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14 머나먼 시공 속에서
모처럼의 한가한 오후였다. 일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쉬엄쉬엄해도 될 정도다. 덕분에 그동안 미뤄왔던 취미생활(독서)을 재개하려고 모처럼 마음먹었다. 조용한 공기, 허공을 맴도는 달콤한 차의 향기, 적당히 밝은 램프의 불빛. 그야말로 완벽한 오후였을 터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답은 없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인 소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새근새근 조용한 숨소리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사라는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회상했다.
라고 말해도 시작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계를 확인하면 언제나와 같은 시각. 몸은 피곤을 호소하지만 이미 버릇이 붙어있는 신체는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으로 나아갔다. 간단한 아침 식사와 몸단장을 마치고 그대로 방을 나선다. 집무실에 도착하면 사가와 므우가 피곤한 얼굴로 자신을 맞아줬다. 그대로 내내 집무실에 처박혀 일에 열중.
점심때가 되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때마침 아프로디테가 위문품이라며 샌드위치를 만들어 와줬기에─본심을 말하자면 위문품보다는 차라리 서류처리를 도와달라고 하고 싶지만─ 다 같이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짧은 휴식. 직후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므우가 갑자기 만류했다.
‘급한 일도 없으니 사라는 쉬는 게 어떨까요?’
형식은 질문에 가깝지만 내용은 강압에 가까운 권유였다. 느닷없는 제안에 눈을 깜빡이고 있으면 사가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라는 몹시 놀랐다. 급한 일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아직 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 같이 일을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의외로 완강한 반발이 돌아왔다. 별말은 안 하지만 아무래도 얼마 전에 입원─절반 이상은 거짓이었지만─한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괜찮을 리가 없을 텐데.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전에도 말했듯 사라는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까지 찾아 하는 워커홀릭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모처럼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조기퇴근은 눈치가 보인다. 해서 일단 본래 업무─이젠 거의 부업이 되어버린─를 위해 서고로 향했다. 중간에 카논을 만나 약간의 놀림이 섞인 인사를 밖은 것도 평소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서고에 들어서는 순간, 사라는 상당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공기가 뒤틀린 듯한 위화감. 무엇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곧 정답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당히 어둑한 서고 한구석에서 누군가의 팔이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던 것이다.
‘설마 살인사건?!’
순간 뒤숭숭한 단어가 뇌리를 스쳤지만 사라는 곧 그것을 부정했다. 모 명탐정이 등장하는 만화도 아닌데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 실제로 달려가 상태를 살피면 숨이 끊어져 있기는커녕 상처 하나 붙어있지 않다. 하지만 안심하는 것도 잠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사라는 다시 경악했다.
곱슬기가 강한 갈색 머리카락, 평범하지만 어딘가 애교 있는 얼굴. 의외로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속눈썹이 길다. 주변에 지나칠 정도로 미인이 많기에 특별히 주목은 받고 있지 않지만 5년쯤 후가 기대되는 외모다. 오히려 불필요하게 반짝이지 않기에 소녀의 순진한 연심을 얻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감겨있지만 필시 저 눈꺼풀 안에 있는 눈동자의 색은 빨강일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인상적이고 강한 의지와 빛을 품고 있는─ 그래, 소년의 사라의 막냇동생과 똑 닮아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세이야로 착각할 뻔했다. 그래도 금방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은 미묘하게나마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외모 덕분일까 그도 아니면 누나의 감일까. 어느 쪽인지 확신은 없다. 참고로 상관도 없다. 어느 쪽이든 소년이 수상한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라가 알기로 이런 소년은 성역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한정된 공간에서만 생활하고 있기에 확신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세이야와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다면 최소한 소문 정도는 났을 것. 현재 성역 내에서 세이야의 위상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연히 세이야와 닮은 소년이 우연히 여기로 흘러들어온 것일까. 그 또한 말이 안 된다. 아무리 현실이 픽션을 뛰어넘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다.
도플갱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니 세상 어딘가에 세이야와 똑 닮은 소년이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다. 왜 쓰러져있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지병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백 보쯤 양보하면 그런 소년이 성역까지 올 가능성도─소수점에 가까울 테지만─ 인정 못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년이 ‘성역’에 왔을 경우다. 이곳은 교황의 거처에 있는 서고다. 즉, 여기까지 오려면 최소 12궁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리다. 이 소년이 타인에게 모습을 보였다면 필시 소란이 났겠지. 허나 사라가 아는 한 오늘 그런 소란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건데─ 일반인에게, 아니 세인트라도 그런 건 불가능하다. 가능하다면 최소 신(神)일 것이다.
무엇보다 소년이 몸에 걸치고 있는 건 평상복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딘가의 코스튬이나 전통의상인 것도 아니다. 밖에 나간다면 꽤나 이상하지만 사라의 눈에는 익숙한, 거칠고 조잡하지만 튼튼한 것만은 장점인 세인트들의 훈련복이다. 그렇다는 건 역시 소년이 성역의 인간이란 소린데, 그러면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처음 소년을 발견했을 때 바로 누군가에게 알리는 게 좋았을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동생과 닮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외견뿐, 속에 어떤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령 나쁜 사람이 아니더라도 수상쩍은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라는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들 수상하다고 해서 이 소년을 함부로 취급하지는 않겠지만─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제법 의문이 있지만─ 그런 의심을 하는 것 자체가 왠지 미안했다. 본능, 혹은 여자의 감이라는 것이 이 소년이 무해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잘 작동하지 않는 물건이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적중해주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 고로 사라는 소년이 깨어나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여하튼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만약 소년이 나쁜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알리기도 전에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떠오르지 않은 것으로 했다.
그게 벌써 한 시간도 전의 일이다.
처음에는 단순 기절이라 생각했지만 중간부터 수면으로 바뀐 듯, 소년은 좀처럼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사라에게 의학적 지식은 없으므로 기절한 것인지 정말로 자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너무 편안한 모습에 그렇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소년이 깨어나길 기다리면서 책이라도 읽고 있으면 좋았다. 물론 책에 집중할 수 있었을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결국 사라는 한숨을 내쉬며 소년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몇 번을 봐도 소년의 얼굴은 세이야와 똑같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쌍둥이로 착각할 것이 틀림없다. 자신이야 이 소년이 조금 더 어른스럽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도 주관적인 느낌이니 실제로는 둘이 동갑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세이야에게 쌍둥이가 있었다거나……?
