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세이야+슌+잇키]신장과 소년의 프라이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수행 시절, 세이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세이야보다 키가 컸다. 형과 같았던 아이오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카시오스 같은 또래의 경쟁자들도 세이야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마린의 수행으로 그런 사소한 데 신경 쓸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세이야 본인이 주변과의 인종 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양인인 이상 서양인보다 신체 조건에서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때때로 이것은 불합리한 비하의 근거가 되었지만 다행히 세이야에게는 콤플렉스 따윈 생기기도 전에 부숴줄 엄격한 스승과 상냥한 선배가 있었다. 세인트가 될 수 있냐 없냐 하는 문제에 비하면 신장에 관한 일은 매우 사소했고, 신체조건의 열악함도 스스로 인정하고 나면 의외로 크게 신경 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불리함이 유리함이 되기도 하니 결국 문제는 어디에도 없던 셈이다.
단순한 프라이드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 여성의 평균 신장은 물론 자신보다도 큰 마린도 주변과 비교하면 작다. 여성이라는 조건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러니 자신이 주변 사람들보다 작은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세이야가 신장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정작 일본에 돌아오고 난 뒤부터였다.
신장과 소년의 프라이드
펜이 조그만 소리를 내며 흰 종이 위에 숫자를 남겼다. 건네는 손길은 영 건성이다. 대조적으로 건네받는 세이야의 얼굴은 매우 심각했다.
세이야는 종이를 꽉 움켜쥐고 체육관 구석으로 이동했다. 바쁘기 때문인지 다들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도 맘이 놓이지 않아 주위를 한 번 더 살피고 나서야 시선을 종이로 떨어트렸다. 자연스럽게 어깨가 굳는다. 고작해야 종이쪼가리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긴장하다니. 수행 시절 새로운 훈련으로 들어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한심하지만 진실이다. 만약 마린이 이 얘길 듣는다면 코웃음 치며 훈련의 강도를 늘였겠지. 응, 역시 훈련 쪽이 더 긴장됐던 걸로 하자.
문득 기척이 가까워졌다. 고개를 들면 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손에도 똑같은 종이가 들려 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슌의 얼굴에도 매우 진한 긴장이 덮여있다.
바로 옆까지 온 슌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낸다. 응대하여 세이야도 무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교차. 고작 콤마 몇 초의 시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의견을 교환하기엔 충분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위기를 함께 헤쳐 넘어온 역전의 용사들은 동시에 종이를 펼쳤다.
“………….”
“………….”
잠깐 이루 말할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전혀 변하지 않았잖아.”
“……에에, 그러게.”
입술에서 포로록, 한숨이 떨어진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무거운 한숨이었다. 하지만 한숨이 제아무리 무거워 봤자 한숨.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의 한숨에도 불구하고 종이 위의 숫자는 변함없이 165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랴. 세이야와 슌이 들고 있는 종이는 신체검사표였다. 그것도 이전과 전혀 변하지 않은 수치의.
사실 세이야와 슌은 작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인 평균 신장을 생각해 본다면 또래보다 큰 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주변에 있는 자들이 평균을 훨씬 상회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골드 세인트를 보면 아주 극소수의 예외─도코─를 제외하곤 전부 180cm 이상이다. 최대수치는 심지어 2m 이상. 그래도 여기까지라면 인종과 나이의 차이 때문이라고 그럭저럭 납득(혹은 자기위로)할 수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두 사람의 이복형제들이였다.
제일 맏이인 잇키와 비교해도 고작 2살 차이. 물론 하프인 효가를 제외하곤 모두 다 같은 동양인, 아니 일본인이다. 그럼에도 다른 형제들과 둘 사이의 신장 차이는 적지 않다. 제일 가깝게 지내는 시류와 효가만 봐도 머리 반개 가까이 차이가 난다. 덕분에 세이야와 슌의 좌절감은 나날이 깊어만 가고 있는 중이다.
“……슌. 어떻게 하면 여기서 더 클 수 있을까?”
“음……, 균형 잡힌 식단과 적당한 운동?”
“뭐야, 그건. 이제 와서?”
균형 잡힌 식단은 모르겠지만 운동은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해왔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그 사실을 지적하자 슌이 어색하게 웃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건 동의의 표시다.
“뭔가 팟! 하면 쑥! 커지는 마법 같은 건 없을까?”
“팟, 하면 쑥, 이라니…….”
떨떠름한 시선을 보내는 형제에게 세이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물론 자신도 그런 마법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일반인의 시점에서 보면 세인트는 기적에 가까운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지만 그래 봤자 인간에 불과하다.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한정되어 있다. 사실 세인트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뭔가를 부수는 것 정도일까. 다른 무언가를 만들고 기르는 건 결국 시간과 신의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장을 늘리는 데 신의 힘을 쓰는 건 좀. 애당초 어떤 신이 그딴 걸 해주겠느냐마는.
‘……아니, 사오리 씨라면 해줄지도?’
평소 자신들에게 약한 여신의 행동을 떠올려 보면 있음 직한 일이다. 실제로 가능한지 아닌지의 여부는 둘째 치고서라도.
그때, 세이야이 상념을 끊어내듯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잇키(형)!!”
맏형의 등장에 막내들은 반색하며 망설임 없이 잇키의 손에 들려있던 신체검사표를 빼앗았다.
“응???”
잇키답지 않게 매우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무시하고 종이를 들여다보자, 거기엔 뚜렷하게 175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자신들보다 10cm는 더 크다. 겨우 2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순간적이지만 세이야는 매우 불합리하게 잇키를 비난하고 싶어졌다.
“치사하게!!”
충동에 몸을 맡겨 소리부터 지르고 봤다. 그러자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는지 잇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외형이 쓸데없이 남자답기 때문인지 이런 사소한 동작도 굉장히 박력 있다.
“갑자기 뭔가 싶었더니……”
잇키가 너무 한심한 듯 말했던지라 세이야와 슌은 무심코 발끈했다. 아무리 상대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이더라도 용서 못하는 일이 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걸!”
강하게 반박하자 잇키가 다시 혀를 찼다. 그 행동에 세이야와 슌이 더 발끈해버린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쯤 되면 숫제 오기와 프라이드의 문제였다. 물론 자신들도 이래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사춘기 소년의 마음은 매우 오묘하고 섬세하며, 민감한 것이다. 비록 세인트라 할지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딴 건 전혀 필요가 없는, 피비린내 나는 지옥에서 살아왔던 잇키에겐 슬프게도 사춘기 동생들의 마음을 헤아려 줄 만한 감성 따윈 없었다.
“그렇게 애쓴다고 키가 클 리가.”
“……읏! 너무해!!”
현실을 지적하는 잔혹한 말에 소년들은 조금 울었다. 기분 탓인지 묘하게 뻐기는 듯한 잇키의 모습이 매우 화가 난다. 더 화가 나는 건 반박할 말이 없다는 거지만. 깊게 상처 입은 소년들은 눈물을 삼키며 언젠간 반드시 잇키보다 훨씬 커 주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일단의 계획은 매일 우유 한잔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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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2611자
근데 솔직히 세이야랑 슌은 키가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을 것 같지 말입니다. 샤이나(166)나 마린(167)이나 판도라(166) 같은 여자애들보다 작은걸요....(귀여워<) 주요 인물 중 얘네보다 작은 건 사오리나 키키 정도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