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15 재앙은 눈섭에서 떨어진다
느즈막한 오후였다. 벽 한쪽을 온통 차지하는 커다란 창에서 햇빛이 쏟아 든다. 방안이 온통 오렌지 색으로 물들었다. 구름 그림자가 희미하게 스친다. 그 한가운데 사라가 있었다. 살짝 내리깔린 속눈썹 위로 햇살이 부서졌다. 다갈색이 얼핏 황금빛으로 물든다.
세이야는 그런 누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시선을 알아채고 금방 얼굴을 마주해줬겠으나 드물게 일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 반응이 없다. 한 5분쯤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사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 바람직한 자세겠으나 세이야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길 몰라준다고 삐진 건 아닌 데 뭔가 허전하다. 결국 세이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천천히 사라가 고개를 든다. 주변에서 이것만큼은 꼭 저와 닮았다고 말하는 눈동자가 깜빡였다.
“……왜?”
느릿한 대답이 돌아온다. 세이야는 답지 않게 잠깐 우물쭈물했다. 부르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할지는 딱히 생각해두지 않았다. 물론 그냥 부른 것뿐이라 해도 사라가 책망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예의란 게 있다. 평소 세이야가 얼마나 예의를 지켰는가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사라가 빤히 세이야를 바라본다. 재촉하는 것도 다른 무언가를 바라는 것도 아닌, 그저 보기만 할 뿐인, 애정이 서린 눈길. 그랬기에 오히려 재촉당해, 세이야는 아무 질문이나 쏟아냈다.
“누나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사실 세이야는 매우 심심했었다.
뜻밖의 질문에 ─사실은 처음부터 있었던─사가가 서류를 우르르 쏟았다. 사라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썹이 바쁘게 팔랑인다. 얼핏 입가가 일그러진 것도 같았다.
한껏 어색해진 분위기에 세이야는 에헤헤 볼을 긁적였다. 공기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여기 카논이 있었다면 이죽거리기라도 해서 분위기를 풀어줬을 텐데. 알게 모르게 분위기 메이커였구나 그 인간. 다른 사람은 기대하지 않는다. ─세이야도 남 말 할 처지는 못 됐지만─눈치가 없거나 모른 척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기나긴 침묵 끝에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세이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니?”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크게 사례 들린 사가는 신경 쓸 새도 없이 세이야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방년 14세, 한참 연애 얘기에 민감할 나이여서가 아니라 그냥 억울해서. 당연한 얘기지만 이제껏 훈련터와 전장을 굴러왔던 세이야는 그런 새콤달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으로는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라며 사라가 어깨를 으쓱인다. 방금 전까지의 동요는 어디로 갔는지 평소처럼 심하게 침착한 모습이다. 이럴 때는 또 얄밉게 카뮤 못지않을 정도로 쿨하다. 왠지 분해서 세이야는 불을 부풀렸다가 곧 탐색 모드로 전환했다. 할 말이 없어서 내민 질문이지만 이제 와서 호기심이 생겨버린 것이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 없어?”
“없는데. 갑자기 왜?”
얘기하면서 사라가 서류를 정리한다. 일이 끝난 것인지 자신과 얘기한다고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옆에서 보던 사가는 당연하게 후자라고 생각했다─ 마침 잘된 일이다. 세이야는 소파에 깊숙이 앉아 상체만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렇지만 누나 나이도 있잖아. 그런 데 관심 있을 나이 아니야?”
“나이가 있다고 반드시 연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설령 관심있다 해도 나 좋다는 남자도 없을 거고.”
아니, 저 뒤에 있는데요. 차마 속마음은 입 밖으로 못 꺼내고 세이야는 ─역시 처음부터 있었던─샤카를 동정 어린 눈길로 쳐다봤다. 오로지 사라만 알지 못하는 샤카의 짝사랑 사실은 성역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 상대는 너에게 나이 얘기 듣는 것도 이상하다며 호호호 웃고만 있지만.
