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들
“좋아해.”
솔직히 말하자면 사가는 무슨 얘길 하다가 그런 말이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세이야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사가는 너무 바빴고, 때문에 소년이 이것저것 떠들어대는 말을 반쯤 흘려듣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반응이 제법 늦었다. 설마 느닷없이 고백 당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제아무리 소년이 자신의 행동에 암묵적으로 양해해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을.
하나 잘 생각해 보면 이 고백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세이야는 솔직하고 그다지 쑥스러움을 몰랐으며, 타인에게 아낌없이 애정을 퍼부어주는 타입이다. 그러니 저녁 메뉴를 말하는 것처럼 좋아한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 상대가 제아무리 자신이더라도.
때문에 사가는 그런가, 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뭐야, 그거. 예상과 전혀 다르게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음? 이게 아닌데? 당황해서 세이야를 보면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고 있다. 사가는 그제서야, 정말로 이제 와서이지만, 방금 전 세이야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어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혹시나 싶지만.
“긴장했는가?”
무심코 웃으며 물어보자 세이야가 이쪽을 째릿 노려본다. 분한 것인지 창피한 것인지 눈동자엔 눈물이 괴여있다. 그 모습에 다시 웃어버리자 이번에야말로 진짜 토라진 듯 세이야가 눈썹을 추어올렸다.
“당연하잖아!!”
짓씹듯 내뱉는 말도 언제나처럼 활기로 가득 차 있지 않고 조급하기만 하다. 원래대로라면 보일 리 없는 얼굴. 만약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한심하다는 말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르지만 세이야다 보니 그냥 답다고 느껴버린다. 아니, 오히려 겨우 제 나이처럼 보여 사랑스럽다. 잔뜩 붉어진 볼이 결정타다. 결국, 사가는 견디지 못하고 책상 위에 푹 엎드려버렸다. 완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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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673자
가끔은 이런 일도
소리가 밤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이따금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말소리도 금방 흩어졌다. 오히려 제가 뒤척거리면서 나는 이불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부스럭부스럭. 대단치 않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 무시하고 잠에 들려해도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잡음만 더욱 선명해져 정신이 또렷하다. 결국, 데프테로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데프테로스는 불면의 원인을 알고 있다. 텐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소년의 존재가 너무 익숙해졌기에 이제는 소년 없이는 잠들 수 없게 된 것이다. 고작 그것 때문에.
눈꺼풀을 닫으면 모든 게 또렷하다. 실없이 계속 떠들어대던 목소리, 깔깔거리던 웃음, 어두운 밤에도 반짝이던 눈동자, 부드럽게 풀어지던 입매, 어느새 혼자 잠들어 가라앉던 숨소리, 두 팔로 껴안으면 꽉 차던, 딱 그만큼의 온기. 정말 별것 아니면서도 끔찍하게 안심하게 되던 것. 그런 존재.
지독한 녀석. 불합리하단 걸 알면서도 욕을 한다.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기분이다. 제멋대로 기어들어 와 삶을 뒤흔들어 놓는데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불면의 밤을 끝내길 원한 적 없다. 안락한 잠 따윈 의미가 없었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랬는데 너는, 왜, 제멋대로, 어째서, 제게 안겨주려 하는 건지.
“중증이군…….”
고작 하루 이틀 없는 건데 이 정도로 동요할 줄이야. 이래서야 완전히 떠나버린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한심한 자신. 하지만 자조하면서도 팔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온기를 찾고 있었다. 언제나의 밤처럼. 네가 당연해서. 역시 습관만큼 무서운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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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632자
며칠 뒤, 돌아온 텐마를 맞이한 건 눈 밑이 시꺼매진 데프테로스였다고 한다
데프가 불면증이 있다는 건 제 뇌피셜입니다<
침대에 누워 뒹구는 데 의미 없이 데프테로스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당히 무심하게 시트 위로 얹혀진 손. 저 손이 얼마나 억센지 안다. 얼마나 커다란지, 얼마나 단단한지, 손가락 마디가 얼마나 굵은지, 굳은살이 어디에 박여있는지, 저 손으로 움켜쥐면 얼마나 아픈지도. 동시에 저 손이 얼마나 상냥한지도 안다. 때때로 눈물이 날 정도로 부드럽다는 것도, 자신을 대할 때마다 지독히 달콤하게 변한다는 것도.
