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아카/토도이즈]여름의 끝, 사랑의 시작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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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가자고 처음 얘기를 꺼낸 게 누구였는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처음엔 투정에 가까웠던 바람이 카미나리가 부추기고 키리시마가 동의하고 다른 모두가 편승해 시끌벅적 떠드는 사이 임간합숙이 끝나갈 즈음에는 A반 전원이 참가하는 행사가 되어버렸단 것이다. 지난 2년 반 동안 키워온 A반의 협동력과 추진력은 과연 헛된 게 아니었다.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토도로키는 그다지 내키지않아 했다. 귀찮음 때문이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 무관심 때문이다. 친구들과는커녕 가족들과도 같이 어딜 놀러 가본 적이 없었기에 바다에 가서 무얼 해야 할지, 그런 걸 한다고 재미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토도로키가 마음을 바꾼 건 카미나리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마지막 여름방학 정도는! 카미나리로서는 별생각이 없었겠지만 토도로키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마지막. 여전히 괴롭고, 서글프고, 동시에 어딘가 달콤함을 품고 있는 말에 토도로키는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마치 축제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이란 단어에 반응한 건 자신만이 아닌지 서로 일정을 맞추고, 계획을 세우고, 바보 같은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 와중에 다른 급우들도 전부 기쁘면서도 쓸쓸한 표정을 짓곤 했다. 대화엔 끼지 않은 채 정보만 머릿속에 새기면서 토도로키는 눈으로 미도리야를 쫓았다. 스치듯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미도리야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 미소 또한, 아니 남들보다 배로 쓸쓸해 보였다.
토도로키는 문득 예전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딱 한 번 사적인 일로 바다에 간 적이 있었다. 미도리야와 함께였다. 따로 약속을 하고 갔던 건 아니었다. 온갖 우연이 겹쳤었기에 그것 역시 기적이라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 1학년 때의 일이다. 여름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겨울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체육제 후, 토도로키에게 있어 주말마다 어머니에게 가는 건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잃어버린 10년의 시간을 채우듯 토도로키는 탐욕스럽게 병문안에 집착했다. 그로 인해 종종 누나에게 놀림 받는 일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좋았다. 없었던 가족의 인연이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간다고 해봤자 특별한 대화를 하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하는 쪽보다 들어주는 쪽이었으며, 토도로키는 굳이 어느 쪽인지 나눈다면 어머니와 비슷했다. 애써 꺼낸 목소리는 요령 없었고, 그마저도 툭툭 끊어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럼에도 어설픈 그 시간이 분명 구원이었다.
때문에 어느 주말 아침, 누나에게 걸려온 전화는 토도로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오늘은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이쪽을 걱정하면서도 단호한 누나의 목소리. ……어째서. 몇 호흡 뒤에서야 간신히 꺼낸 반문은 한심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누나가 머뭇거리는 기색이 똑똑히 전해졌다.
「엄마가 조금 아파서……. 」
속살거리는 듯한 음량이었으나 토도로키의 귀에는 무엇보다 선명했다. 무의식중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잠깐 사고가 멈췄다. 어쩌다. 왜. 아니, 아무래도 좋아. 그렇다면 더더욱 자신이 가야.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챈 듯 누나가 말을 덧붙였다. 괜찮아. 가벼운 감기야. 다만,
「혹시 너한테 옮기기라도 할까 봐 엄마가 많이 걱정하셔.」
그딴 건 이유조차 되지 못하는데. 그래도 토도로키는 꺾이고 말았다. 알았어. 그럼 다음 주에. 안부 전해줘. 의례적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남는 건 먹먹한 시간뿐이었다.