하나 동정도 잠시, 세이야는 다시 발랄하게 사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녀좌의 세인트에게는 불행하게도 세이야는 누나를 짝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동정보다는 자신의 호기심을 우선시할 수 있는 훌륭한 소년이었다.
“샤카의 얼굴이 취향이라는 건?”
이 정보의 출저는 아이오로스였다. 물론 좋은 의미로 알려준 게 아니라 이러이러하니 혹시나 샤카에게 사라가 넘어갈 기색이 보이면 필사적으로 막으라고 알려준 거다. 잠시 딴 얘기를 하자면 그때 세이야는 사오리의 기품에 버금가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래도 이건 본인이 있는 데서 말하기 어려웠는지 사라가 슬쩍 샤카를 훔쳐봤다. 나오는 대답도 애매하다.
“뭐, 얼굴은 그렇지만…… 성격은 전혀 아닌걸. 성격은 굳이 따지자면 아이오로스……?”
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세이야도 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은 샤카에 성격은 아이오로스라니……. 무심코 머릿속에서 둘을 합쳤던 세이야는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상상했더니 토할 것 같아.”
“……미안. 내가 잘못했어, 세이야. 잊어줘.”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사라의 안색도 창백하다. 저렇게까지 사라의 얼굴이 변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 그만큼 끔찍한 상상이긴 했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남매 뒤에서 당사자 중 한 명인 샤카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남매에겐 전혀 와닿지 않았지만. 참고로 완벽한 제 3자인 사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서류 처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겨우 진정된 뒤, 세이야는 빤히 사라의 얼굴을 살폈다. 둥그런 뺨, 부드러운 눈초리,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원래 자신이 미추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데다 주변에 워낙 여러 가지 의미로 평균 이상인 사람이 많기에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못생긴 편은 아니다. 예쁘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귀엽다는 소리는 충분히 들을만하달까. 성격도 무뚝뚝하거나 엉뚱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상냥하고 배려심 있다. 제 누나라서 편애가 들어간 걸 생각하더라도 꽤 괜찮은 사람인데. 왜 애인이 없는 걸까.
물론 세이야도 진심으로 사라에게 애인이 생겼으면 하고 바라는 건 아니었다. 딱히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면 평생 동생인 자신들과 같이 살아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그편이 좋다. 진짜로 누나에게 애인이 생기면 서운할 거야. 하지만 누나를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샤카인 게 문제다. 샤카가 훌륭한 동료인 건 틀림없지만 매형으로서는 좀. 게다가 누나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으니 더더욱 그렇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괜찮은 사람을 빨리 찾아 샤카를 포기시키는 것이, 라고 세이야가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다고 샤카가 쉽게 포기할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샤카 때문에 먼저 나가떨어질 것 같다. 그나마 샤카의 위명에도 안 꿀릴 녀석들이라면 골드 세인트 뿐인가. 개중 누나랑 특별히 친한 녀석들이 몇 있긴 한데……. 아이오로스랑 므우는 남매나 마찬가지니까 탈락. 아이오리아는 훌륭하지만 마린이 있으니까 탈락. 미로는 나름 친한 것 같지만 누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으니 탈락. 알데바란은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 좋은 사람이라 미안해서 보류. 그 외에 친한 사람이라면─
“누나.”
“응?”
“카논은 애인으로 어때?”
“……나쁘지 않지.”
담백하게 사라가 긍정한다. 세이야도 응, 응,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카논은 나쁘지 않다. 짓궂은 면도 있지만 은근히 정도 깊고, 여차하면 누나를 지켜줄 실력도 있고. 뭐, 그 이전에 카논 쪽에서 거절할 것 같지만. 역시 누나는 우리가 지켜줘야겠네. 여차하면 아이오로스랑 협력해서─
까지 생각했을 때 느닷없이 우두둑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의 근원지는 샤카의 손바닥. 의자의 팔걸이가 가루가 되어있다. 과연 골드 세인트, 파괴의 근본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구나. 그리고 세이야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라? 나 혹시 사고 쳤나?’