그렇게 기다림에 지쳐 사라가 소설을 써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소년이 찰칵 눈꺼풀을 열었다. 아직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희미한 빛을 흩뿌린다. 드러난 소년의 눈동자를 보고 사라는 감탄했다.
“……우와─”
이전에 세이야의 눈동자를 보고 가넷 같은 붉은색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햇살에 눈동자가 반짝일 때의 일이다. 평소 세이야의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고, 심지어 빛을 받을 때조차도 밝은 적갈색에 가깝다.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와 비교하면 확실히 붉은색이겠지만 일반적으로 빨강이라고 얘기했을 때 떠오르는 색과는 역시 거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눈동자는 세이야보다 훨씬 붉었다. 그것도 알비노의, 피의 빨강과는 전혀 달랐다. 짧은 어휘력으로 비교하자면 여명의 시간,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과 같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상냥하고 부드럽지만 그럼에도 세이야처럼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주홍색. 일순이지만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인기척을 느낀 건지 소년이 이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흐리멍덩했던 눈동자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온다. 곧 소년의 얼굴에 놀람과 의아함이 가득 찼다. 그를 보며 사라는 조금 즐거운 기분으로, 조금은 짓궂게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잘 잤어?”
아무래도 소년과의 대화는 잔뜩 길어질 것 같았다.
“……너, 누구야.”
이쪽을 확인한 소년이 곧바로 경계의 기색을 내비친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거의 반사적인 반응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의가 선명하다. 동생과 닮았으면서도 동생과 전혀 다른 음색에 사라는 무심코 쓴웃음을 띄웠다. 이런 반응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어쩐지 씁쓸하다.
“……그건 이쪽의 대사인데.”
내심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봤지만 소년의 경계는 도무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 높아진 것 같다.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소년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난다. 아니, 내가 뭘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위험하게 생기지도 않았는데 그 반응은 너무한 거 아니니. 불만을 가득 담아 사라는 반쯤 의도적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한숨 소리에 소년의 어깨가 움찔 떨렸지만 당연히 상황이 호전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검은 고양이처럼 털을 곤두세울 기세다. 사라는 다시 쓴웃음을 흘리며 소년의 앞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었다.
“너, 여기가 어딘진 알고 있어?”
“……어딘데?”
“교황의 거처, 에 있는 서고.”
과연 그 말에는 놀랐는지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퍽 순진한 모습이 소년을 훨씬 어려 보이게 만든다. 어쩜, 이런 표정까지 똑같은지. 사라는 오묘한 감정을 눌러 삼키며 계속 입을 열었다. 세이야와 닮은 얼굴 때문인지 이상할 정도로 편하게 말이 튀어나온다.
“참고로 나는 여기 관리인이야. 자, 그러면 여기서 너와 나 중 누가 더 수상한 사람일까? 응? 이곳은 허락받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데 말이지.”
최근 들어서는 브론즈 세인트들이 툭하면 놀러 온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처녀좌의 골드 세인트가 툭하면 습격한다는 것도. 원래 심문과 협상 테이블에서는 이것저것 다 말하는 게 아닌 법이다. 딱히 거짓말은 안 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과연 여기에는 대꾸할 수 없었는지 소년의 눈동자가 심하게 방황하기 시작한다. 당황하는 모습이 제법 안쓰럽다. 사라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걸 보니 꽤 순진할지도 모른다. 이래서야 어쩌지 맘이 약해지는데. 하긴. 이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그래서 너는 어떻게 여기에?”
일단 질문을 계속해 나가면 소년의 눈동자가 겨우 이쪽에 고정됐다.
“……몰라. 훈련을 마치고 잠깐 쉬고 있으면 갑자기 어지러워져서……, 정신을 차리니까 당신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말하던 소년이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예쁜 눈동자가 미묘한 감정의 빛으로 반짝였다.
“당신이 날 여기로 옮긴 거 아냐?!”
맞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멱살을 움켜쥘 기세다. 이래서야 쓴웃음도 더는 나오지 않을 정도다. 사라는 덩달아 흥분하는 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방향성은 나쁘지 않았지만 소년의 추리에는 그를 뒷받침할만한 결정적 증거가 부족했다.
“보면 알겠지만 내 체격으로는 무리가 아닐까.”
조금 씁쓸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사라는 눈앞에 있는 소년보다도 훨씬 작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도 작다. 만성 운동 부족 때문에 근력은 말할 것도 없다. 즉, 통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사라가 정신을 잃은 소년을 여기까지 끌고 오는 데에는 아무리 해도 무리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세인트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뭐, 소년이 거기까지 알 수 있을 리도 없지만.
그렇지? 라고 되물으면 소년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곤란함은 있지만 뭔가 숨기고 있는 기색은 없다. 감정을 바로 드러내는 얼굴 덕분에 알기가 쉽다. 일단 소년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라는 건 또 뭔가 모르는 데서 사건이 일어났단 소리인데. 이래서야 완전히 홀드 업이다.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하다. 아니, 정보가 넘쳤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은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이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소년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사라는 소년을 안심시키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분명 자신은 아무 힘도 없다. 그러나 힘이 없다고 해서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너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네. ……그럼 누군가에게 떠넘길까.”
“……떠넘겨? 누구한테?”
“글쎄. 아무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너도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 소년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납득은 전혀 못 한 것 같지만 일단 따라준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손을 뻗자 소년이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가 심히 마음에 스며든다. 잠깐 시선이 엇갈렸다. 완전히 일어서면 이제는 약간이지만 소년 쪽이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살짝 고개를 들면 그제야 시선이 일직선에 놓였다.
의심, 불안, 한탄, 그리고 아주 약간의 안도.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눈동자가 강하게 부딪혀 온다. 사라는 거기에 대응하듯 희미하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일단 통성명이라도 하자. 난 사라. 사라든 누나든 편한대로 불러.”