항상 이 시간엔 밖에 나갔었기에 기숙사에 남아있기가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어딘가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할 일을 찾을 기력도 없었다. 망설이다 토도로키는 지갑 하나만 들고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길 잃은 아이처럼 무작정 떠돌다 보면 시간이라도 어떻게든 보낼 수 있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추운 계절이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흐린 회색으로 변해갔다. 공기는 조금 쌀쌀했고, 나날이 맑아지고 있었다. 발밑에서 낙엽이 뭉그적댔다. 벌써 겨울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다만 의미 없이 넘겨버렸다. 기실 절반은 넋을 놓고 있었다.
토도로키는 그대로 정처 없이 걷다, 역으로 가 적당히 표를 하고, 전철을 타고, 도착한 뒤에 다시 정처 없이 걸었다. 중간중간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헛웃음도 몇 번 터트렸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바로 그 바다였다.
겨울 바다가 지나칠 정도로 적막했다. 시기가 시기이니 당연할 것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커플도 금방 자리를 뜨곤 했다. 덕분에 수면에 부서지는 햇살마저 쓸쓸하게 느껴졌다. 의미 없이 가까이에 있던 낡은 안내판을 보자 해안 공원이란 글자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글자는 전부 흐려지고 지워졌다. 아무래도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던 건 오랜 옛날의 일인 것 같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 별다른 목적이 있던 것도 아니지만 그냥 돌아가는 것도 어쩐지 멋없게 느껴졌다. 잠깐 해안선을 따라 걸을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토도로키는 남들과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그림자를 알아챘다. 작지만 다부진 실루엣. 쓰레기라도 줍고 있는지 손에는 커다란 봉투를 들고 때때로 허리를 숙인다. 짙은 색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을 때마다 녹색으로 반짝였다. 작은 호흡 사이에 토도로키는 상대의 정체를 확신했다.
미도리야. 멋대로 입술이 움직인다. 얼굴도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먼 거리였다. 그런데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미도리야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작게 움직임이 멈췄다. 기분 탓이다, 기분 탓일 것이다. 그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정신이 들었을 때 토도로키는 이미 미도리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래사장에 발이 멋대로 푹푹 빠졌다. 걸음이 진득이 붙잡힌다. 괜히 조바심이 들었다. 전부 얼려버릴까. 치솟는 생각을 간신히 떨치고 다리에 더욱 힘을 넣었다. 어느새 미도리야도 달려오고 있었다.
“토도로키 군!”
딱 한 걸음을 남긴 거리에서 미도리야가 멈춰 선다. 토도로키도 멈췄다. 웃음으로 가득한 뺨이 희미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묻는 음절도 마디마디마다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열렬한 환대에 토도로키는 무심코 볼을 붉혔다. 제가 얼마나 정신없었는지 깨달은 탓이다. 그냥, 어쩌다……. 적당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답지 않게 말을 우물거렸다. 너는? 되물으면 이번엔 미도리야가 쑥스러워했다. 예전에 여기서 훈련, 이라고 할까 신체를 단련했거든. 그래서 가끔 와. 모처럼 깨끗해졌으니까 또 더러워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겸사겸사. 과연. 두서없는 말 속에서도 필요한 정보는 알 수 있었으므로 토도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
“…….”
납득하자 대화가 끊겼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닌데 평소와 장소가 다른 것만으로 심히 겸연쩍었다. 토도로키는 애꿎은 모래사장만 계속 발끝으로 찼다. 미도리야도 어쩔 줄 몰라 손끝만 꼼지락대고 있었다.
나도 해도 돼? 견디다 못해 충동이 불쑥 튀어나왔다. 미도리야가 파드득 얼굴을 들었다. 곧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처럼 입술이 멍청히 벌어졌다. 어, 그게……. 안 돼? 아니, 그게 재밌는 일도 아니고……. 괜찮아. 오히려 지루할 거야. 괜찮아. 토도로키 군에게 도움도 안 될 거고. 괜찮아. 에, 또, 그리고……. 무의미한 반복.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고 거절만 꺼낼 모양새라 토도로키는 강하게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내가 하고 싶어.”
