하여 지금 이리 볼 수 있는 게 거짓말 같은. 그 눈동자가 지금은 잔뜩 젖어있다.
천천히 시선을 옮긴다. 물기 어린 눈가가 붉다. 뺨이 상기되어 있다. 귀도, 목덜미도, 다른 어느 곳이든 붉게 물들지 않은 곳이 없다. 반면 입은 고집스럽게 다물어져 있다. 꾹 깨물어 새하얗게 질렸다. 왜 입을 닫고 있는 거지. 텐마. 조심스럽게 속삭이자 부드러울 것 같은 입술이 야트막하게 벌어진다. 하얀 이가 살짝 보였다. 속살이 붉다.
‘데프테로스…….’
한숨이 달다. 고작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심장이 요동친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소녀의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깜빡깜빡. 찰나에 불과한 인고의 끝, 마침내 눈이 감겼다. 그리고─
“……젠장.”
데프테로스는 잠에서 깼다.
“………….”
이게 뭐냐. 지독한 악몽이다. 어찌 이리 파렴치한. 이제까지의 삶에 있어 스스로를 이리 무도하게 여겼던 적은 없던 것 같다. 한심하기는. 애꿎게도 텐마를 향해 원망 어린 마음이 생겼다. 젠장. 이게 전부 텐마 때문이다. 그 녀석이 느닷없이 그런 말을 하니까, 그런 행동을 하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데프테로스는 알았다.
데프테로스는 이미 텐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원래부터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였다. 이상할 정도로, 그럼에도 의문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당연하게. 그랬던 녀석이 해가 갈수록, 보면 볼수록 그리 애틋해지고, 그리 사랑스러워지고, 그리 간절해지는데 모를 리가. 모른다면 그것이 오히려 죄였다. 데프테로스는 스스로를 속이는 법을 몰랐다. 그저 우직하게 인정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속도 모르고─
만져봐도 돼? 천진한 질문. 무구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저와 같은 애욕은 하나도 없이, 마치 사물을 품평하듯. 단지 어린아이의 잔혹한 호기심이었을 뿐인데.
그럼에도 자신은 반응했다.
닿은 순간 확실하게 욕심이 생겼다. 표정이 바뀌는 걸 보고 싶었다. 목소리가 바뀌는 걸 듣고 싶었다. 감정이 바뀌는 걸 느끼고 싶었다. 이루어질 리 없는 욕망, 바라서는 안 되는 소망. 녀석이 아무리 상냥하다고 한들 허락된 정도라는 게 있을 터인데, 이렇게 꿈에서까지.
‘데프테로스…….’
환상이 속삭인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미치겠군.”
당분간은 녀석의 얼굴도 보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은 왜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인가.
데프테로스는 빤히 텐마를 바라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꿈과 닮았다. 붉어진 얼굴도, 가느다랗게 떨리는 몸도, 달콤할 것만 같은 입술도. 꿈. 꿈. 꿈의 재현. 아, 이게 정몽(正夢)이란 것일까.
숨을 들이켠다. 저편에서 굴러떨어진 가면이 경고를 하듯 둔탁하게 빛났다. 데프테로스는 경고를 무시했다. 텐마의 입술이 벌어진다. 천천히 이름이 뽑아내진다.
“……데프테로스.”
꿈결처럼. 연약하게, 감미롭게. 아님을 알면서도 유혹처럼. 위험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분명─
“빨리 비켜!!!”
“……큭?!”
명치에 주먹이 완벽하게 박혔다. 불시의 고통에 데프테로스는 정신을 차렸다. 맞은 곳이 아픈 정도가 아니라 숨을 쉬기가 괴롭다. 그 상태에선 팔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 정도의 공격이라니, 과연 페가수스의 세인트. 감탄할만한 부분인지는 애매하지만.
이성이 돌아온다. 데프테로스는 제가 텐마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황급히 위에서 비키자 텐마가 느릿느릿 일어나 뒤통수를 문지른다. 아파. 조그만 중얼거림이 들렸다. 아무래도 눈물이 고였던 건 단순히 아팠기 때문인 듯하다.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데프테로스는 자신을 굉장히 한심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애한테 헛된 마음을 가져 그딴 꿈을 꾸더니 이제는 현실에서까지 이런 추태다. 얼굴을 들기가 힘들다.
내뱉은 탄식에 의외롭게도 텐마의 한숨이 겹쳤다.
“어쩌면 좋지…….”
떨리는 목소리가 잔약하면서도 애절했다, 데프테로스는 별수 없이 느릿느릿 고개를 올렸다. 텐마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수치보다는 괴로움으로.
“……뭐가 말이냐.”
고민할 사람은 자신이지 텐마가 아닐 텐데. 이해할 수 없어 묻자 텐마가 이쪽을 바라본다. 소녀의 얼굴엔 괜한 원망이 엿보였다.
“……지금 당신을 엄청 덮치고 싶은 기분이야.”
담백하기까지도 한 말에 데프테로스는 소리 없이 뿜었다. 그건 자신이 할 말……인 게 아니라!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노려보면 텐마가 올곧게 응시해 온다. 이럴 때만 인정사정없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는 하는 걸까, 싶었는데 본인은 의외로 진지한 모양이다. 덕분에 데프테로스는 더더욱 골치가 아파졌다.
“네 녀석,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돼?”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데프테로스는 벌컥 화를 내다가 놀랐다. 어느새 텐마가 코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아까처럼 가까운 얼굴. 주홍색 눈동자가 평소와 다른 오묘한 빛을 흩뿌렸다. 어딘가 위태롭지만 그래도 반짝반짝 눈부신, 매혹적인 광채. 유혹이라도 하는 거냐. 무심코 몸을 기울였다. 오물거리던 입술이 간신히 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걸.”
텐마가 부끄러운지 시선이 빗나간 채로,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선언했다. 무어라 말해야 하는 입술이 무겁다. 머릿속으론 그렇다면 그런 거지 같은 걸은 또 뭐냐며 버릇처럼 딴지를 걸고 있었지만 정작 말이 되어 나오는 건 없었다. 심장이 치받힌다.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다. 왜, 왜 또, 헛된 기대가.
“당신은? 날 좋아해?”
무구하게, 잔혹하게 텐마가 물었다. 데프테로스는 어떻게 답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거짓으로 부정을 하는 것도, 순순히 긍정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떤 것도 자신에게 상처가 되리라. 그래도 만일 허락된다고 한다면─
“나는…….”
길고 긴 망설임 끝에 겨우 제대로 된 언어가 튀어나왔다. 머리가 복잡하다. 어느 정도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무엇을 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깨진 유리 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분명히 입술이 맞닿았다.
따로 올릴 생각은 없었는데 최근 너무 글을 안 써서 결국.....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