상대를 세이야라고 생각하면 뻔뻔한 대사도 의외로 저항 없이 흘러나왔다. 소년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질린 건지 아니면 망설이고 있는 건지. 하지만 소년은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난 텐마. ……페가수스의 세인트야.”
“…………………………헤?”
사라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날 오후, 시온은 오랜만에 집무실에 있었다. 물론 있기만 한 것이지 집무를 도와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덕분에 제자의 눈초리가 따가웠지만 무시. 솔직히 가렵지도 않다. 자신의 나이는 벌써 200대 중반(그러나 육체 나이는 19세). 노동하지 않아도 괜찮은 권리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하지만 조금 심심하군. 시온은 속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만약 므우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일이나 하라며 쏘아붙였겠지만 슬프게도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제자는 스승의 마음을 읽을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시온에게는 다행히, 때마침 누군가 집무실을 찾아왔기에 그 사실은 영영 어둠에 묻혔다.
똑똑,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약간 문이 열린다. 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사람은 사라였다.
“잠깐 실례……. 아, 잘됐다. 시온도 있었…….”
“어? 시온이 여기 있다고?”
순간, 시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놀란 듯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시온은 거기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기척으로 사라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그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성역에 있는 자들은 어차피 대부분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존재이니까 익숙한 게 당연했으므로.
그렇지만 아니었다. 명백한 오산이었다. 이 목소리는, 이 기척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을 리 없는 그리운 소년의 것.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사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그 뒤를 한 소년이 따라 들어왔다. 역시, 그다. 최근 자주 얼굴을 마주치고 있는 소년과 닮았지만 그럼에도 절대 시온이 착각할 수 없는 얼굴. 시온은 멍청하게 입술을 열었다.
“……텐마?”
“에? 뭐야,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어, 근데 너 옷이…….”
상황을 전혀 모르겠다는 듯 텐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천진한 동작에 숨이 멈췄다. 반사적으로 오랜 친우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도코에게 알려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텐마가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에게 알리지 않으면.
생각과 동시에 코스모를 끌어 올렸다. 그대로 천칭궁에 있는 친우에게 접촉.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두서없는 말을 쏟아 넣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도코에겐 충분했던 듯 금방 가지, 라고 짧은 답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통신을 끊기 전에 불안정한 친우의 심경이 그대로 전해졌다.
“시온?”
텐마가 다시 이름을 불러왔다. 겨우 호흡이 터졌다. 소년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이 생생하다. 아, 맙소사. 이게 정말 꿈이 아니구나.
소년이 이쪽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동시에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떨어져 나갔다.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안다. 도코다. 살짝 고개를 돌리면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친우의 얼굴이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얼굴. 필시 자신도 다르지 않겠지.
“……도코?”
너희 왜 그래? 라는 소년의 목소리는 중간에 깨졌다. 참지 못한 도코가 텐마를 힘껏 끌어안은 것이다. 당연히 텐마는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버둥거렸다. 어딘가 그리운, 그러나 감정만은 전혀 다른 그 상호작용을 시온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백 수십 년 전과 똑같다. 동생이라 부르며 도코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 텐마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곤 했다. 하지만 시온은 알고 있었다. 텐마가 그러는 건 정말 싫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부끄러워서라는 그렇다는 걸. 왜냐면 마지막엔 언제나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면서도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으니까. 마치 지금처럼.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한줄기 뺨 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 도, 도코? 어이, 잠깐 팔에 힘…… 자, 잠깐!! 팔에 힘 풀라고!! 아프잖아!!!!”
견디다 못한 텐마가 시원스레 도코를 걷어차는 걸 보고 시온은 무심코 탄식했다. 너희들, 내 감동 돌려줘.
“타임슬립이네요.”
스스로도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내뱉으면 모두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SF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튀어나왔으니 무리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현실도피를 하는 건 허락할 수 없다. 자신이 시시때때로 현실도피를 하는 건 지금은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상황의 중요성이 다르다, 중요성이.
다행히 여기서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딴죽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동시에 답변도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이번 일을 해결할 의지나 있는 걸까. 이 사람들이라면 모두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굳은 신뢰가 사라에게 있었다. 정말이지.
믿을 사람 하나 없는 환경에 절망하며 사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사적으로 남자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불편한 적막 속에서 멀쩡한 건 이 모든 일의 원인이자 피해자인 소년뿐이다. 이쪽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텐마의 시선에 사라는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감동의 재회를 마치고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갑자기 등장한 소년이 페가수스의 세인트라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백 수십 년 전, 이전 성전 때의 페가수스라고 한다. 동시에 도코의 제자이기도 하며 실제로는 형제에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지만 알 수 있었던 건 거기까지뿐이다. 어떻게 텐마가 시간을 뛰어넘은 것인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단 본인부터가 사건 당시의 기억이 애매하니 어쩔 수 없다. 다만 시간을 다루는 일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니 신이 개입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을 다스리는 신이라면 크로노스지만 그가 무슨 이유로……?”
타당한 의문을 입에 담은 사가에게 사라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심심했나 보죠.”
신격모독에 가까운 어조에 남자들이 황당하단 표정을 짓는다.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텐마도 예외는 아니다.
“……사라여,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좀.”
애매하게 시온이 태클을 건다. 사라는 대답 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직접 신을 모시고 직접 신과 접촉하는 세인트의 특성상 그들이 신에게 경외감을 품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라는 달랐다. 아무리 성역에서 지내고 실제로 신과 만난 적도 있다지만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에 인식의 차가 있는 건 당연하다. 애당초 신과 있었던 일이라고 해봤자 돈으로 매수당하거나(아테나), 경멸당하거나(타나토스), 무시당하거나(휴프노스와 하데스) 하는 일뿐이었는걸.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잖아요.”
“앗! 그러고 보니 나 어떻게 돌아가?!”
그제야 깨달은 듯 텐마가 간절하게 시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떤 의미로는 시원스럽다고 할 수도 있는 반응에 시온과 도코가 복잡한 반응을 되돌린다. 사라는 막연하게나마 둘의 속마음을 이해했다.
시온과 도코가 이렇게 텐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일 터다. 설령 운명의 장난이더라도, 그것조차 감사하고 싶을 정도로. 그러니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헤어지는 게 내키지 않는 건 당연하다. 헤어지는 것이 올바른 행동임을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에 반해 텐마는…….’