그것도 아주 큰 사고였다.
오랜만에 해계에서 돌아온 카논은 성역에 오자마자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으르렁거렸다.
“왜 이렇게 된 건지 당장 설명해!!”
요청이라기보다는 숫제 협박에 가깝다. 남자가 보이는 처참함에 사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대단한 몰골이네요, 카논.”
사라의 말대로 카논의 모습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곱슬거렸지만 항상 예쁘게 흘러내렸던 머리카락이 전부 엉망진창이다. 튼튼한 것만 장점이었던 옷도 지금은 거의 넝마가 되어있다. 카논 본인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온몸 여기저기 그슬렸고 입가는 터져서 피가 철철 흐른다. 뺨에 뚜렷한 맞은 자국은 내일이 되면 시퍼런 멍이 되리라. 무엇보다 저 귀기 어린 얼굴이라니. 속세라면 당장 폭행범으로 신고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뭐, 폭행범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분명 올라오는 도중 누구랑 한 판 붙었겠지. 대강의 상황을 짐작한 사가는 머리를 감싸 쥐었고 사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저 불량 어른 같으니라고. 그리고 카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부 제 탓으로 돌리려고 작정하고 있는 쌍둥이와 (일단은)동생의 행태에 다시 한번 폭발했다.
“─내가 뭔가 한 게 아니야!!”
은근히 절절한 반박에 사가와 사라는 저도 모르게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평소의 카논은 시니컬하면서도 장난기 있고, 때로는 경박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대부분은 꾸며낸 모습에 가까웠다. 실제로는 훨씬 생각이 깊고 직접적이진 않지만 타인을 배려해 줄 수 있으며 정이 깊은 남자인 것이다. 그런 카논이 저렇게까지 열을 내다니. 왠지 맨날 저랬던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라 치자.
일단 앉으라고 손짓을 하자 의외로 순순하게 앉는다. 그 옆에서 사라가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물론 가져오기만 할 뿐이지 치료는 해주지 않는다. 카논도 굳이 맡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라에게 맡기느니 그냥 본인이 하는 게 훨씬 낫다는 건 성역의 대부분이 경험으로 깨친 상태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지?”
사가는 두통을 억누르며 물었다. 많은 뜻이 함축된 질문에 같은 얼굴이 비긋이 웃었다. 화가 났다기엔 지나치게 비틀린 미소.
“샤카, 아이오로스, 므우.”
지나치게 익숙한 이름들에 사가는 사라를 쳐다보았다. 아, 그 녀석들이. 비슷한 심정인지 사라의 얼굴에도 어처구니없음과 의문이 반씩 섞여 있다. 해석하자면 그 녀석들이 또 왜 그러지? 정도일까. 셋이 사고를 치는 게 자신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건 알아도 정확히 왜 그러는지는 모르는 것이다─특히 샤카가─. 성역에서 오로지 사라 혼자만.
그런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인지 카논은 사라에게 화를 내지 않고 볼을 꼬집기만 했다. 모르는 녀석에게 핏대를 세우며 소릴 질러봤자 허탈하기만 할 뿐이란 걸 잘 알고 있는 덕분이다. 그런 것 치고는 볼을 꼬집는 손가락에 힘이 제법 들어간 것 같지만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기에 사가는 모른 척했다. 사실 평소의 말 못 할 울분을 담아 자신 몫까지 좀 해달라는 마음이 있긴 했다.
여하튼 사이좋게 투덕대는 둘은 내버려 두고 사가는 의식을 과거로 돌렸다. 카논이 말한 셋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분명 사라가 원인이다. 바꿔 말하자면 사라라는 원인이 없다면 놀랍게도 애먼 사람을 잡는 일이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최근엔 사라가 뭔가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밀려드는 서류 덕분에 본의 아니게 사라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같은 이유로 절대 경계인물 리스트에 올라가지 않은 사가는 확신했다. 사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서류처리에 정신을 놓는다거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냥 흘려보낸다거나, 반쯤 기절한 채로 손만 움직인다거나 해서 제가 깨닫지 못한 것뿐일 수도 있지만 분명하다. ……아마도.
