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증발
예전에 제가 쓴 글을 보고 있는데 도대체 언제 썼는지 기억도 안 나는 글들이 남아 있길래...◐◐ 딱히 올릴 것도 없어서 올립니다< 전부 사가세이입니다
당당하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을 원했다.
열 셋, 어린애 취급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동시에 스스로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나이. 하지만 어른 같은 건 될 수 없는 나이. 불합리한 이론에 시달리는 나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나이. 제아무리 우겨봐야 내심 자신이 어린애라는 걸 깨닫고 있는 나이. 현재, 그런 어린애와 어른의 경계선상에 들어서게 된 세이야는 매우 고민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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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쓰려고 했는지 전혀 기억 안 나는 한 단락. 아마 진단메이커 보고 쓴 글
사가는 한밤중의 성역을 걷고 있었다.
공기 중을 떠도는 밤의 향기가 폐속에 기분 좋게 스며든다. 청량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달콤한 향이 지친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킨다. 정적 속에서 대지를 밟는 소리만이 사가의 귓가에 울렸다. 때때로 그 소리가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리듬을 새긴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사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애당초 이런 시간에 이런 장소를 걷고 있다는 건 평소의 자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는 건 불린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에, 라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굳이 말로 옮기자면 아마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에. 이런 상태이니 도착한 곳에 마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사가가 도착한 곳에 있었던 건 마물이 아니라 그도 잘 알고 있던 소년이었다. 세이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이름이 밤공기 안에 퍼진다. 희미해진 그 목소리는 소년의 귀까지 닿지 않았다.
세이야는 주변에 널려있는 바위 중 하나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었다. 미동도 없이, 호흡조차 하지 않는 듯. 조용히 숨을 죽이며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모습에 사가는 눈을 가늘였다.
평소 사가가 생각하는 세이야는 태양이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활기차고 그 자체로 빛나는, 너무 눈이 부셔서 이따금 가슴이 아플 정도로 깨끗한 소년. 하지만 지금은 밤이기 때문인지 너무 덧없고, 소년이 그대로 녹아 흩어져버릴 듯 보였다.
“세이야.”
그런 소년을 붙잡기 위해서인지 사가는 무심코 세이야를 불렀다. 적막이 가볍게 깨진다.
한심한 목소리에 세이야가 이쪽을 돌아봤다. 처음에는 조금 놀란 듯 보였던 소년이 이내 표정을 바꾸어, 평소와 다름없이 꽃이 피는 듯한 환한 웃음을 보이다. 그제야 안심이 된 사가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세이야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시간에 무얼 하고 있지?”
“음, 잠이 안와서 그냥. 그러는 사가야말로 이런 시간에 무슨 일로?”
세이야의 물음에 사가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소년의 갈색 눈동자가 조금 불만스러운 빛을 띈다. 하지만 세이야는 이내 아무래도 좋은 듯 가벼운 한숨으로 불만을 털어버리고 사가가 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세이야는 언제나 이랬다. 언제나 관대하게, 마음에 앙금을 담아두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용서해버린다. 그 사실이 사가의 심장을 부드럽게 조였다.
희미하게 정적이 깔렸다. 세이야는 무슨 이유에선지 밤하늘을 바라보는 행위에 푹 빠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가는 것이 좋을 터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가는 어째서인지 이 장소를 떠나기가 싫었다. 무거운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건 필시 피로 때문이 아니다.
“……달이 아름답네.”
문득 한숨과 같은 중얼거림을 세이야가 흘린다. 그 말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사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다. 검푸른 하늘에 떠있는 금색의 천체는 잔뜩 일그러진 모양으로 즉 그믐달이다. 아름답다면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세이야는 평소에 그런 감상적인 말을 할 성격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사가는 응,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감상이야 어떻든 간에 세이야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괜한 말을 해서 소년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은 기분도 있었다.
그 순순한 반응에 세이야가 옅은 신음성을 흘렸다. 시선을 내리자 언뜻 붉어진 소년의 귀가 보였다. 추운가, 하고 사가가 멍청히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세이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어딘지 모르게 허둥거리는 모양새였다.
“나, 나 먼저 갈게!!”