오히려 돌아가지 못해 안달인 모양이다. 하긴 텐마 입장에서 보면 시온이나 도코와 반날 수 있는 건 굉장히 당연한 일일 테니까. 뭐, 텐마는 전혀 나쁘지 않다.
사라는 시무룩해 있는 최고 연장자 둘을 내버려 두고 사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또다시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된 남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성실하게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어나더 디멘션인가 그거로는 안 되나요?”
정확히 무슨 기술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차원과 관련된 괴랄한 기술인 건 안다. 효가가 슌의 말도 안 듣고 까불다가 그 기술에 당해 큰일 날 뻔했다는 것도. 여담이지만 정보의 출처는 세이야다.
질문을 받은 사가가 난처한 얼굴을 한다. 그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A.D.로는 공간이라면 몰라도 시간은 무리다.”
역시나. 하긴 그렇게 간단했다면 애초에 고민하고 있을 필요가 없긴 했다.
“처녀궁의 사라쌍수를 이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그것도 무리일 걸. 그렇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모처럼 므우가 낸 제안도 바로 반박당했다. 동시에 대화를 듣고 있던 텐마의 얼굴도 바로 울상이 됐다. 사방에서 한숨이 흩어진다.
신기하게도 이 소년의 울상은 세이야와 달리 고집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막내라서 그런지 솔직하고 제법 어리광을 부리는 세이야와는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 해도 괜한 죄책감이나 비호 욕구를 가지게 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사라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이번에는 사가와 므우의 얼굴도 흐려졌다. 친형제들에 비하면 사소해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사실 이 둘도 제법 페가수스의 소년을 아끼고 있었다.
“……사오리 씨, 그러니까 아테나가 며칠 뒤에 돌아오면 어떻게든 해줄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아테나가 페가수스의 세인트를 곤란한 지경에 내버려 둘 리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어설프게 위로를 하자 텐마가 이쪽을 쳐다본다. 깨끗한 노을 색 눈동자가 지금은 물기로 희미하게 젖어있었다. 음, 역시 이 얼굴은 파괴력이 무섭다니까.
“……정말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든?”
애매하게 대답하면 텐마가 다시 울상을 짓는다. 사라는 탄식을 삼키며 손을 뻗었다. 만약 상대가 세이야라면 머리를 쓰다듬어 줬겠지만 이번엔 상대가 텐마니까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기만 한다. 다행히 소년은 사라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뭐, 안되면 같이 살면 되잖아?”
“하하! 그거 명안이구나, 사라여.”
“흠, 나쁘지 않군.”
“하긴 여기서 한 명 더 늘어봤자…….”
“그렇다면 어딘가 방을 준비할까요?”
“너희들!! 농담은 작작해!!!!”
다들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하고 있자니, 책상이라도 뒤집어엎을 기세로 텐마가 벌컥 화를 냈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년의 태도에 사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난 진담인데?”
정말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대답하자 텐마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그 사이에서 사라는 멀뚱멀뚱 다른 사람들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소란에 다른 골드 세인트들이 달려왔다가 경악하는 것과 텐마와 브론즈 세인트들이 만나 소동이 일어난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교황의 거처에서는 성역의 전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텐마는 기둥에 삐딱하게 기대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으로 멍하니 시선을 던졌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닮았지만 확연하게 다른 풍경. 당연하다. ‘지금’은 자신이 있던 시간대로부터 이백 수십 년이나 지난 후니까. 그럼에도 역시 그리움을 느껴버리는 건 익숙한 장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원인 모를 사건으로 미래로 와 버린 지 벌써 사흘째다. 그동안 텐마는 교황의 거처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딱히 자의는 아니었다. 낯선 곳이라고 움츠러든 것도 아니고 외출에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주변이 문제였다. 제아무리 텐마라도 밖에 나갈 때마다 주변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이 잔뜩 쏟아져서야 뻔뻔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도코와 시온이 있고, 다른 골드 세인트들은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드러내 주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원래 텐마는 활동적인 성격이다. 한곳에 머무르기보다는 이곳저곳 쏘다니는 게 적성에 맞았다. 덕분에 이런 상황에서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니, 답답함을 느끼는 건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
“텐마!”
타이밍 좋게 이름이 불려와 텐마는 뒤를 돌아보았다. 세이야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오고 있다. 텐마는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의 소년을 보고 조용히 숨을 물어 죽였다.
단순히 호기심일까,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에 대한 애정인 걸까. 세이야는 이것저것 텐마에게 신경 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굳이 순위로 따지자면 두 번째일까. 참고로 첫 번째는 사라다. 전혀 그럴 성격이 아닐 것 같은 데 가끔 보이는 행동은 굉장하다. 특히 세이야와 같이 있을 때가. 뭐, 그건 세이야가 동생이라 그렇겠지만.
“뭐 하고 있어?”
“……별로, 아무것도.”
무심코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말을 내뱉고 나서 텐마는 스스로도 놀랐지만 다행히 세이야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평소와 다르게 히죽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놀러 가자!”
“…………응?”
“자! 빨리!!”
텐마가 거부를 말할 틈은 조금도 없었다.
끌려 온 뒤에는 일단 옷부터 벗겨지고 다시 입혀졌다. 이번에는 거부는커녕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그나마 자신을 휘두르는 상대가 남자라서 다행이었다. 만약 여자였다면 정말로 죽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중간부터 사라가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진짜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옆에서 슌이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든 게 끝났을 때 텐마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
솔직한 칭찬의 말에 텐마는 전혀 솔직하지 못하게 별로, 라며 불퉁하니 대답을 되돌렸다. 지금 태도는 별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느닷없이 끌려와 사정 하나 듣지 못하고 갑자기 옷을 전부 갈아입혀 진다면 누구나 이런 반응일 테니까.
어린애 같은 태도에 주변에서 쓴웃음을 보내온다. 하지만 정작 칭찬을 한 당사자, 사라만은 개의치 않은 태도로 이쪽의 옷매무새를 봐주고 있다. 이래서야 완전히 자신만 나쁜 녀석이 아닌가.
“불편한 데는?”