정신을 차리면 손을 뻗고 있었다. 손등에 닿는다. 접촉한 피부의 감촉이 조금 거칠었다. 그대로 미끄러트려 마디마디를 훑으면 움찔거림이 되돌아왔다. 텐마는 쏟아지는 시선을 부러 모른 체했다.
“뭐냐.”
언짢다는 투로, 전혀 언짢지 않다는 태도로 데프테로스가 묻는다. 별로. 아무것도. 텐마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걸까. 잠깐 데프테로스가 침묵한다. 이상한 녀석. 이제는 자못 웃음기까지 담긴 목소리가 터졌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텐마는 속으로만 대꾸했다. 어쩐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녀석. 다시 데프테로스가 말한다. 제대로 대꾸하려 한 번 훌쩍이고 나서야 자신이 울음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끄러워.”
간신히 허세를 부렸다.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데프테로스가 조용히 숨을 내쉰다. 그것뿐이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설픈 쓰다듬도, 짧디짧은 위로도. 텐마는 이것이 데프테로스의 상냥함임을 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어중간한 짓을 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그저 옆에 있어 줄 뿐인. 그런 대단함.
종종 꿈을 꿨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꿈속에서 하나 둘 씩 떠나갔다. 자신의 등을 떠밀고 퍽 만족한 채로. 데프테로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때마다 텐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멀어져가는 등을 보며 울기만 할 뿐이었다. 지독한 악몽. 동시에 현실이기도 한. 당신은, 당신들은 언제나 그랬다. 자신 또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날, 먼저 떠난 사람은 누구였을까. 달려나간 건 자신이지만 등을 떠민 건 데프테로스였다. 쌍방과실? 그리 말하기엔 우스울지도 모른다. 당시 둘 사이엔 어떤 약속도, 어떤 교환도 없었으므로. 단지 희미하게 피어나던 마음뿐. 심지어 그것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구하기엔 너무 버거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게 오히려 옳았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여기 함께 있는 건 데프테로스였다. 이 기적이 이상했다. 어째서 당신과 내가 함께 있는 걸까. 운명 때문이라기엔 어폐가 있다. 누가 뭐라던 선택한 건 자신들이었다.
떠나지 않아. 더 이상 나를 필요하지 않을 때까진. 어느 날의 맹세를 떠올린다. 언제까지 지켜질진 모르지만 영원이 되기를 바랐다. 내 마음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동시에 이쪽이 할 말이라며 어금니를 악물던 데프테로스의 모습을 기억한다. 당신이라면 분명 자신이 한 말을 지켜주겠지. 내가 그러듯.
손끝을 매만졌다. 둥글고 딱딱하다. 짧게 깎인 손톱이 약간 깨져있다. 아프겠다. 중얼거림에 그다지, 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안심해도 여전히 신경은 쓰였다. 조심스럽게 매만지자 손가락이 얽혀온다. 무심하게, 일견 장난스럽게. 마치 사랑스럽다는 듯. 꽉 쥐면 데프테로스도 같은 세기로 붙잡아온다. 뒤섞인 온기에 텐마는 겨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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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1265자
사실 텐마도 트라우마가 상당할 것 같지 말입니다. 얘 눈앞에서 죽은 사람만 몇이야....;ㅂ;ㅂ;ㅂ; 라고 계속 음울해지는 글을 변명
사건의 발단은 방과 후였다.
