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데프텐]상냥한 달 (4)
※여체화 주의
가느다란 몸이 품 안으로 쓰러진다. 팔과 손바닥, 가슴께에 최소한의 면적이 접촉했다. 어쩔 수 없이 닿은 부분에 올올이 감각이 일어났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하다. 그 감각을 닫듯 데프테로스는 다시 텐마에게 가면을 씌워주었다. 달빛에 금속질의 물체가 창백하게 빛났다. 둔탁한 칼금에 데프테로스는 가늘게 눈을 떴다.
팔에 안긴 생명의 무게는 지독히도 낯선데, 그럼에도 언제까지라도 짊어지고 가고 싶었다. 단념했음에도 다시 손을 뻗고, 그저 눈을 감고 싶었다. 포기와 체념이라면 이미 익숙했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욕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 만약 미련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자신에겐 사치라는 걸 데프테로스는 알고 있었다.
데프테로스는 조심스럽게 텐마의 몸을 눕혔다. 심장 한쪽이 쿡 찔렸다. 다른 수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고 간다는 게 미안했다. 그나마 뒤를 보살펴줄 녀석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가까이서 기척이 느껴졌다. 형처럼 친밀하진 않지만 낯설지도 않은 느낌.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데프테로스는 거리낌 없이 그에게 텐마를 맡겼다.
“이 녀석을 부탁한다, 데젤.”
“……아아.”
고개를 들자 그늘진 데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떤 얼굴일지. 텐마처럼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자신을 말리고 싶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말리지 않으리라 믿는다. 자만일지도 모르지만 데젤이라면 자신을 이해해 줄 테니까.
사실 그가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무엇을 말해도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 또한 바뀌지 않는다. 이미 작별조차 무용한 것이 되었다. 때문에 데프테로스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데젤은 끝끝내 자신을 붙잡았다.
“……데프테로스.”
한숨과 닮은 부름에는 분명한 안타까움이 들어있었다. 그것만이라면, 단지 그것만이라면 괜찮았다. 그러나,
“정말 이걸로 괜찮은가?”
데젤이 그리 물었다. 데프테로스는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입안이 바싹 마른다. 명치에 무거운 것이 걸렸다. 마치 언제든 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따갑게 속을 찌르며, 상처에 상처를 덧입히며. 괴로움을 종용하며, 어쩔 수 없음에 그가 딱 한 마디만을 내뱉도록.
오롯한 진심을.
허나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래. 녀석에게도 이게 좋을 것이다.”
자신과 있으면 모두가 불행해졌다. 그러니 텐마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소녀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모두를 위함이기도 했다.
만약 텐마가 정말로 페가수스라면, 모두의 희망이라면. 그렇다면 고작 자신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매우 소중하고,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 어차피 처음부터 자신과 함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데프테로스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괴로울 게 분명함에도 망설임 없이 걸어나가는 데프테로스의 모습에 데젤은 그의 각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우 강한 모습. 잠시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겐 더 이상 참견할 자격이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겐들 그럴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데젤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데프테로스가 부탁한 소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어리고 약하기 그지없는 아이. 이제껏 그녀와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순리를 따지자면 골드 세인트인 그가 고작 세인트 후보생을 만날만한 일이 있을 리가 없다. 허나 데젤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데프테로스와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황이 알려져도, 감사를 해도, 마음을 허락해도, 결코 일정한 거리 이내로 자신을 들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운한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거리가 데프테로스에게 있어서 최후의 방어선이란 건 쉽게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다만 슬펐을 뿐이다. 그래서는 그 홀로 너무 외롭지 않은가. 때문에 데젤은 텐마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 적잖이 안심했었다.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평소, 서로의 입장 상 공공연한 만남을 가질 수 없었기에 그와 데프테로스가 마주친 건 분명 우연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대화조차 되지 않는 말을 나누고, 두 사람은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아주 우연히 데프테로스가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겼단 걸 데젤이 눈치채지만 않았더라면.
멀리 향하는 눈길에 데젤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었다. 그의 시선을 쫓았음에도 처음에 데젤은 데프테로스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몰랐다. 질서 없는 무리 속, 그가 마음을 기울일만한 것은 없을 터인데. 그래도 주의를 기울이면 대상을 찾는 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결국 데젤은 그 소녀를 발견하고 말았다.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조그만 여자애, 그녀가 데프테로스의 신경을 온통 빼앗고 있었다.