“……없어.”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말에 이번에는 어조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거기에 답해 사라가 희미하게 웃는 것이 가슴에 찔린다.
현재 텐마가 걸치고 있는 옷은 튼튼한 것만이 장점인 훈련복이 아니라 이 시대의 의복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이야의 옷을 빌렸다. 얼굴만 비슷한 게 아니라 체격까지 비슷한지 사이즈에 별다른 여유가 없는 것이 굉장히 미묘하다.
200년의 세월이 있지만 의외로 기본적인 구조는 비슷했다. 성장(盛粧)이 아니라 평상복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불편함 따윈 미진도 느끼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평소에 걸치던 옷과 재질이 다르기 때문에 위화감이 있는 것 정도지만 이 역시 대단한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시험 삼아 몸을 움직이면 상상 이상으로 편했다.
자신의 움직임을 보고 사라가 눈을 가늘게 뜬다. 갈색 눈동자에 선명하게 온기가 머무르고 있다. 사실 슌이나 시류나 효가도 비슷한 시선을 던지고 있지만 이건 모른 척하기로 한다.
“다행이네. 그럼 갈까?”
사라의 말에 세이야가 즐겁게 목소리를 높였다. 낮은 웃음들이 깨졌다. 여기서 어디를? 라고 묻는 건 꽤 촌스러운 일이다. 이제 와서 싫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다. 결국, 텐마는 포기라는 단어를 몸으로 깨우치고 얌전히 남매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커다란 한숨만이 하나 바닥에 떨어졌다.
결론만 말하자면 텐마는 자신을 밖으로 데려가 준 것만으로 세이야들의 무례를 용서하기로 했다.
제아무리 무감각한 사람이라도 세계가 완전히 변해버렸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건 텐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성역에만 있어 잘 몰랐지만 밖의 세계는 텐마가 알고 있던 세계와는 전혀 달랐다. 길도, 건물도, 사람들도, 사소한 물건 하나하나까지도. 마치 다른 세상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이 경우는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이 맞긴 하지만.
유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호기심은 꽤 있는 편이다. 자연스럽게 주변에 정신을 빼앗기고, 신기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눈을 반짝반짝 빛내거나. 결국 텐마는 중반부터 세이야보다 더 흥분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런 자신에게 슌들이 굉장히 흐뭇하단 시선을 보내고 있어서 그게 부끄러웠다. 아니, 전부터 생각한 건데 이 녀석들 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하고 있는 거 아니냐. 비슷한 또래 주제에.
도중 거리 한쪽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와 텐마는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떤 남자가 처음 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거리의 악사인 걸까. 옆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능숙한 것인지 음악을 잘 모르는 텐마가 들어도 상당히 훌륭하다.
“텐마?”
세이야인가 슌인가, 누군가 이름을 불러왔다. 갑자기 멈춰 선 것이 이상했던 건지도 모른다. 텐마는 대답 대신 시선으로 악사들을 가리켰다. 너무나 쉽게 소년들의 주의가 그쪽으로 향한다.
“거리 연주인가?”
“우와~ 굉장하다!”
“확실히 실력이 좋은데.”
“어라? 이 곡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제목이 뭐였지?”
“글쎄? 가까이 가 보자!”
매우 자연스럽게 세이야가 이미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로 끼여 들어간다. 이렇게 되면 다른 형제들도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텐마는 소년들을 따라가는 대신 거기에 남아 형제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들 사이로 노랫소리가 흘러간다. 낯선 멜로디, 흥얼거리는 듯한 목소리, 상냥한 가사. 녹색 나무와 붉은 장미,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아름다운 무지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득 옆에서 기척이 났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What a wonderful world).”
“응?”
고개를 돌리자 세이야들을 따라간 줄 알았던 사라가 거기에 서 있었다. 시선은 앞을 향한 채로, 동생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상냥함이 흘러넘친다. 텐마는 무심코 넋을 잃을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사라가 계속 말을 잇는다. 혼잣말인 듯, 마치 노래를 따라 부르기라도 하는 듯.
“이 노래 제목이야.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텐마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노래가 거의 끝나 가는지 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구경꾼들의 제일 앞에서 세이야가 소리 높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다른 형제들이 막내를 보며 즐겁게 웃는다. 그 뒤로 어렴풋하게 바다가 보였다. 햇빛이 수면에서 은색으로 부서졌다. 눈부시게 반짝임이 흩어졌다.
여기는 자신이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자신이 알던 것과 완전히 같은 세계. 이리도 덧없고, 단편적이며, 그럼에도 온화한. 필시 변하지 않을 일상의 조각.
텐마는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 그러네.”
어느새 노래는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사랑의 노래. 연주에 푹 빠져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세이야들을 보며 텐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세이야들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아론과 사샤와 마리아들이 떠올랐다. 친구이자 가족,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 지켜야 할 대상, 잃을 수는 없는 것. 필시 저들도 자신들과 같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겠지. 그건 흐뭇하고 보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슬쩍 곁눈질을 하자 무아몽중(無我夢中)으로 세이야들을 살피고 있는 사라가 시야에 들어왔다. 텐마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들이라 귀여워하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봐도 사라가 하는 건 이미 일반적 누나와 팔불출의 경계선상에 있는 느낌이다. 이거, 신고 안 해도 괜찮을까.
사실 당사자인 세이야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텐마가 뭐라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자신이 당사자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는 말이다.
묘하게도 사라는 자신을 향해 세이야들에게 보내는 것과 비슷한 시선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텐마는 그것이 자신을 때때로 답답하게 만드는 원인이란 걸 알고 있었다.
성역의 사람들은 친절하다. 갑작스러운 불행에 휘말린 자신을 배려해주며 신경 써주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도코나 시온과 같은 친밀함은 없다. 당연할 것이다. 어쨌건 자신은 곧 돌아갈 사람이니까.
세이야들과 지내는 건 즐겁다. 같은 또래이기도 해서인지 죽이 잘 맞는다. 자신과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세이야라면 말할 것도 없다. 덕분에 도코나 시온 정도로 친해지는 덴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역시 이상하진 않다. 원래 또래끼리는 쉽게 친해지는 법이다. 그러니 여기 떨어진 게 자신이 아니라 야토였어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겠지.