치사하지만 이리 말하면 미도리야가 거절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도리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했다. 그 끝에 미소가 어린 것도 같았다. 알았어, 같이 하자.
그리 실랑이를 벌이긴 했으나 할 일은 정말로 없었다. 해변은 넓었고, 쓰레기는 적었으며, 얼마 없는 일마저 미도리야가 먼저 끝내버렸다. 나중에는 그냥 둘이서 묵묵히 함께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미도리야의 말대로 재미없었고, 지루했고,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속절없는 시간의 끝이 미도리야와 함께라는 것만으로 토도로키는 만족했다. 충분했다.
이제 돌아가자.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미도리야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래. 토도로키는 그저 수긍하고 미도리야를 따랐다. 주운 쓰레기를 처리하고, 손을 씻고, 나란히 걸어 전철을 탔다. 흔들리는 창밖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살금살금 지나갔다. 그동안 어떤 대화도 나누어지지 않았다. 고요가 깨지는 건 너무 어려웠고, 동시에 너무 쉬웠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한 착각에 불과하지만 당시 토도로키는 자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무엇이냐 물으면 대답할 수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마음이라 불러야 할 것. 그랬기에 토도로키는 미도리야가 불쑥 꺼낸 말에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나중에, 언제라도 좋으니까 다시 같이 바다에 가지 않을래?”
토도로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미도리야의 손을 한번 꽉 잡았다 놓았을 뿐이다.
정말로 실현될지 의심스러웠던 이벤트는 놀랍게도 출석률 100%를 달성하며 성황리에 열렸다. 다른 사람들은 둘째 치고 바쿠고까지 모습을 드러낸 건 분명 놀랄 만했다. 본인은 키리시마가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해댔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바쿠고 역시 A반에 나름대로의 애착이 있다는 것을. 지난 3년간 우리가 고생한 게 부질없지 않았구나. 까불거리던 카미나리는 결국 한 대 얻어맞았다.
방학이 끝나가는 시점이라 해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걸로 청춘 만끽이라며 엉뚱한 외침이 터졌다. 자리를 잡고 누군가는 음료수, 누군가는 간식, 누군가는 매트 등등, 저마다 챙겨온 것을 꺼내는데 들뜬 기색이 완연했다. 그 가운데서 미도리야는 크게 웃고 있었다. 부드럽게 접힌 눈매가 곱다. 아직 둥근 턱선도, 얇은 점퍼를 입고 있지만 햇살이 투과하면 다 드러나는 허리선도. 토도로키는 희미하게 눈을 조프렸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 굉장히 신기했다.
설마 그때의 약속이 이런 식으로 실현되리라곤 상상한 적도 없었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에 관해서라면 여전히 겁이 많았다. 그저 가볍게 말하기만 했어도 미도리야는 기쁘게 승낙해주었을 텐데. 제 입으로 말하자니 그날의 일이 지나치게 꿈만 같았고, 미도리야는 그에 관해 조금의 틈도 내비치지 않아 지진부진 여기까지 끌고 말았다. 사실 이것을 그날의 연장이라도 봐야 좋을지조차 토도로키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비치발리볼 하자!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이게 미네타가 외쳤다. 그 제안은 A반 여성의 만장일치로 기각됐다. 대신 다들 무차별적으로 바다에 빠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자의로, 아주 일부는 타의로. 멍청히 서 있던 토도로키는 후자였다. 세로와 키리시마가 양팔을 잡았고, 아시도가 뒤에서 밀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토도로키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떨어졌다.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깊은 곳은 아니었지만 당황한 탓에 수면 위로 올라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입과 코로 바닷물이 그대로 들어가 짠맛이 느껴지고, 기침이 계속 나왔다. 너희들……!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다시 물보라가 일었다. 옆을 보니 미도리야가 허우적대고 있었다. 물론 동일범들의 소행이다.
