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데프텐]상냥한 달 (完)
※여체화 주의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신기하다. 몸은 삐걱거리고 아픈데 기분만은 지나치게 상쾌했다. 이제 더는 고통을 안고 갈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서일지도 모른다.
가느다란 숨과 함께 진심을 내뱉었다. 눈이 마주친다. 아직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눈동자.
“이렇게 되어서야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 어렸을 때 이후로 차분하게.”
형의 얼굴을 보았다. 그립고, 사랑스럽고, 존경했던, 때로는 증오하지 않을 수 없던 얼굴을. 놀란 듯한 표정이 우습다. 저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봤던 건 언제일까.
“이걸로 됐어. 내 일격은 확실하게 네 중심을 꿰뚫었으니까.”
바람은 이루어졌다.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 최소한의 속죄, 그리고 자신에게 있어 최대한의 이기심. 이제 더는 바랄 것이 없다.
─아니, 아니다.
최후의 의식을 저편으로 돌린다. 멀리서도 선명히 느껴지는 존재가 있다. 손을 뻗으면 따뜻한 별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아 마음만을 던졌다.
‘너는…….’
유일한 미련인 너는,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말할까.’
여전하다며 어처구니없어할까, 미련하다고 비웃을까, 엉뚱한 짓 하지 말라며 화를 낼까, 아직도, 아직도 달과 같다고 말해줄까. ……조금쯤은 울어주는 걸까.
아아, 그래도.
‘정말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시야가 점멸했다.
빛이 쏟아졌다. 하얀 구조물이 시야 안쪽에 가득했다.
“아, 일어났어?”
반가운 얼굴이 불쑥 뛰어든다. 깜짝 놀란 입술이 멋대로 이름을 그렸다. 제 목소리가 낯설다.
“……텐마?”
“응!”
어안이 벙벙한 데프테로스와 대조적으로 텐마는 과도하게 태평한 모습이었다. 각자 성격을 고려하더라도 이 낙차는 심하다. 어찌 된 일인지. 아직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텐마가 조금 비켜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무심코 중얼거리자 바로 활발한 답이 돌아온다.
“아, 사샤가 힘 좀 썼어!”
“……뭐?”
무슨 얘기인지는 전혀 몰랐지만.
어찌어찌 텐마가 하는 얘기를 종합해 보면 하데스와의 싸움에서 이긴 아테나가 협상─혹은 협박이라고도 한다─을 통해 성전에 말려든 자들의 목숨을 전부 되살린 것 같다. 아무리 여신이라지만 잘도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러 주었다.
“다른 녀석들은…….”
상황을 파악하자 떠오르는 얼굴들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던 데프테로스는 이걸 제가 물어도 되는 건가 싶어 어설프게 말끝을 흐렸다. 그 반응에 텐마가 이상하다는 듯 잠깐 고개를 갸웃거린다.
“제미니라면 먼저 깨어나서 사샤랑 교황과 얘기 중이야.”
그러면서도 대답은 어디까지나 발랄하다. 아무것도 모를 텐마가 왜 굳이 아스프로스만 콕 집어 얘기하는지는 나름대로 짐작이 갔다. 로스트 캔버스에서 아스프로스와 대화하며 대충 자신들의 사이를 알아챘던 거겠지.
알고 싶었던 것은 대충 알았기에 자리에서 일어서자 텐마가 졸졸 따라온다. 뭐냐. 부러 짜증 난다는 시선을 꾸며 보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데프테로스는 크게 혀를 찼다.
“……귀찮게 들러붙지 마라.”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마, 스승.”
넉살이 좋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이 녀석은 원래 이랬다. 카논 섬에서 보였던 행동이 오히려 의외였던 것이다. 텐마가 고집을 부리면 어찌할 수 없다는 건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데프테로스는 어쩔 수 없이 일단 포기했다.