하지만 사라는 다르다. 어째서인지 사라는 처음부터 자신을 동생들을 대하는 것처럼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그것도 제법 노골적으로. 그러니 이상하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원래 사람을 돌보기 좋아하는 성격인가 싶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다른 골드 세인트들에게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명백했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에게는.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고 신경 쓰였다. 아니, 그저 익숙하지 않아 불편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아원에서도 항상 돌보는 입장에 있었던 텐마에게 있어 누군가 자신을 돌봐준다는 것은 매우 낯선 일이었다. 실제로 텐마가 보살핌을 받았던 것은 아주 옛날,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밖에 없다. 그래, 아직 어머니가 살아있던 어린 시절─
‘……하지만.’
자신은 가족이 아닌데. 사라의 동생은 따로 있는데.
싫은 것은 아니다. 조금 쑥스럽긴 해도 누군가 자신을 신경 써준다는 게 싫을 리가 없다. 다만 순수한 의문만이 남아있다. 도대체, 어째서, 왜.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응?”
깨달으면 부지불식간에 의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의아한 듯 사라의 시선이 달라붙는다. 텐마는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새하얀 돌 위로, 익숙하지 않은 신발을 신은 자신의 발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잖아. 나, 당신 동생도 아닌데.”
“……귀엽다는 이유는 안 돼?”
“……뭐야, 그건.”
쭈뼛쭈뼛 시선을 올리면 사라가 웃었다. 이제까지보다 훨씬 선명하게. 마치 세이야들에게 보내는 것처럼.
“그냥 동생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건 별로 상관없는걸. 저 아이들도 갑자기 생긴 동생이고.”
“……랄까, 이미 동생이 잔뜩 있잖아.”
“그러니 이제 와서 한 명 더 생겨도 아무 문제 없어.”
사라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불어와 갈색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그 속에서도 담백한 얼굴은 어딘지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텐마는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사라를 따라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귓가에 조곤조곤, 나지막한 목소리가 닿았다.
“동생에게 잘해주는 게 별로 이상할 것도 없잖니.”
아아, 그렇구나. 사라의 행동은 그녀 자신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구나. 겨우 이해하고 안심한 텐마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럼 편애하지 말고 아리에스도 좀 신경 써주면 좋을 텐데.”
“……텐마야말로 도코를 좀 더 신경 써주는 게 좋지 않을까.”
“……………….”
“……………….”
여기서 더 따져봤자 자신에게 유리한 건 없었기에 텐마는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상당히 찔리는 부분은 많은데 반박할 말은 없다. 아니, 뭐, 제대로 형제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
다시금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다 냄새가 닿았다. 저쪽에서 노랫소리가 밀려들어 온다. 중간중간 끊어질 듯, 그럼에도 상냥하고 부드럽게. 웃음소리가 사이에 섞여 하모니를 이룬다. 어쩐지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툭, 두 번째로 본심이 떨어졌다.
“……저기, 나도 누나라고 불러도 돼?”
흠칫, 사라가 놀라는 기척이 났다. 즉각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텐마는 긴장해서 숨을 삼켰다. 수 초, 침묵이 이어지고 간신히 사라가 입을 열었다.
“텐마.”
“……왜.”
“얼굴이 새빨개졌어.”
“……읏! 시끄러워! 그런 거 일부러 말하지 마!!”
무심코 소리를 지르자 사라가 히죽 웃는다. 놀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게 왠지 분해서 텐마는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달아오른 목덜미가 홧홧했다. 젠장, 괜히 말했어.
“텐마! 누나!”
타이밍 좋게 세이야들이 돌아왔다. 실컷 즐긴 것인지 얼굴에 만족감이 가득하다. 였지만 그 얼굴도 텐마와 사라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공기를 감지하고 곧 이상한 듯 바뀌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텐마는 부정하려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부질없게도 사라가 말을 꺼내는 게 더 빨랐다.
“텐마가 귀여운 얘길 해서.”
“헤??????”
“자, 잠깐!! 말하지 마!!!”
간절히 부탁했지만 사라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동생들에게 자신들이 했던 얘기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완전히 무시 상태다. 귓가에 아까의 대화가 되새겨져 목덜미가 다시 달아오른다. 젠장, 역시 괜히 말했어(두 번째).
텐마는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세이야들은 완전히 희희낙락한 상태다. 저 입을 어떻게 막을 수 없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데 갑자기 세이야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눈동자가 심히 부담스럽게 반짝인다. 텐마는 무심코 몸을 뒤로 뺐다.
“나도!”
“응?”
“나한테도 형이라 불러!”
“응????”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싶었지만 다행히 이쪽은 사라가 태클을 걸어주었다(이제 와서!).
“어머, 텐마 쪽이 형 아니야?”
“에?”
덧붙여 슌들도 추격해 주었다.
“그보다 세이야.”
“너 우리한테도 형이라고 안 하잖아.”
“그러고 보니 나한테도.”
“시류나 효가는 그렇다 치고 슌까지?!”
“내 쪽이 생일이 더 빠른걸.”
에~, 하고 불만스러운 것처럼 세이야가 표정을 구긴다. 하지만 슌이나 시류나 효가는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계속 세이야를 추궁했다. 아무래도 날을 단단히 잡은 것 같다.
순식간에 뒤바뀐 형세에 텐마는 어안이 벙벙해 멍청히 소년들만 쳐다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사라를 보자 그녀는 익숙한 것처럼 미소가 감도는 눈빛으로 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미소에 이끌려 텐마도 불현듯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소하고 별것 아닌, 친밀하고 편안한 대화. 가족들의 대화.
깨달으면 자신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그 노래였다.
“어서 오세요.”
보호자가 있다는 것을 핑계로 해가 지고 난 뒤에도 늦게까지 놀다 돌아온 텐마들을 반겨준 건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는 아테나와 묘하게 지쳐 보이는 도코와 시온이였다.
설마 아테나가 성역에 돌아왔던 줄 몰랐던 소년들, 특히 이 시대의 아테나와는 처음 만나는 텐마는 무척이나 놀랐다. 어느 정도냐면 무심코 시온이랑 도코에게 확인했을 정도로.