제대로 물먹었는지 억지로 끌어낸 미도리야는 자신보다 한참 콜록거렸다. 그 와중에도 너무해, 라며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 그야 그러겠지.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응? 말간 눈동자가 이쪽을 올려본다. 눈꼬리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토도로키는 흘러넘칠 것 같은 눈물을 닦아주며 장난이 성공했다고 깔깔 웃어대는 삼인방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복수할까. 하자. 유치원생 수준의 물싸움의 서장이었다.
“하아……”
토도로키는 숨을 몰아쉬며 매트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물속에서 있는 대로 난리를 쳤더니 체력이 쭉쭉 달렸다. 이거 어지간한 훈련보다 더 힘들잖아. 반면 다른 급우들은 아직도 쌩쌩히 놀고 있다. 토도로키는 반은 경탄하고 반은 질린 얼굴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 비해 체력이 달린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아무래도 노는 체력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적당히 음료수를 꺼내 마시고 있자 미도리야가 비척비척 가까이 걸어왔다. 한눈에도 지친 기색이 분명했다. 미도리야. 작게 부르자 미도리야가 힘없이 웃고 옆에 앉는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혔다. 크지 않은 그늘 아래 들어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토도로키는 과민반응하지 않으려 더더욱 조심하며 음료수를 건네줬다. 고마워. 답하는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땀인지 바닷물인지. 접촉한 살갗이 쩍쩍 달라붙는다. 토도로키는 손끝을 움직였다. 고개를 약간만 움직이면 그을린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미도리야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친구들만 보고 있었다. 녹색 시선이 앞으로 향해 움직일 줄을 모른다. 공연히 화가 났다. 나를 봐. 토도로키는 예고 없이 미도리야의 손을 덥석 쥐었다. 손바닥 아래서 미도리야가 움칠댄다. 겨우 시선이 닿았다. 이제까지 스치는 것도 두려워했던 주제에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곧─
경악한 미도리야가 입술을 뻐끔댄다. 제대로 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미도리야의 얼굴이, 귓바퀴가, 목덜미가, 그리고 가슴팍까지 벌겋게 물들어가는 게 똑똑히 보였다. 미도리야. 속살거리듯 이름을 부르려 했다. 허나 그 전에 카미나리의 외침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토도로키! 미도리야! 비치발리볼 하자! 미네타의 욕망 섞인 애원이 드디어 실현될 모양인 것 같다. 이를 기회 삼아 미도리야가 벌떡 일어섰다. 누가 보낼까 보냐. 토도로키는 틈이 생긴 손을 다시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가지마.”
여기, 내 옆에 있어. 호기롭게 내뱉은 거에 비해 목소리가 가냘팠다. 제발이란 단어가 섞이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만큼 간절했다. 우물쭈물하던 미도리야가 카미나리를 향해 뻣뻣이 돌아섰다. 역시 가는 걸까. 그리 생각했는데, 기대하지 않은 기대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미안! 우린 쉬고 있을게! 크게 손을 흔드는 행동이 너무 당연한 듯 보인다. 제가 먼저 붙잡았음에도 토도로키는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괜찮아? 응,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며 미도리야가 다시 제 옆에 앉았다. 손은 여전히 연결된 채였다.
아까보다 닿은 면적이 넓다. 계속 햇살에 피부가 따끔거린다 싶었는데 맞닿은 부분은 더더욱 따끔거렸다. 소금기에 섞여 희미하게 미도리야의 살내음이 났다. 젖은 머리카락이 턱을 간질일 것 같았다. 이따금 미도리야의 손이 꿈틀대긴 했으나 그것은 싫어서라기보다는 익숙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마다 토도로키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다른 감각이 멀어지고 오로지 손바닥의 감촉만이 확실했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미도리야의 머리가 어깨 위로 떨어졌다. 미, 미도리야?! 토도로키는 어설프게 말을 더듬어버렸다. 대답은 없다. 색색 작은 숨소리만 미도리야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조심조심 얼굴을 살피니 역시나. 확실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퍽 편안하게, 이쪽이 억울해질 정도로. 미도리야. 꺾인 목이 혹시라도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 몸을 움직이자 고개가 이쪽으로 더욱 기울어진다. 입술 사이가 얄팍하게 벌어졌다.