힘껏 소리치고 세이야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갑작스런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사가는 소년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벼운 소년의 발소리가 꼬리를 끌며 사라지고, 다시 정적이 내려앉을 때까지 사가는 그저 소년이 사라진 곳을 보고만 있었다.
달이 아름답네, 하는 말의 잔향만이 언제까지고 귓가에 남아있었다.
세이야는 비가 싫었다. 왜 싫은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만큼 밖에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하다, 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세이야는 비가 무척이나 싫었다.
비 같은 거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고 세이야는 소파에 앉은 채로 멍하니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바람을 배반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슬거리는 빗소리는 커져만 간다. 겨울도 아니고 가을이잖아! 하고 속으로 아우성치지만 역시나 변하는 건 없다. 이런 상황이 벌써 며칠 째이다. 그것을 깨닫고 세이야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겹치듯 타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운이 없군, 세이야.”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세이야는 시선을 돌렸다. 익히 잘 아는 남자가 시야 속으로 뛰어든다. 제미니의 골드 세인트이자 현재 세이야가 제멋대로 뒹굴 대고 있는 이 쌍아궁의 주인인 사가다. 남자의 단정한 입매에 언제나의 희미한 미소가 그려져 있다.
“……사가.”
세이야는 조그맣게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위로라도 하는 건지 사가가 가볍게 세이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소파에 앉는다. 바싹 닿은 온기를 느끼며 세이야는 조금 흐린 눈으로 제 옆에 자리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의 활기찬 모습과는 전혀 다른 세이야의 모습 때문인지 사가의 단정한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번지고 있다. 어쩐지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신경 쓰게 만든 것 같아 세이야는 별로, 라고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귓가가 뜨겁다.
사가는 상냥하다. 상냥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둔한 세이야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취급이 싫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쁘다. 하지만 기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려, 결국에는 부끄러워지고 만다.
부끄러움을 견디다 못해 세이야는 굼실굼실 엉덩이만 움직여 소파 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놓여있던 곰 인형을 끌어안고 거기에 얼굴을 푹 묻었다. 부드러운 천이 얼굴을 간질였다.
언제부터인가 쌍아궁 한편을 장식하고 있는 이 곰 인형은 세이야가 사가에게 선물로 받은 물건이다. 받을 당시에는 어린애도 아닌데, 라고 투덜댔지만 사실 세이야는 이것을 꽤나 좋아했다. 커다란 곰 인형은 안으면 폭신하고 감촉이 매우 기분 좋고 편안하다. 너무 편안해서 끌어안고 있다가 무심코 잠들어버린 적도 있을 정도다. 덕분에 세이야는 이제 마음을 안정시켜야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곰 인형을 안는 게 버릇이 되어버렸다.
인형을 끌어안은 건지 인형에게 끌어안긴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세이야의 모습을 보고 사가가 킥킥 웃음을 흘린다. 나즈막한 소리에 세이야는 아까보다 훨씬 더 귀에 열이 올랐다는 걸 자각했다.
곁눈질로 본 사가의 얼굴은 마치 어린 자식을 보는 아버지처럼 무척 흐뭇한 표정이라 이제는 분하기까지 했다. 쳇, 그래. 어차피 사가에 비하면 난 어린애다, 뭐. 하고 세이야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들은 건지 사가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사가는…….”
한숨을 섞으며 세이야는 사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남자의 부드러운 푸른색 눈동자가 자신을 비춘다.
“…내가 그렇게 좋아?”
그다지 특별한 의미를 담고 물은 말은 아니었다. 그저 사이좋은 동료니까, 선후배니까, 조금의 난처함과 아주 약간의 장난을 담아 한 말이었다. 사가라면 쓰게, 혹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래, 라고 가볍게 긍정할 것이라고 세이야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이야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가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래.”
대답하는 사가의 얼굴은 얼핏 굳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깨끗한 남자의 눈동자는 언제와는 다르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감정들이 혼탁하게 섞여, 그럼에도 하나의 굳은 심지를 가지고 세이야를 똑바로 바라봤다. 강한 열을 품고.
세이야는 당황했다. 이제껏 부드러운 친애의 정만 받아온 터라 이런 식으로 열망에 접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황하고 있자 사가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조차 평소보다 달콤하다.