“……아테나?”
떨떠름하게 묻자 둘이 네 맘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백 수십 년 전의 사샤를 알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었다.
“어머, 세 사람 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긋, 아테나가 우아하게(그러나 무섭게) 웃었다. 텐마는 무심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곧 온화하게 바뀐다. 언젠가 텐마가 곧잘 보곤 했던 미소로.
“……설마 지금 텐마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 텐마는 못 말리겠네.”
“……이번엔 내가 뭔가 한 게 아니거든?”
바뀐 말투에 텐마는 자연스럽게 퉁명한 대꾸를 돌려주었다. 잠깐 정적. 한 박자 뒤 소꾸친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시온과 도코가 뒤에서 흐뭇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가기 전까지의 짧은, 하룻밤의 유예.
푹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남자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코스모인지 뭔지를 몰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사라는 거기엔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앞에 있던 종이가 펄럭거렸다. 이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 서류를 보고 있지 않은지도 오래됐다.
“……그렇게 아쉬운 건가.”
더는 그런 자신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건지 남자들 중 누군가 입을 열었다. 노골적인 질문에 사라는 추욱 어깨를 늘어트렸다.
“당연히 아쉽죠. 이제 텐마가 누나라고 부르는 걸 못 듣게 된다니.”
“……아쉬운 건 그쪽이냐.”
어처구니없다는 미로의 중얼거림은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겨우 친해졌는데 헤어져야 한다니까 세이야들도 아쉬워하고.”
“만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카논이 불퉁하니 딴지를 걸었지만 이것도 못 들은 척한다. 아니, 친해지는데 시간이 무슨 상관인가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내버려 뒀다간 또 대판 싸우리라 생각했는지 사가까지 끼어들었다. 사라는 얄미운 남자를 몰래 흘겨보았다.
사라도 잘 알고 있었다. 텐마는 자신들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방법이 없다면 또 모르지만 돌아갈 수 있음에도 여기 남아있는 건 옳지 않다. 본인이 돌아가는 걸 바라고 있는 데다 그것이 숙명이니까. 안타깝게도 페가수스의 세인트는 일반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기 어려운 모양인지 매우 힘들고 괴롭겠지만, 그래도.
그래, 사라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사가가 일깨워주지 않더라도. 그러나 언제나 말했든 이성과 감정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마치 지금처럼.
“……사가는 여자에게 인기 없을 것 같네요.”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아뇨, 역시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란 걸 느꼈다고 할까요.”
“……????”
화가 났다거나 황당해 하기보단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의 사가를 보고 사라는 코끝으로 웃었다. 별로 처녀좌의 모 씨처럼 타인을 괴롭히는 취향은 없지만 평소 재미없는 표정만 짓는 남자의 저런 얼굴을 보는 건 내심 즐거울지도 모른다.
“음, 확실히. 그러니 사라. 샤카에게 넘어가선 안 돼.”
“……느닷없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아이오로스. 아니. 그보다 툭하면 샤카를 끌어들이지 말아주세요.”
이쯤 되면 샤카가 계속 자신에게 관여하는 건지 다른 사람들이 억지로 자신들을 묶어두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오로스에겐 그런 자각이 없는지 계속 샤카의 유해함을 설교하고만 있다.
“아니, 네가 모처럼 말했으니까. 역시 남자는 성격이니 이왕이면 아이오리아 같은…….”
“쓸데없는 사족이 붙었습니다, 아이오로스.”
“정말이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사가, 서로 사이좋게 잔소리를 하는 건지 싸우는 건지 모르겠는 아이오로스와 므우, 엉망진창인 상황에 폭소하는 카논, 이 모든 걸 보며 전갈 주제에 해탈한 얼굴의 미로를 뒤로한 채 사라는 아까완 다른 이유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끄러운 남자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쌌다. 하늘을 보니 벌써 늦은 밤이다. 저 사람들 아직도 떠들고 있으니 오늘은 야근 확정이네.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엔 자업자득이니 동정하지 않기로 한다. 물론 자신은 정시퇴근이다. 한번 아팠더니 이렇게 편하다.
문득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복도 한가운데 누군가 서 있다. 곧 어슴푸레한 불빛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텐마.”
이름을 부르자 소년이 이쪽을 돌아봤다. 텐마가 반색한다.
“얘기는 끝났어?”
자연스레 같이 걷기 시작하며 묻자 텐마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매우 기뻐 보인다. 오랜만─이라고 해도 고작 며칠만이지만─에 소꿉친구를 본 게 기쁜 모양이다. 이해 못 할 것도 아니건만 불쑥 심통이 났다.
“……무척 좋아하는구나.”
“……? 갑자기 왜…….”
“아니, 텐마는 우리랑 헤어지는 걸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불만을 흘리자 텐마가 입술을 삐죽였다. 기분 탓인지 소년의 목덜미가 붉다.
“……나도 모두랑 헤어지는 게 안 아쉬운 건 아니거든?”
뜻밖의 반응에 사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다물었다. 무섭다, 츤데레. 예전에는 이런 걸 왜 좋아하나 싶었는데 직접 당해보니 파괴력이 장난 아니다. 세이야처럼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도 좋았지만 텐마의 츤데레도 버리기 어렵다. 아, 역시 사오리 씨의 힘을 빌려 사진이랑 비디오를 잔뜩 찍어 뒀어야─
“……텐마, 그런 식으로 멀어지지 말아줄래? 내가 꼭 변태가 된 것 같잖니.”
“아니, 지금 매우 불쾌한 기척이 느껴져서…….”
그놈의 코스모. 평소에는 참 유용해 보이는 데 이럴 때는 방해도 이런 방해가 없다. 사라는 속으로 혀를 차며 억지로 대화 주제를 바꿨다. 텐마가 세이야처럼 단순한 성격이라는 게 참 위로가 된다.
“그러고 보니 텐마. 세이야들이 오늘 밤은 다 같이 자자고 말하던데.”
“……에? 뭐야, 그거.”
“수학여행 기분을 내고 싶은가 봐.”
“수학여행??”
“어디서, 어떻게 잡아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잇키까지 끌고 왔으니 도망치진 못할 거야.”