“응? 미도리야는 자는 거야?”
어느새 다가왔는지 키리시마가 불쑥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래. 소리 없이 대답하니 키리시마가 넉살 좋게 웃는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 그리고는 자신들을 빤히 쳐다본다. 토도로키는 입을 벙싯거렸다. 왜? 키리시마의 입귀가 우그러진다. 아니, 너희 정말 친하구나. 말에 쓴웃음이 섞인 것도 같았다. 열사병 걸리지 않게 조심해라. 파라솔을 기울여 그림자를 키워준 키리시마가 다시 휘적휘적 걸어갔다. 토도로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충분히 멀어졌을 때쯤 중얼거렸다. ……이젠 그저 친하기만 한 거론 부족해.
늦은 오후가 되자 다들 자연스럽게 파라솔 밑으로 모여들었다. 서로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아도 슬슬 돌아가자는 말이 분명했다. 미도리야는 아직까지 잠들어있는 채였다.
진짜 피곤했나 봐. 신기한 듯 우라라카가 중얼거렸다. 음, 요즘 잠을 잘 못 잔다고 했으니 그 탓도 있겠지. 그녀의 말을 이이다가 받았다. 뜻밖의 말이었다. 요즘 잘 못 잔다고? 무심코 날카롭게 반응하자 이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우연히 중얼거리는 걸 들었을 뿐이니 잘 모르지만 졸업도 가까워지고 인턴 활동도 있으니 그런 게 아닐까? 퍽 그럴듯한 추측이라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나도 요새 가끔 잠 설치게 되더라. 낮에 잘도 자더만. 그건 밤에 못 자서 그런 거고! 왁자지껄한 대화 속에서 토도로키는 부루퉁하니 수긍했다. 제가 알지 못했던 것은 분하지만 미도리야가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성격도 아니니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도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죠?”
혼자 냉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야오요로즈가 고개를 갸울었다. 토도로키는 금방 그녀의 심중을 알아챘다. 이대로 미도리야가 깨어나는 걸 막연히 기다릴 순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깨우기도 미안하단 소리겠지. 저런 말까지 들었으니.
응─ 더 깊은 잠에 빠져들 듯 미도리야가 몸을 깊게 기대왔다. 옅은 숨결이 가끔 피부 위로 흩어졌다. 토도로키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미리 꾸미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욕망이 흘러 나온다. 내가 곁에 있을게. 우라라카가 눈썹을 깜빡였다. 정말 괜찮아? 그래. 그리 강하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다들 이견은 없는 것 같았다. 뭐, 토도로키니까. 얼마나 기묘한 신뢰인지. 탐탁지 않아 하던 바쿠고마저도 키리시마가 만류하자 비교적 쉽게 물러났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말라가는 피부가 버석거렸다. 그래도 토도로키는 미도리야를 깨우지 않았다. 조금만 더, 사실은 계속. 언젠간 끝이 올지라도. 그리하여 그림자가 충분히 길어졌을 때, 마침내 와야 할 것이 왔다.
토도로키 군? 미도리야가 눈을 비비적거렸다. 토도로키는 답 대신 조그만 등을 지탱했다. 감촉이 이상했다. ……미안. 다른 애들은? 다들 돌아갔어. 딱, 미도리야의 움직임이 멈췄다. 황망히 돌아보는 얼굴이 꼭 금붕어 같았다. 돌아갔다고? 그래. 우리도 돌아가자. 어, 응. 돌아가야지……. 근데 언제? 내가 얼마나 잔 거야? 글쎄. 토도로키는 부러 당황하는 미도리야를 더더욱 재촉했다.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억지로 샤워실에 밀어 넣었다. 토도로키 군……! 절절한 외침이 찢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도 미도리야는 여전히 얼굴을 들지 못했다. 미안해.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 토도로키는 또 몇 번이나 괜찮아를 연발해야 했다.
