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데프텐]상냥한 달 (3)
텐마에게 끌려가며 데프테로스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이 섞여들어, 머리가 어지러워져, 그래서 오히려 차분해지는 느낌. 자신을 먼 곳에서 관조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냉정하게 의문만이 입을 연다. 어째서 너는 나를 감쌌나, 어째서 그 말을 듣고도 나를 믿나,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 상냥한가. 수많은 질문. 그러나 결코 답을 알 수 없는.
불현듯 텐마가 걸음을 멈췄다. 좀처럼 사람이 오지 않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장소다. 간신히 손이 떨어졌다. 조그만 뒷모습이 흔들린다.
데프테로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가느다랗게 드러난 목덜미, 제 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얄팍한 어깨. 어찌 이리도 작고 여린지. 감상은 언제나 같았다. 하지만 매번 거기에 여러 감정이 덧칠되었다.
텐마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고요하게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한 줌의 시간이 지나가고 자신인지 텐마인지, 누군가 한숨을 흘렸다. 초조함에 재촉당해 데프테로스는 무어라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텐마가 움직였다.
“제기랄!!”
욕설과 함께 가면이 호쾌하게 내던져진다. 그 기세가 너무 흉흉했던지라 데프테로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고 말았다. 설마,
‘화났나?’
정답이었다.
휙 뒤돌아본 텐마가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이쪽을 노려봤다. 원래 동글동글한 얼굴이라 화내봤자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박력이 넘쳤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데프테로스는 아주 약간이지만 겁을 먹었다. 이건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스물다섯의 남자가 고작 열셋의 여자애에게 겁을 먹다니.
“당신 바보야?!!”
처음부터 매도가 쏟아진다. 워낙 서슬이 퍼런지라 데프테로스는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당신 나보다 강하잖아! 그런데 뭘 멍청히 맞고만 있어!! 뭐하러 그딴 말을 계속 듣고 있던 거야!!!”
“그야, 사실이니까…….”
“닥쳐!!”
명령에 따라 데프테로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텐마가 씨근덕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붉은 눈동자가 부풀어 오른다고 생각한 찰나 눈물이 새하얀 뺨 위로 흘러내렸다. 이 고집 센 아가씨가 처음 보이는 눈물이라 데프테로스는 아까보다 더 경악했다.
“……텐마?”
조심스러운 부름에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얼굴을 파묻고 물기 어린 말을 밑도 끝도 없이 쏟아낼 뿐이었다. 데프테로스에겐 그 모습이 스스로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뭐야……. 흉성이니 뭐니, 난, 그런 거, 모른다고……. 도대체 그런 걸, 누가, 정한 거야…….”
아픈 말이 이어진다. 데프테로스는 어설프게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대신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언이 그리 말했다.”
“그런─!”
퍼뜩 텐마가 고개를 든다. 눈물 때문에 얼굴이 엉망이다. 코끝도, 눈가도 새빨개졌다. 정말로 잘 우는구나. 데프테로스는 마치 남 일인 것처럼 생각했다. 동시에 다시 의문이 가슴 속에 내려앉았다. 너는 어째서─
텐마가 상냥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상냥함이 죄인에게까지 미쳐야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닐 터인데. 얄팍한 기만은 이미 깨져버렸고, 추악한 진실은 이미 입을 벌리고 있다. 남은 건 언제나와 같이 조용한 체념뿐.
그러니 너에겐 더 이상 나를 감쌀 이유가 없을 터다. 내가 흉성인 이상. 그런데 어째서─
그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텐마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니야.”
끝없는 눈물에 젖어,
“예언이니, 흉성이니……, 그런 거, 난 하나도 모르지만.”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당신이 아무 죄도 없다는 건, 당신이 상냥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언제나 사람을 꿰뚫는 눈동자.
텐마가 실컷 울어준 덕분인지 데프테로스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생각이 하나로 모인다.
자신이 흉성이라는 전제엔 변함이 없다. 소녀의 부정(否定)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자신의 어디가 상냥한 것인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이 있었다. 좀처럼 생겨날 리 없는 자신의 바람. 그저 네가 울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데프테로스는 어설프게 소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조그만 몸이 품에 들어온다. 가는 어깨가 잠시 딱딱하게 굳었지만 곧 텐마가 가슴께에 얼굴을 묻었다. 옷자락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훌쩍거림 속에서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부탁, 이야……. 포기하지, 마…….”
무엇을? 알 수 없었다. 필시 텐마에게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이 대답으로 네가 울음을 그칠 수만 있다면. 데프테로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후로도 소녀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데프테로스는 한참이나 텐마를 껴안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네가 틀렸다.
이제는 생을 다해, 별 의미가 없는 형제의 육신을 내려다보며 데프테로스는 멍하니 생각했다.