“잇키는 또 누구????”
“자, 그럼 갈까─”
“잠깐! 누나! 아까부터 내 얘기 전혀 안 듣고 있지 않아?!”
장난을 담아 텐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걷는 속도를 높이면 텐마가 허둥지둥 뒤따라 왔다. 사라는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다른 골드 세인트들에겐 무서워서 못 하지만 텐마에게라면 이 정도 장난은 용서될 거라고 믿는다. 결국은 남매니까.
마지막 밤, 두 사람은 형제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날 많은 얘길 했기 때문인지 이별은 의외로 건조했다. 보기와 달리 감수성이 풍부한 효가가 눈물을 보이긴 했지만 그건 상정범위 내였고. 도코와 시온도 쓴웃음을 지었을 뿐 그 밖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살아온 어른들이니 이별의 슬픔에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사라는 그저 ‘건강해.’ 라고 짧은 말만을 내뱉었다.
완전히 돌아가기 전, 텐마는 딱 한 번 돌아보았다.
“나, 누나랑 모두랑 만나서 기뻤어. 도코랑 시온도. 나한테는 오랜만이 아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고.”
소년의 미소가 햇빛에 부서져 눈부시다. 그에 사라는 완벽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여기서 대답을 해줘야 할 텐데, 온갖 마음이 터져, 대답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침묵이 점점 무거워진다.
말을 마친 텐마는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 텐마를 대신 불러 세운 건 세이야였다.
“……텐마! 또 봐!”
놀란 텐마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하지만 곧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소년들의 주먹이 서로 가볍게 부딪혔다. 주고받는 미소가 참 예쁘다. 그 훈훈한 광경을 보고 사라는 어쩔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역시 카메라가 있어야…….”
“……누나, 마지막 정도는 제발.”
조그만 중얼거림을 용케 알아듣고 시류가 간절히 애원한다. 사라는 동생의 바람에 부응하는 대신 약간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머, 괜찮지 않니.”
왜냐하면,
다시 텐마가 망설임 없이 걸어나갔다. 마치 마법처럼 소년의 모습이 사라진다. 무엇보다 선명하게. 그럼에도 아까처럼 답답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했다.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대화로 사라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분명.
다시 만날 테니까,
“이게 마지막이 아니니까.”
언젠가 먼 시간의 끝에서.
덤 1.
“……그러고 보니, 사라. 텐마가 사라를 보고 누나라고 불렀죠.”
“아, 그렇게 부르고 싶다고 해서요. 왜요?”
텐마가 돌아가고 며칠 뒤 어느 날, 갑작스러운 므우의 질문에 사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문이 좀 때늦은 감이 있는 건 그렇다 치고 왜 그 얘기를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눈치가 빨랐던 므우는 사라의 의문을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헛기침만 했다.
“므우?”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역시 영문을 모르겠어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아이오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므우도 누나라고 부르고 싶은 거겠지.”
“……네?”
깜짝 놀라 므우를 보자 그가 어색하니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정답인 것 같다. 덩달아 어색해져 사라는 뺨을 긁적였다. 뭐야, 그런 거라면─
“별로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는데요.”
“……정말입니까?”
“네. 뭐, 호칭이야 본인 맘이죠.”
전에 누나라고 불렀을 때 질색한 경력이 있긴 했지만 그건 넘어가기로 한다. 이젠 누나라는 호칭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이상한 호칭도 아닌데 굳이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이 연상이니까 누나라는 호칭이 그렇게 문제인 것도 아니고…….
아니, 문제인가? 이거 혹시 캐붕인가? 실제로 그렇게 불렸을 때 내 정신은 남아날 수 있는 건가? 이거, 카논이 누나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큰 문제 아냐? 나 너무 성급했나? 어쩌면……!
“사라, 그렇다면 나도 오빠라고……!”
“싫어요.”
“즉답?!”
아이오로스의 절규는 불행히도 생각에 빠져 있는 사라에게는 도달하지 않았다.
덤 2.
무엇이 불만인지 남자가 느닷없이 펜을 내던졌다. 무척 황당하고 버릇없는 행동이었지만 슬프게도 주변 사람들은 그걸 지적하지 못했다. 그건 그들에게 지은 죄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나 생기가 넘치던 남자의 얼굴이 지금은 지독히도 무기력했다. 남몰래 여성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던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비색 눈동자도 지금은 칙칙하게 죽어 있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성역의 영웅, 아이오로스를 떠올릴 수 있을까. 아마 동생인 아이오리아에게도 무리일 것이다.
회생 불능인 전우의 모습에 사가는 한숨을 삼키며 사라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좀 해라는 신호였지만 슬프게도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모든 일의 원흉인 주제에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아이오로스의 우울한 기운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서류를 보고 있는 중이다. 괜히 그 샤카에게 얽히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다. 결국 사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 슬슬 아이오로스에게 오빠라고 불러주는 게 좋지 않을까.”
“에, 싫어요.”
즉답에 저편에 있던 아이오로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일단 사가는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
조금 지친 어조로 묻자 사라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슬프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한 점의 악의도 없었다. 차라리 악의가 있었다면 실컷 원망이라도 하련만.
“……그렇지만, 이때까지 가깝게 지내던 연상의 남성이 없어서 오빠라는 호칭은 어색한걸요. 처음부터 그랬으면 모를까 이제 와서 바꾸기도 좀…….”
뭐, 사라의 심정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가는 더 이상 사라와 아이오로스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아이오로스가 오빠라고 불리든 말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저렇게까지 고장 나 있으면 일이 줄어들지 않아서 곤란했다. 아무리 그래도 과로사로 죽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다.
그때,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던 카논이 불쑥 끼어들었다.
“사라.”
“네?”
“오빠라고 불러 봐.”
“카논 오빠.”
잠시 시베리아의 추운 바람이 모두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기가 쨍 얼어붙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사가는 한숨을 내쉬고 주변에 있는 걸 뭐든 집어 던질 아이오로스와 그에 피하지 않고 응대할 카논에게 말려들지 않기 위해 척척 서류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 모든 행동이 익숙해졌단 사실이 매우 슬펐다.
쓰면서 왜 이렇게 폭주하고 있지, 라고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