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데프텐]상냥한 달 외전
달을 찾다
콜로세움으로 들어서던 텐마는 익숙한 푸른빛을 발견했다. 황금색이 무척 잘 어울리는 푸르름. 한없이 시리게도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상냥한 색이다. 뭐, 얼굴은 상냥함이랑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주변에 둥글게 빈 공간이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들 무서워서 피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변함없네.’
텐마는 무심코 웃어버렸다. 웃긴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다. 본인이 알면 욕설을 내뱉겠지만 데프테로스가 곤란해하는 걸 보는 게 조금 즐거운 것도 있긴 있다.
문득 데프테로스가 몸을 돌렸다. 살짝 보이던 옆얼굴이 사라진다. 완전한 뒷모습. 이쪽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그대로 멀어진다. 왜인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뒷모습. 아, 그때처럼─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텐마는 몸을 옹송그렸다. 뇌 속이 뒤죽박죽된다. 본적 없는 기억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카논 섬에서의 스승, 첫 만남 때 무섭게 웃던 얼굴. 성역에서의 데프테로스, 곤란한 듯 그러면서도 상냥하게 미소짓던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타까움과 미련을 가득 담은 얼굴.
“……무슨 일이냐.”
갑자기 커다란 그늘이 졌다. 고개를 들자 데프테로스가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역광에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텐마?”
몸이 살짝 기울어졌다. 데프테로스의 얼굴이 드러난다. 잘 표가 나지 않아도 분명히 걱정하고 있는 눈동자. 그래, 당신은 언제나 이랬다. 아닌 것 같아도 항상 자신을 잘 살피고 자신을 염려해주었다.
덴마는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일어났다. 데프테로스가 부축을 해준다. 잡힌 팔에 끈적거리는 온기가 남았다. 혼란이 겨우 진정됐다. 그 순간, 텐마는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매하게나마 이해했다.
그래서 텐마는 한 번 숨을 들이켜고,
“……나쁜 자식!!!!!”
있는 힘껏 데프테로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여─ 성대하게 얻어맞았다며?”
데프테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놀려먹는 남자, 마니골도를 노려보았다. 사람 하나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시선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지 마니골도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다. 오히려 변죽 좋게 어깨동무까지 해온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마니골도의 목소리에는 어떻게든 놀려먹으려는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현재 불만이 머리끝까지 차 있는 데프테로스는 불행히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분노에 눈이 멀었다.
“……그걸 알면 억울하지나 않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충격에 따라 술병이 넘어진다. 그를 보고 주변에서 화났구나, 라든지 술은 아껴야지, 라든지 떠들어대며 깔깔 웃는다.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사실 지금 데프테로스가 있는 곳은 위로 명목으로 열린 술자리다. 주최자는 마니골도. 참석자는 레굴루스, 시지포스, 아스프로스, 알바피카, 아스미타를 제외한 골드 세인트 전원. 참고로 술에 익숙하지 않은 데프테로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전부 취해있다. 그 증거로 데프테로스가 화를 토해낼 때마다 다들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엘시드는 변함없이 묵묵하게 술만 마시고 있지만.
“뭔진 모르겠지만 잘못했다면 빨리 사과하는 게 좋아.”
취한 주제에 짐짓 멀쩡한 척 충고를 던진 건 데젤이다. 데프테로스는 그런 친우까지 노려보았다.
말이야 옳긴 하다. 데프테로스도 자신이 잘못한 게 있으면 빨리 사과하고 싶다고 바라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텐마가 아닌가. 사소한 일 때문에 소녀와 사이가 틀어지는 건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 말이지! 솔직히 말해 자신은 피해자가 아닌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얻어맞았단 말이다! 쪼그려 앉아있기에 어디가 아픈가 싶어 말을 걸었을 뿐인데! 기껏 걱정해줬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데프테로스는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어느 정도 취해 있었기에 제어가 도무지 듣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데프테로스는 술에 별로 익숙하지 않았다. 주량이 적은 게 아니라 자신의 주량이 얼마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 결과, 데프테로스는 난생처음으로 필름이 끊긴다는 경험을 했다.
“……젠장.”
각성은 지독한 두통과 함께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머리가 띵띵 울린다. 더불어 속도 쓰렸다. 완전히 아픈 게 아니라 계속 신경에 거슬리는 느낌으로 쿡쿡. 숙취란 게 이렇게 지독할 줄이야.
벽을 짚고 일어서자 그제야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자들이 보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건 양반이고 개중에는 도대체 저게 어쩌다 저리 된 거지 싶을 정도로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쓰러진 녀석도 있다. 다들 저와 비슷한 상태인지 여기저기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야말로 지옥도다. 아니, 실제 지옥인 명계의 코큐토스도 이렇게까지 지독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일단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물을 마시러 주방에 들어갔다. 여기는 거해궁이지만 주인이 저 모양 저 꼴이므로 양해는 나중에 구하기로 했다. 겨우 물을 찾아 한 모금 마셨을 때, 밖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다들 어떤 꼴을 하고 있나 보러 시지포스라도 온 건가. 하지만 들려온 건 생각도 못 했던 소녀의 목소리였다.