네가 틀렸다. 내게 죄가 없다 말했던 것도, 나를 상냥하다 말했던 것도, 전부 틀렸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 리가 없다. 내가 원죄이니까, 내가 있으니까, 그러니 이 모든 일이 생겨난 거다.
오직 나 하나 때문에.
멍청하게 환상에만 붙잡혀, 앞을 보지 못하고, 그저 알면서도 모른 척, 형이 만들어준 세계에만 있으려고 했기에. 그런다면 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 생각해서. 삐뚤어진 열등감이 시키는 대로 인형처럼 얌전하게. 그것이 자신의 죄.
아스프로스의 얼굴에선 더 이상 표정을 찾을 수 없었다. 혼이 없는 몸은 이미 무기질이라. 문득 허탈감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충동이 찾아온다. 이대로 자신도 끝내버릴까. 어차피 자신의 삶을 바라는 자도 더는 없으니.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쉬울 것 같았다. 아주 잠깐, 잠깐이면. 그러나─
「포기하지 마.」
언젠가의 약속이 떠올라 데프테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텐마가 포기하지 말라던 게 무엇인지 데프테로스는 여전히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속을 어길 순 없다. 그녀와의 약속이니까, 그 무엇도 아닌 자신으로서 맺은 약속이니까.
그래,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다. 아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하는 일도 남아있었으므로. 이번에는 형을 위해서.
“미안하구나……, 데프테로스.”
조용한 사죄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프테로스는 조심스럽게 형의 사체를 안아 들었다.
“당신이 사과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주고받는 문답은 의미 없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나아갈 일은 하나뿐이고, 결심은 이미 섰으니까. 먼 과거처럼, 그러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렇다면 그 제미니의 크로스 네가 가져가거라. 지금은 입을 마음조차 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 때는 반드시 온다. 너 자신의 싸움이 말이다.”
데프테로스는 멈칫 골드크로스를 내려다보았다. 눈 부신 빛. 형이 노력해 간신히 손에 넣었던 것. 그것은 바꿔 말하면 자신이 그러도록 강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이런 걸 바란 적은 없었다. 바라서는 안 되었다. 자신은 계속 그림자로만 있으려 했으니까.
하지만 세이지의 말은 옳다. 이 힘은 언젠가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형을 위하여. 때문에 데프테로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교황의 거처를 걸어나갔다.
“데프테로스!!”
성역을 나가려던 도중 이름이 불렸다. 돌아보니 텐마가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 것인지 항상 높게 묶었던 머리카락이 풀어 헤쳐져 있고 옷차림도 잔뜩 흐트러져 있다.
모른 척하고 싶었으나 데프테로스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곧 가까이 다가온 텐마가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다행이다……. 아까,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뭔가 기척도 이상했고, 그래서 당신을 찾았는데 어디에도 없어서……!”
소녀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울음이 깃들어 있었다. 데프테로스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의 가면을 벗겨냈다. 달빛에 흐릿하게 맨얼굴이 드러난다. 예상대로 텐마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쿡, 마음의 어딘가가 쑤셨다. 하지만 데프테로스는 예상보다 쉽게, 너무 간단하게 그 표정과 마주할 수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다. 불현듯 모든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텐마의 안색이 바뀌었다. 원체 감이 좋은 녀석이다. 이미 모든 것을 예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듬더듬 입술이 열렸다.
“……이걸로, 마지막이야?”
텐마가 헐떡였다. 데프테로스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고도 없이 소녀의 눈동자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역시 예상대로다. 데프테로스는 달빛에 희미하게 빛나는 물방울을 바라보다, 이번에야말로 용기를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스친 부분이 뜨거운 열을 품었다. 어쩐지 쓴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게 너에게도 좋을 것이다.”
나지막이 속삭이면 즉각 거부의 반응이 돌아왔다. 텐마가 격렬하게 고갯짓을 했다. 손이 다급하게 옷자락을 붙잡고, 언제나 강하기만 했던 어깨가 잔약하게 떨린다.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창백하게 질린 입술이 빠끔거렸다. 하지만 데프테로스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형이 그렇게 된 것은 자신 때문이다. 자신이 없었다면 형은 언제나 강하게,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사태에 이르진 않았겠지.
그래, 전부 자신 때문이다. 자신이 있으면 다른 모두를 망친다. 자신과 있으면 텐마도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다. 아직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미래엔 반드시. 허나 그것만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 설령 자신이 무슨 아픔을 겪더라도. 형과 달리 텐마에게 그런 미래가 오는 건 아직 막을 수 있으니까.
텐마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마치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는 듯. 데프테로스는 웃으며 마지막으로 상냥하게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모든 미련을 버리고,
데프테로스는 텐마의 기억을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