그때, ─놀랍게도 처음부터 있었던─세이야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앗! 그거 나 때문이구나!”
천진한 외침에 그 자리의 시간이 멈췄다.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거구나!! 며칠 전, 세이야가 갑자기 사라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니 어쨌니 물은 그거! 자신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중간부터 안 들리는 척하긴 했지만 확실히 카논이 애인으로 좋지 않냐는 얘기가 나왔었지. 랄까 애당초 그 자리에 샤카가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사가는 차마 탄식을 삼키지 못하고 내뱉었다. 사라도 알아챘는지 뭔가 깨달았다는 기색을 풍긴다. 카논이 둘의 반응을 알아챈 건 그야말로 광속.
“네 녀석 탓이냐!!”
세이야의 얼굴에 사정없이 아이언 클로가 작렬했다.
“아팟?!!”
바위도 부숴버리는 손이 머리를 조이는 데 당연히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소년의 비명에 지은 죄가 있던 사가는 무심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라가 움직였다. 놀랍게도 골드 세인트보다 잽싸게, 골드 세인트의 손을 떨쳐내며.
“뭐 하는 겁니까.”
결코 크진 않았지만 평소보다 날카롭고 흥분된 목소리였다. 만약 미로였다면 움찔하고 살살 눈치를 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대가 나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논이 사라에게 움츠러들 리가 없다. 그것도 잔뜩 화가 난 상태에서. 당연히 고함이 되돌아간다.
“핫! 그 녀석이 잘못 했다잖아!!”
어떤 의미에선 카논의 의견이 정당했다. 아무튼 카논 역시 삐뚤어진 애정 표현의 피해자였으니까. 느닷없이 머리 위로 유성이 떨어진 꼴이니 한 소리 해주지 않고선 견딜 수 없겠지. 하나 어디까지나 가재는 게 편, 사라는 세이야 편이었다.
“애가 그럴 수도 있지 왜 난리예요.”
“…….”
“…….”
막무가내 필살기에 카논의 말문이 막힌다. 사가의 말문도 막혔다. 더불어 세이야의 말문도 막혔다. 아니, 이건 뭐……. 의미 없는 카논의 중얼거림이 떠다닌다. 모두가 주눅 든 사이 당당한 건 오로지 말한 장본인 하나뿐이다. 정말 이건 아니라 생각했는지 옆에서 세이야가 사라의 팔을 잡았지만 동생 보호에 들어간 브라콤 누나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사가.”
카논이 이쪽을 바라봤다. 바다와 닮은 눈동자가 간절함을 가득 담고 있다. 신호가 분명하다. HELP, 즉 도움.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보여주는 동생의 연약한 모습, 이었으나─ 사가는 잽싸게 카논의 눈길을 무시했다.
‘……미안하다, 카논.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사가(29세, 제미니의 세인트 겸 교황 대리)는 동생을 팔아 쥐뿔도 도움이 안 되는 동료들 사이에 남은 유일한 희망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부터 쥐뿔만큼도 믿지 않았긴 했지만 형의 배반에 카논은 조금 상처 입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사실 사라 때문에 더 상처 입긴 했다. 동생이라면 끔뻑 넘어간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제가 엉망이 되어 왔는데도 저딴 태도라니. 나쁜 것. 그래도 나름 잘해줬는데! 사가의 폭주에서 구해준 적도 있는데!! 아플 때 의무실에 데려다준 적도 있는데!!! 그 외에 다른 걸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은 무시하자. 저것만 해도 충분하니까.
물론 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도 카논은 사라가 꿈쩍하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세이야들만 얽히면 얼마나 지독해지는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때로는 아이오로스나 므우 못지않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여튼 이 빌어먹을 브라콤, 시스콤들 같으니라고.