나와서 보니 자신이 있던 곳은 교황의 거처였던 모양이다. 데프테로스는 어디가 목적이라고 할 것 없이 걸었다. 텐마는 어디까지고 끈질기게 따라올 기세였다. 적당한 곳에서 떼어놓아야 할 텐데. 천칭궁이라면 스승인 도코가 있을 테니 그쪽에 맡기면 되려나.
중간중간 텐마가 말을 걸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 녀석이 무슨 목적으로 친한 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들이라면 이 반응 정도가 알맞을 것이다. 계속 묵묵부답을 고사하자 결국 텐마도 대화를 포기한 듯 조용해진다. 조그맣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게 다다. 어울리지 않는 발소리만이 울렸다.
어찌 된 일인지 사람이 없는 궁들을 지나면 얼마 안 가 천칭궁이 보였다. 페가수스. 여기서 그만 헤어지자고 할 요량으로 데프테로스는 예고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게 실수였다. 놀란 텐마가 발을 헛디뎠다. 그대로 중심도 잡지 못하고 쓰러진다. 꼬리 없는 비명이 깨진다. 데프테로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받아들었다가 코끝으로 밀려드는 심한 약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너, 상처가…….”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데스와 싸웠는데 몸이 성할 리가 없다. 사지가 멀쩡히 달려있는 걸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터다.
여지껏 눈치채지 못한게 이상할 정도로 소녀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다. 밖으로 드러난 부분도, 벌어진 옷자락 안으로 보이는 부분도, 전부 붕대가 매여져 있다. 바보 같긴. 가만히 안 있고 이런 몸으로 왜 자신을 따라오는 건지. 무심코 질책하던 데프테로스는 놀라고 말았다. 어쩐지 텐마가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당신은 달 같아.”
맥락도 없이 속삭여진 건 언젠가의 말. 지독한 반복. 마치 주박처럼.
“……내가 그리되길 바라는 것인가?”
어쩐지 탓하는 것처럼 말이 나왔다. 텐마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데프테로스는 소녀가 처음부터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엥? 아니. 이건 비유랄까, 이미 그렇다는 소리인데.”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어진다. 낮과 밤 사이의 하늘을 닮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상냥하고 아름다운 색. 느닷없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흉성으로 살아가는 게 힘들어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아스프로스가 억지로 살렸다.
그렇다면 형의 그림자로서 살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과오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 형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했다. 단순한 자기만족이었지만 어차피 이전의 자신 또한 이기심에 가까웠으니 상관없다. 하지만 그랬던 목숨조차 여신이 제멋대로 살렸다.
전부 오답뿐인 삶. 자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이 있긴 있는가. 하지만,
“왜 달은 상냥하잖아. 태양처럼 눈부시지 않더라도 밤에도 안심하고 걸어갈 수 있게 빛을 비춰주니까.”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목이 막혔다. 감정을 추스르기가 벅차다. 아, 아아. 속울음이 터졌다. 가슴이 먹먹해 숨쉬기조차 어렵다. 손끝까지 떨렸다. 지금 제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하나 자신에게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텐마가 입귀를 늘이며 자상함을 더했다.
“그처럼 당신이 상냥하단 말이지 무엇이 되란 소리가 아니야. 당신은 그저 당신으로 충분한걸.”
미소가 눈부시다. 더는 버티는 게 어리석었다. 데프테로스는 헛된 저항을 버리고 조그만 몸을 끌어안았다. 놀란 반항조차 잠재우려 강하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웃음과 함께 등 위로 따뜻한 손이 얹혔다. 조금씩 온기가 퍼져나간다. 겨우 숨통이 트였다.
그래도 네가 웃으니까 자신을 조금이라도 되찾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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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것 같은 건 착각이 아닙니다....(◐_◐
어쨌든 이걸로!갑자기! 끝! 사실 외전이 한 편 남았지만요! 그쪽을 에필로그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욕망을 풀어내서 만족해요..(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