“…읏!!”
더는 견디지 못하고 세이야는 다시 인형에 얼굴을 파묻었다. 금방 새카맣게 변해버린 시야 속에서 심장이 강하게 고동을 새긴다. 얼굴만이 아니라 전신에 열이 올랐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애꿎은 인형을 강하게 쥔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더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입을 열면 가슴에서 꿈틀대는 무언가를 토해낼 것 같아 세이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가도 말이 없다.
지금 비가 오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세이야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불편한 침묵에 갇혀있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억지로 입을 열어 말을 자아낼 필요가 없으니까. 이 고동소리가 사가에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빗소리가 모든 걸 지워주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이 비가 그칠 때까지 심장이 진정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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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과 비슷
각성과 동시에 눈이 떠졌다. 익숙한 천장을 확인하고 사가는 드물게도 앓는 듯한 신음을 냈다. 소파에 구겨져 자서인지 온몸이 뻐근하다. 모처럼 맞는 휴일 아침인데, 최악이다.
“아, 일어났다.”
순간 옆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와 사가는 몸을 일으키며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 데려온 소년이 마치 제집에 있는 듯, 무척이나 편안한 모습으로 사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천진난만한 미소가 소년에게 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생기를 더해주고 있다. 소년을 보고, 그리고 소년의 등 뒤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날개를 보고 사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꿈이 아니었다.
아니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초현실적인 것들을 전혀 믿지 않았던 사가에겐 지금 상황이 너무 버겁기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침울해하는 사가의 상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소년이 얼굴을 바싹 들이댄다. 가까워진 온기에 좀처럼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 사가는 당황했다. 동료는커녕 가족과도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 일은 없다.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어느 정도 성장한 뒤로는 타인과 친밀하게 닿는 행위는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다.
불편함에 사가는 몸을 움직여 어떻게든 소년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렇지만 소년을 밀치지 않는 이상 벗어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사이 소년과 더 가까워지고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딱, 하고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바로 코앞에서 다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 투명한 빛에 사가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소년의 눈동자는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었다. 그 색만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눈동자였다. 하지만 그 깨끗함은 다르다. 악의라고는 전혀 깃들어있지 않은 맑고 상냥함이 깃들어있는 눈동자. 그는 소년이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평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까. 사가는 알 수 없었다.
“저기, 당신이 날 도와준 거야?”
“아아.”
소년의 물음에 사가는 가볍게 응수했다. 역시! 하고 소년이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고마워!”
지나치게 상쾌한 얼굴은 그 외에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렇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전혀 모르는 사람과 있는데 경계가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고 사가는 생각했다. 오히려 경계를 하고 있는 것은 사가 쪽인 것 같다.
“……너는….”
“아. 내 이름은 세이야야, 세이야!”
“……그래, 세이야.”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순식간에 두통이 도져와 사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간결하고 건조한 인간관계만 쌓아온 사가로서는 이런 식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진정하는 것도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자연스럽게 소년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자신을 잃고 만다.
그래도 사가는 어떻게든 침착함을 발휘해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소년의 배가 울린다.
“……….”
“……….”
“……헤헤헤.”
멋쩍은 듯 소년이 뺨을 긁으며 웃는다. 사가는 결국 성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지.”
못 먹는 것은? 하고 물으니 없어! 하고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진실여부가 조금 의심이 되었지만 사가는 일단 세이야의 말을 받아들여 아침을 만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토스트에 달걀과 베이컨을 구운 간단한 식사였지만.
못 먹는 게 없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세이야는 사가가 내준 식사를 조금 신기해하면서도 호쾌하게 베어 먹기 시작했다.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혀가며 먹는 모습이 퍽이나 즐거워 보인다. 그 모습에 기껏 다잡은 긴장이 풀리는 걸 느끼면서 사가는 커피를 내리곤 세이야의 앞에 앉았다.
기척을 느끼곤 세이야가 고개를 들어 사가를 본다. 소년다운 어린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엄청 맛있어, 사가!”
“아아.”
사가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년의 무방비함에는 어쩐지 쓴맛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왠지 순진한 어린아이를 사탕으로 꾀는 나쁜 어른이 된 기분이다. 곁에서 본다면 필시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