“정말 미안…….”
더 이상 우는 소리를 듣기 싫어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손을 움켜쥐고 그대로 잡아끌었다. 괜찮아. 돌아가자. 오후 내내 붙잡았던 손이 너무나 당연한 듯 연결되었다.
돌아가는 길은 짙게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무언(無言)인 채로 두 사람뿐인 귀로는 계절도 시간도 다르지만 언젠가를 떠올리게 했다. 비슷한 심정인지 미도리야가 어색하니 웃었다. 예전 생각난다. 아아. 말투가 잔혹하게 다정했다. 걸음이 늦춰졌다. 선후가 역전됐다. 툭, 손끝이 멀어진다. 토도로키 군? 미도리야가 돌아보았다.
“미도리야.”
녹색 눈동자에는 노을 색이 섞여 있었다. 시선에 따라 일렁이는 주황이 불꽃같다.
“그 때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겁먹은 것처럼 미도리야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럼에도 시선은 여전히 똑바로. 오히려 먼저 시선을 피한 사람은 토도로키였다.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졸업해도 연락만 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고 말했지.”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당시의 미도리야의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이 얼마든지 불가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토도로키는 알았다.
처음 1, 2년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더욱 시간이 지난다면. 서로가 없는 시간에 익숙해지고, 약속할 적당한 이유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그러는 와중에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미도리야가 일부러 자신을 멀리해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그렇게 되어도 넌 우리가 만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전부 거짓말인 게 분명한데.
“하지만 그런 건 싫어.”
도피는 이제 충분했다. 기적이니 포기니, 온갖 변명을 붙여가며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끝이 오는 게 두려워서, 단 한마디를 할 수 없어서. 토도로키는 여태까지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손쉽게 인정했다. 자신은 겁쟁이였고, 동시에 욕심쟁이였다. 바라는 건 너무나도 많았다. 전부를 원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것까지도 전부. 미도리야가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깨닫는 건 순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아주 조금.
“약속이 없으면 만날 수 없는 사이 같은 건 싫어. 네게 소중한 누군가가 생기는 것도 싫어. 그저 당연히 네 옆에 있고 싶고, 네 소중한 누군가가 되고 싶어. 네 특별이 되고 싶어. 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어차피 끝이 올 거라면 이쪽에서 끝내버리면 되는 거였다. 설령 더는 돌아갈 수 없게 되더라도.
“──나는 네가 좋아.”
미도리야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먼저 놀라겠지. 그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를 것이다. 어쩌면 쑥스러운 듯 웃을지도 모른다. 성대하게 말을 더듬을지도 모르고 그대로 달아나버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자신이 바라는 쪽이 아닐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도리야는 언제나 토도로키의 기대를 박살 내버린다.
“나, 나도!!”
커다란 눈동자가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았다. 노을이 번진다. 불꽃이 어느새 크게 일었다.
“나도 토도로키 군이 좋아……!”
계속 좋아했어. 토도로키 군이 너무 멋지고 상냥해서,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어. 일부러 등교 시간도 맞췄고, 기숙사에서도 같이 있으려고 노력했어. 토도로키 군이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골랐을 때 무척 기뻤어. 사실은 같이 바다에 가자고 계속 말하고 싶었어. 나도, 나도 토도로키 군의 특별이 되고 싶어!
결국 미도리야가 울었다. 눈물이 진주처럼 반짝반짝 예뻤다. 울먹임이 이리도 달콤했다. 토도로키는 이끌리듯 미도리야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그림자가 겹친다. 손과 손이 다시 연결됐다.
이제 곧 여름이 끝나고, 사랑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