물론 데젤이 그녀에 대해 몰랐다. 어딘가 특출 난 데도 없는, 그저 평범한 여자애였다. 옆에 도코가 있었으므로 얼마 전에 들였다는 제자가 그녀인가, 하고 간신히 생각했을 뿐이다. 덕분에 의문만이 계속해서 몸을 부풀렸다.
도대체 데프테로스는 왜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일까. 데프테로스에게 그녀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듯한 가설조차 나오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헛된 망상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사고를 포기하고 다시 데프테로스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데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순, 아주 일순. 아마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을 미세한 틈. 그러나 데젤은 눈치채버리고 말았다. 데프테로스가 얼마나 상냥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지. 얼마나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런데─
“응─”
문득, 텐마가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였다. 데젤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등줄기를 타고 긴장이 흘렀다.
“괜찮은가?”
“당신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텐마가 완만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데젤은 망설이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그만 손이 가볍게 맞닿아 왔다. 밤의 추위 때문이겠지만 감촉이 섬뜩하게 찼다. 밀려오는 감각에 데젤은 무심코 이를 악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생겼다. 데젤은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수런거리던 감정이 간신히 가라앉는 듯했다. 어찌 됐든 마냥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상처는?”
“없어……. 저기, 나 왜 여기에……?”
상황을 이해하는 덴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아무래도 모든 게 데프테로스의 바람대로 된 모양이다. 그런데도 데젤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너는 어째서 그렇게, 도대체 왜.
분노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시야가 어질어질했다. 짓씹는 것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가 용케 냉정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내가 왔을 땐 이미 네가 쓰러져 있던 상태였다.”
조잡한 변명이었지만 다행히 소녀는 그걸로 납득했다. 그 행동이 너무 시원스러워서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오히려 의심 좀 해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물론 여기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데젤은 어리석지 않았다. 다만 모든 걸, 치밀어 오르는 말도 감정도 전부 삼켰을 뿐.
“상처가 없다면 돌아가는 게 좋겠다. 이런 시간에 외곽까지 나와 있었다는 걸 타인에게 보이면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
살짝 눈을 내리깔면, 소녀의 머리가 위아래로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때, 텐마가 갑자기 이쪽을 올려다봤다. 똑바로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대로 보이진 않더라도 분명하게.
“……고마워.”
느닷없이 허를 찔렸다. 뜻밖의 말에 데젤은 도무지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예의를 차린 인사말일 것이다. 하지만 여러 상념에 빠져있던 데젤로서는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데프테로스와 텐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남자가 소녀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소녀도 남자를 소중히 여기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걱정되어 달려올 정도는.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어떤 감사 받을 일을 했단 말인가.
비극이 일어나는 걸 막지 못했다. 데프테로스가 떠나는 걸 막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결국 데젤이 할 수 있었던 건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단지 명목뿐인, 의미도 없는.
정말 이걸로 괜찮은가.
무반응에 텐마가 작게 인사를 하고 멀어져갔다. 소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데젤은 곧 기도하듯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느다란 그믐달이 미소 짓고 있었다.
데프테로스는 텐마의 기억을 지웠다. 텐마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모든 걸 포기하기 위해서. 그게 어느 정도의 각오를 나타내는지 몰랐다면 데젤은 필시 그를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허나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데젤에겐 불가능했다.
자신이 던진 질문이 되돌아왔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가.
답은 ‘알 수 없다.’였다.
친우의 각오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그를 홀로 두는 것도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지독한 모순만이 가득하다. 아마 몇 번을 생각한들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겠지. 자신은 그저 지인의 행복을 바라고 있을 뿐인데. 세상은 너무나도 잔혹한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뒤로도 데젤은 이날의 일을 계속 생각했다. 의문을 되풀이했다. 여전히 답을 내지 못하고.
그렇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로 시간만이 흘러갔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상황이 급변했다. 모든 게 얽히고설켜 제대로 된 가닥조차 잡지 못했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건 결코 남에게 보일 리 없을 남자의 파편. 당시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강해 보였는데.
깨달으면 마음의 추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상황이 그리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어쩌면 이것을 운명이라 불러도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데젤은,
"이쪽 방향으로 성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중해, 카논 섬이라고 불리는 섬이 있다. 그곳에는 귀신이 산다. 그자라면 죽음이든가 힘이든가를 너에게 전해줄 수 있겠지."
이미 끊어졌을 인연을 다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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