때문에 카논은 제 취급의 불합리함과 처한 상황의 억울함에 대해 토로하는 대신 사라의 동정에 기댔다. 그 녀석들 좀 어떻게 해줘……. 부탁하면서도 설마 이것까지? 하는 불안이 잠깐 들긴 했다. 하나 다행히도 동정심이 살아 있기는 했는지─혹은 카논이 너무 꼴사나워서 어떻게든 떨쳐버리고 싶었는지─ 사라는 카논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현재, 사라를 사이에 두고 카논 vs 므우+아이오로스+샤카라는 기묘한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참고로 말하자면 세이야(구경꾼)도 있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므우였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다니 예의가 없군요.”
“게다가 사라까지 이용하다니.”
“이렇게까지 한심한 남자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이어서 아이오로스와 샤카의 콤보. 시작부터 삐죽삐죽 날카로운 말들이 사정없이 날아든다. 속내를 숨기려 하지 않는 남자들을 보고 카논은 조금 움츠러들고 말았다. 한심하다고 말하지 마라. 상대가 12궁 중 첫 번째 궁인 백양궁의 수호자 므우와 한때는 사가와 교황 자리를 두고 경쟁하기도 했던 아이오로스와 골드 세인트 중에서도 최강을 다투는 샤카다. 저 셋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시온이나 도코나 아테나 정도뿐일까.
그리고 다 귀찮아 죽겠지만 일단 약속은 했으니 세 사람이 빨리 진정하면 그 뒤에 세이야랑 놀고 싶은 사라도 있었다.
“일단 셋 다 진정해주세요.”
“책 읽기냐?!!”
대놓고 건성인 태도에 카논은 절규했다. 그에 반해 사라는 어디까지나 심드렁한 모습이다.
“말리고는 있으니까 상관없잖아요.”
“……어이어이.”
너무 열이 받으면 오히려 푸시시 식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카논은 처음 알았다. 이 녀석이 진짜.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봐주었지만 당연히 사라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새침해 보이기까지 한다. 제가 무슨 일을 당하든 말든 정말로 상관없다는 모습이다. 미로라면 모를까 내가 이런 취급받을 이유는 없는데. 아니, 그 이전에 이 녀석 왜 이렇게 뻔뻔해졌어. 물론 원인은 자신들의 탓이지만.
이 와중에도 가감 없이 노려보는 녀석들을 무시하며 카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쩐지 형이 포기하면 편하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이래서야……. 그때, 조심스럽게 세이야가 나섰다.
“누나.”
세이야가 사라의 팔을 흔든다. 뒤이어지는 목소리는 너무 작아 골드 세인트인 카논으로서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일단 세이야가 사라를 설득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년 자신이 원인인지라 얼굴에 죄책감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손톱만큼이긴 했지만.
짧은 대화 끝에 사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뭔가 결심을 한 것처럼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앞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결연하다. 야트막하게 입술이 벌어진다.
“일단 셋 다 진정해주세요.”
“아까랑 달라진 게 없잖아!!!!!!”
아니, 달라진 게 있긴 했다. 시선이 아주 조금 똑발라졌다든가,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아졌다든가, 말에 아주 조금 억양이 실렸다든가. 그래 봤자 여전히 책 읽는 것 같긴 했지만.
계속 치근덕거리는 카논이 귀찮았는지 사라가 살폿 콧잔등을 찌푸린다. 거기에 반응한 건 카논이 아니라 므우, 아이오로스, 샤카 세 사람이었다. 흘끗흘끗 눈치를 보는 게 참 꼴사납다고 해야 할지,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결국 카논은 생각하는 걸 포기해 버렸다. 일만 해결 되면 상관없겠지.
그렇게 이어진 침묵 끝에 결국, 별수 없다는 듯 사라가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일단 왜 카논에게 화를 내는지부터 좀 설명해 주세요.”
“그래. 그건 나도 궁금한데.”
생각해 보면 세이야가 원인이라는 것만 알지 자세한 내용은 자신도 모른다. 원인은 세이야라지만 분명 한몫 거들었을 사라도 모른다.