지루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세이야는 키도 저에 도착하자마자 부엌으로 돌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 13세의 소년, 성장기라 시도 때도 없이 배고플 나이인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 오후에는 체육 수업까지 있었다. 제아무리 세인트라 남들보다 체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열량 소비까지는 막을 수 없는 법. 그러니 세이야가 곧바로 간식을 찾아 헤매이는 것도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잔소리를 할 마린과 타츠미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부엌으로 들어선 세이야는 망설임 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분명 어제 사 온 케이크가 있을 터였다. 푹신푹신한 스펀지, 달콤한 크림, 그 위에 예쁘게 얹어진 초콜릿과 과일 장식. 그래, 분명 맛있는 케이크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없는 건데!!!!!!!!!!!!!!”
세이야는 절망했다. 조금 울기도 했다. 그다음으론 분노했다. 누가 이렇게 극악무도한 짓을! 정말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해서 세이야는 범인을 알아내기로 했다. 이렇게 용의자 심문이 시작됐다.
첫 번째 용의자: 시류
“케이크? 아, 어제 사 온 거 말인가. 아니, 네가 사 온 걸 알고 있으니까 말없이 먹진 않아. 단 걸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케이크는 언제 없어졌는데? 오늘 아침까지 있는 걸 봤다고? 그렇다면 난 더더욱 아니지. 난 오늘 너랑 같이 하교했잖아. 그러니 몰래 먹을 틈 따윈 없었을 텐데.”
결과: 결백함.
두 번째 용의자: 효가
“갑자기 뭐야? 케이크? 물론 내가 전에 네 과자를 모르고 먹어버린 적이 있긴 있지만 딱 한 번이었잖아. 고작 그걸로 사람을 범인 취급하는 거냐? 뭐?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애당초 난 오늘 주번이라 너보다 늦게 왔다고.”
결과: 미심쩍지만 일단 결백함.
세 번째 용의자: 잇키
“내가 그딴 걸 먹을 것 같냐.”
결과: 무조건 결백함.
세이야는 절규했다.
“어째서 범인이 없는 건데!!!!!!!”
“그보다 왜 슌은 용의자 목록에조차 올라가 있지 않은 거지.”
“슌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너무 당연하다는 외침에 효가는 어처구니가 없어 침묵했다. 옆에서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잇키는 무시한 채로. 형제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류는 쓴웃음을 지었다. 본심을 말하자면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는 슌이 조금 부럽긴 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자신도 절절히 동감은 하고 있긴 하지만.
그나저나 이래서야 결론이 나지 않는다. 이대로 이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질 것인가, 라며 세이야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마침 할 일 없이 옆을 지나가고 있던 사오리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어머, 다들 모여서 무슨 일인가요?”
재기불능 상태인 세이야는 내버려 둔 채, 노골적으로 ‘뭔가 재밌는 일 있죠?’ 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있는 여신에게 시류는 이제까지의 일을 설명했다. 옆에서 효가가 중간중간 딴죽을 걸며 부족한 부분을 첨가했다. 물론 잇키는 옆에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슌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다.
별로 길지도 않은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자 사오리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아테나? 시류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리 심각한 얼굴을 하는지. 평소 그녀의 태도를 보면 그냥 호호 웃고 케이크라면 제가 얼마든지 사드릴게요, 라며 카드를 꺼낼 줄 알았는데.
사오리의 태도가 퍽 이상했던지라 한구석에서 엉엉 울던 세이야까지 고개를 들었다. 사오리 씨? 걱정이 듬뿍 담긴 막내의 목소리에 사오리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진다.
“세이야. 미안해요.”
“어? 뭐가?”
“그 케이크 제가 먹었어요.”
“…………응?”
어이쿠야. 시류와 효가는 무심코 하늘을 우러렀다. 잇키마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당사자인 세이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절망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오리 씨 바보!!!!”
성역의 긴 역사를 통틀어 페가수스가 여신에게 원망을 드러낸 유일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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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1478자
아주 예전에 쓰려고 생각했던 글. 딱히 길어질 것 같지 않기에 조각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