“도코, 여기 있어?”
숨이 멈춘 건 일순. 정신을 차렸을 때, 데프테로스는 광속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차마 처참한 주검을 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가면에 얼굴이 가려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어제처럼 화내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자신이 없기 때문인가, 그저 평정을 가장하는 것뿐인가.
“우와, 이거 지독하…….”
자신을 발견하고 텐마가 말을 멈춘다. 답답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텐마. 말을 걸기도 전에 텐마가 몸을 돌려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꼬리를 끌며 사라진다. 잠깐 멍하니 있던 데프테로스도 그 뒤를 쫓았다. 발밑에서 밟힌 자들의 신음이 울렸지만 무시한다. 그딴 건 지금 아무래도 좋다.
거해궁에서 쌍아궁으로 이어지는 계단 중간, 그즈음에서 간신히 소녀를 따라잡았다. 억지로 팔을 붙잡자 텐마가 틈도 없이 발을 날렸다. 피했다가는 그대로 텐마를 놓칠 판이라 데프테로스는 얌전히 공격을 받았다. 솔직히 엄청 아팠다.
“이거 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텐마가 반항한다. 힘껏 얻어맞으면서도 데프테로스는 어떻게든 텐마를 놓지 않았다. 틈을 봐 강하게 어깨를 누르자 겨우 버둥거림이 가라앉았다. 어느새 가면이 벗겨져 소녀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텐마의 얼굴을 보고 데프테로스는 숨을 멈췄다. 주홍색 눈동자가 잔뜩 젖어있다. 일그러진 뺨이 괴롭게 보인다. 숨이 턱 막혔다. 자연스럽게 말을 잃는다.
“왜…….”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인가. 왜 그렇게 자신을 피하는 것인가. 왜, 왜 그렇게 슬퍼하는 것인가. 어디를 찾아봐도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텐마가 손을 떨쳐냈다. 가벼운 몸짓이었으나 이전보다 너무 강한 의지라 데프테로스는 멍하니 손을 놓아버렸다. 예상외로 텐마는 도망치지 않았다.
빛무리가 가득한 눈동자가 데프테로스를 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던 시선이 이제는 자신을 격렬하게 질책하고 있다. 그 사실이 괴로웠다. 절규처럼 텐마의 입술에서 원망이 토해진다.
“왜 내 기억을 지웠어?!”
“……그건!”
어떻게를 생각하기보다 먼저, 데프테로스는 이해했다. 텐마가 보인 반응의 이유를. 또한, 스스로 잊고 있던 자신의 잘못을.
“그게 너에게도 좋을 거라 말했을 텐데.”
변명이 통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데프테로스는 굳이 변명을 했다. 그것 외에는 말할 것이 없었다. 제가 더 깜짝 놀랄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였다. 정말 진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걸 자기 멋대로 정하지 마!!”
텐마가 격렬하게 반발했다. 예상대로였으나 도리어 데프테로스는 울컥하고 말았다. 확실히 자신은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있었단 말인가. 기억에 멋대로 손을 댄 것이 잘못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데프테로스는 그 날이 온다면 몇 번이고 같은 짓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텐마의 이유는 이미 데프테로스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왜, 어째서…… 나는 당신이 힘들 때 아무것도 못 하고…….”
아, 젠장. 너는 도대체 어디까지. 모든 분노가 울먹임 하나에 사라진다. 겨우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래도 너를 걱정해서, 네가 더는 나 때문에 다치지 않길 바라서, 나 때문에 모두가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길 바라서, 그래서 그랬는데. 전부 너와 다른 모두를 위해서였는데.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한단 소리냐.”
알고 있다. 전부 변명이었다. 모두를 위해서란 마음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래도 전부 변명이었다.
사실은 무서웠던 것뿐이다. 정말로 텐마가 아스프로스처럼 된다면, 어딘가 망가지고, 상처 입고, 뒤틀려서, 그 끝에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면. 그게 무서웠다. 그때 받게 될 눈빛이 무서웠다. 그녀가 아스프로스처럼 되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친 것뿐이다. 싸우는 길을 버리고, 텐마가 자신을 놓아버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놓아버리자고.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본질은 결국 그런 것이었다.
그만큼 네가 소중했다.
데프테로스는 어느새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손이 뺨을 감싼다. 시야가 번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심을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는데, 텐마는 마치 전부 알아들은 것처럼 말했다. 손가락 끝이 눈가를 훔치고 지나가자 아주 잠깐 시야가 명료해졌다. 소녀가 희미하고, 애달프게 웃었다.
“나도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달콤한 거짓말이다. 그만큼 더 한없이 믿고 싶어지는.
“당신도 나를 포기하지 말아줘…….”
그래서 데프테로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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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진짜 끝! ......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올리기로 한 분량까지는 전부 끝이네요^ㅂ^<
끝까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