타당한 질문에 이 사건에 있어서만큼은 제악(諸惡)의 원인인 세이야는 침묵했다. 대신 아이오로스가 열변을 토했다. 영 딴소리 같았지만.
“너에겐 사라를 맡길 수 없어!!!”
“느닷없이 무슨 헛소리냐고!!! 애초에 이딴 녀석은 내 쪽에서 거절이다!!”
“뭣?! 사라에게 무슨 부족한 점이 있다고!!!”
“넌 이 녀석을 시집 보내고 싶은 거야, 아닌 거야?! 한 가지만 해!!!!”
이 미친 자가!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절망이다. 왜 이 빌어먹을 의남매는 피도 이어져 있지도 않은 주제에 동생만 관련되면 똑같은 행보를 걷는 걸까. 사라는 그나마 세이야와 피라도 이어져 있다지만 아이오로스는 전혀 아닌데. 제발 아이오리아한테나 그렇게 좀 신경을 써봐라 시스콘아!!! 라는 생각과는 별개로 비상한 머리는 이미 동문서답에 대한 해독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사라 이 녀석, 내가 애인이라도 좋다는 말 따윈 했나 보군.’
정답이다. 더불어 카논은 아이오로스들처럼 시스콘인 것도 아니었고, 샤카처럼 흑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더불에 사라의 엉뚱함에 제일 익숙한 남자이기도 했기에 다른 셋보다 더욱 정확한 사실을 알았다.
‘어차피 되는대로 말했겠지.’
생각을 뒷받침하듯 사라가 단호하게 반박했다.
“저도 저 싫다는 남자에게 매달릴 생각은 없는데요.”
썩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었으나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그럭저럭 납득한 것 같았다. 이제야 끝이다싶어 카논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끝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하지만 누나. 카논이 애인이라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잖아?”
저 눈치 없는 페가수스가! 순진한 표정으로, 무구한 말투로 끼어든 세이야를 보고 카논은 속으로 소년을 열심히 씹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모자라 일을 더 키우기까지 하다니. 덕분에 간신히 진정될 듯했던 셋의 기세가 다시 심상치 않아진다. 나름대로 소년을 귀여워해 주고 있었던 터라 배신감이 더 컸다. 진짜 아테나와 사가와 사라의 가호 때문에 제대로 혼내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다.
일단 뒷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한 대 때려주고 볼까? 하고 고민하고 있자니 사라가 쓱쓱 세이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가볍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눈물 날 정도로 다정하다.
“그건 ‘굳이’ 카논이 애인이어야만 한다면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나쁘지 않다고 말한 거야.”
이왕이면 말하는 내용도 좀 다정했다면 좋았으려만. ‘굳이’를 강조하는 저의가 궁금하다. 하나 사라의 말은 제 본심과 같았으므로 카논은 타박하는 것을 관두었다. 세이야도 미련이 남는 얼굴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납득한 것 같다. 므우와 샤카도 반신반의하는 느낌이지만 괜히 카논에게 살기를 보내는 것을 멈췄다. 이건 납득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사라에게 혼나기 싫어서인 것 같지만.
“무엇보다 카논은 사촌 오빠 같으니까.”
“……거 참, 애매한 관계군.”
떨떠름하게 답하자 사라가 그런가요?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논은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여기서 오빠라는 소리에 자기 혼자 쌍심지를 켜는 아이오로스는 무시하도록 하자. 참고로 말하자면 아이오로스는 이전에 카논이 혼자 오빠라고 불린 데에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어설프지만 어떻게든 상황이 마무리되었을 때, 느닷없이 사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갑작스럽지만 질문 하나 해도 괜찮습니까?”
뭐냐, 이 기시감. 왠지 깊은 빡침이 도래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본능에 따라 카논은 안된다고 필사적으로 외치려 했다. 허나 사라는 꼭 이럴 때만 쓸데없이 빨랐다.
“매번 생각하던 건데 샤카는 도대체 왜 끼어드는 건가요.”
“………….”
“………….”
“………….”
“………….”
“………….”
아이오로스와 므우와 카논과 세이야는 말없이 샤카의 등을 두드리며 남자를 위로했다.
덤 1.
“그런데 샤카.”
“음?”
“저번에 아이오리아 때에는 가만히 있더니 왜 나 때는 그렇게 난리였던 건데?”
물으면서 카논은 상당히 띠꺼운 눈으로 샤카를 쳐다보았다. 이전 ─오해였지만─아이오리아와 사라가 사귄다고 소문이 났을 때 샤카의 태도를 알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카논은 해계에 있었기에 정확한 사정은 몰랐지만 전해 들은 게 있다. 특히 샤카가 놀라울 정도로 얌전하게(혹은 침울하게) 있었다는 사실은 워낙 충격이었기에 다들 뒤에서─사실은 대놓고─ 수군거리기도 했고. 그런데 나한테는 이렇게 대하다니, 지금 차별하냐?
험악한 카논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샤카가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럴 때만 천진하고 순진무구하게, 정말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태도로.
“하지만 너와 아이오리아는 다르지 않은가.”
“………….”
무엇이 다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니, 뭐.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역의 온갖 핍박과 따돌림 속에서도 아테나에 대한 충성을 보여준 아이오리아와 한때 포세이돈 편에 붙었던─그것도 정말로 포세이돈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속이고 이용하려고 했던─ 자신이 같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러니 이해한다, 이해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머리로만.
가슴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훗. 그렇단 말이지”
이리하여 므우와 아이오로스가 빠진 제2차 성역 대전이 시작되었다.
덤 2.
새삼스럽지만 세이야는 호기심이 강한 성격이다. 거기다 직설적이고 조금 눈치가 없기도 했다. 그게 별로 나쁘단 소리는 아니다. 너무 심각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놀랍게도 세이야의 당돌한 행동은 개개인이 가진 선을 넘지 않았으며 때로는 오히려 복잡한 상황의 돌파구가 되기도 했으니까. 관점을 달리 보자면 반대로 이런 성격 때문에 주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소리다. 대표적인 예로 사라가 그렇다. 사라가 많은 동생들 중에서 유독 세이야와 슌을 귀여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소년들의 천진난만한 성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이런 성격이 소수의 몇몇에게는 커다란 두통을 안겨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누나! 애인으로 캬뮤는 어때?”
며칠 전의 재현에 사가는 기겁하며 소년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샤카와는 다른 의미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인 세이야다. 고작 사가의 제지 따위가 먹힐 리 없다. 오히려 응? 응? 눈을 빛내며 대답을 종용하고 있다.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동생의 눈동자를 보고 사라는 얌전히 속눈썹을 깜빡였다. 반성을 하지 않는 태도는 크게 혼나야 할 것이지만 브라콘인 사라에게 세이야를 타박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나쁘지 않지.”
“그럼 슈라는?”
“나쁘지 않아.”
“사가는?” (여기서 사가는 완벽히 절망했다)
“나쁘지 않고.”
반복되는 대답에 세이야가 볼을 부풀렸다. 통통한 뺨에 불만이 가득하다.
“왜 다들 괜찮은 거냐고.”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까.”
“그야 그렇지만…….”
재미없다며 세이야가 투덜댄다. 사라는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어차피 자신도 세이야도 대화에 진심이라곤 한 조각도 넣지 않았다. 결국은 그저 잡담, 의미 없는 얘기.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세이야도 금방 투덜거림을 멈추었다. 던져지는 질문이 건정건정하다.
“그럼 미로는?”
“아, 그건 절대 싫어.”
뚝 세이야가 움직임을 멈춘다.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가 깜빡임도 없이 사라를 바라본다.
“……미로가 또 뭔가 했어?”
“글쎄.”
사라는 어깨만 으쓱였다.
그로부터 30분 후, 천갈궁에서 프리징 코핀에 갇힌 미로가 발견되었단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오랜만의 에피입니다. .....저 카논 사랑해요. 미로도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