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11 오늘은 내가 요리사
살아가다 보면 누구든 실수를 하게 되는 법이다. 제아무리 범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천재라 하더라도 살아가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는 법. 그러니 실수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무언가를 배우고, 개선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언제나 발전해 왔다.
또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이다.
허공에서 봉지의 잔해가 바사삭 흩어졌다. 다음으로 그 안에 들어있던 물체가 중력의 법칙에 의해 땅으로 끌려들어 갔다. 전부 머핀이나 파이 같은 달콤한 디저트류다. 중간에 그것들을 잡으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조그만 손은 헛되게 공기를 갈랐다. 돌계단 위로 떨어진 빵이 흙먼지와 함께 아래로 도르륵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광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주제에 잡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보고만 있던 미로는 속으로 외쳤다. 망했다.
말해서 무엇하랴. 미로는 다시금 사고를 치고만 것이다. 거나하게, 혹은 사소하게.
시작은 사소했다.
여느 때처럼 천갈궁을 지키고 있었는데 효가가 이곳을 지나가고자 했다. 때마침 심심하던 미로는 효가에게 가볍게 장난을 걸었다. 별로 미로에게 악의가 있던 것은 아니다. 이전에 싸우면서 서로를 인정한 사이고 동시에 친우의 제자다. 때문에 미로는 브론즈 세인트 중에서는 효가를 제일 친밀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장난 정도야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장난(혹은 실랑이)을 하다 보니 정신이 팔려 올라오고 있던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효가가 피한 스칼렛 니들(최소출력)이 상대가 들고 있던 봉투에 맞았고, 지금에 이르게 된다.
여담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미로가 보지 못한 상대는 혹시 성역 안에서 사가 다음으로 불행한 인물이 아닐까, 하고 모두가 남몰래 추측하고 있는 사라였다.
이미 전과가 잔뜩 있던 미로는 부들부들 떨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사라와 함께 아이오로스도 있다. 즉, 현행범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피해가 빵에 한정됐다는 것 정도일까. 저번에 다리를 다쳤을 때도 별다른 말이 없었으니 어쩌면 이번에도─ 라고 미로가 생각한 순간 할리우드 액션으로 사라가 좌절했다.
“내, 빵이…….”
마치 없던 자식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슬픈 목소리라 미로는 무심코 태클을 걸고 말았다.
“저번에 다리를 다쳤을 때도 아무렇지 않더니 무슨……!”
“……다리를 다쳐?”
“헉?!”
생각 없이 외친 말에 사라보다 먼저 아이오로스가 반응한다.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미로는 두 번째로 망했다를 외쳤다. 후회해봤자 언제나 늦은 법이지만.
곁에서 효가가 툭툭 옆구리를 쳤다. 미로는 방긋방긋 웃는 채로 입만 움직여 ‘나중에 보자.’라고 말하는 아이오로스에게서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효가의 눈동자에는 연민이 가득했다. 어지간하면 표정이 변하는 일 없는 소년이 참으로 안됐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어쩐지 열 받았다.
“일단 제대로, 열심히 사과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왜.”
괜히 부루퉁해져서 반박하자 효가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이유를 들기 시작했다.
“왜냐니. 누가 봐도 당신이 잘못한 게 분명하고.”
“큭…….”
“게다가 내가 알기로 지금 누나는 삼일 철야를 한 상태라서 뭘 제대로 먹는 게 아까 그게 삼일만이었을 거고.”
“켁…….”
“그리고 내 짐작이 맞는다면 아까 그거 분명 세이야랑 시류가 사다 준 거일 텐데.”
“……진짜냐.”
아무래도 사망 플래그가 뜬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효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 것도 아니라 아이오로스가 이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 점점 짙어지는 남자의 미소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영웅이니 뭐니 해도 본질은 결국 동생을 무척이나 아끼는 형이란 말이지.
미로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여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아테나, 부디 끝까지 곁에서 모시지 못하는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설마 성전에서가 아니라 동료의 손으로 이 목숨이 다시 스러지는 일이 있을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이야.
물론 사오리가 이 사실을 알아봤자 아이오로스를 말리긴커녕 손이나 열심히 흔들고 말았겠지만 미로는 진지했다. 이 와중에도 사라는 계속 흐느끼며 내 빵……,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가로시되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서 평소엔 원수, 지금의 미로에게만은 구원자인 샤카가 올라왔다.
“너희,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느냐.”
평소와 같은 목소리지만 말끝에는 어쩔 수 없이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에 아이오로스와 효가의 고개가 돌아가고, 미로의 안색이 변하고, 사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분위기가 묘해진다. 여기서 아무 말이나 대꾸할 수 있던 용자는 없었다.
질문에 대답 대신 기묘한 침묵이 돌아왔지만 샤카는 딱히 모두를 추궁하지 않았다. 다만 전체적 상황을 한 번 더 쳐다보고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덕분에 미로는 조금 우울해지고 말았다. 뭐야, 샤카 녀석이 한 번에 이해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사라를 괴롭혔냐고. 괴롭혔구나. 고의는 아니었지만.
미로는 이때까지 자신이 한 행적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로 했다. 제법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언제 반성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반성하는 행동 자체가 중요한 것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사라.”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조금은 달짝지근하게 샤카가 사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사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 밑이 퀭하고 손끝에까지 피로감이 묻어있는 걸 보니 철야를 했다던 효가의 말이 거짓은 아닌가 보다.
“처녀궁에 오지 않겠느냐. 달콤한 것이라면 언제나 준비되어 있느니라.”
“…………………………그럴까요.”
“잠깐…!!”
심지어 철야의 대가로 영혼의 일부마저 팔아버렸는지 샤카의 초대를 덥석 승낙하기까지 한다. 그제야 아이오로스가 허겁지겁 끼어들었지만 늦은 감이 있다. 사라는 이미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샤카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까워진 사라의 팔을 잡고, 고작 먹을 걸로 사람을 꼬신 신에 가장 가까운 남자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에 대응하여 포기를 몰랐던 사수좌의 남자가 투지의 불꽃을 태운다. 하데스와 싸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추잡한 치정 싸움(?)에 미로와 효가는 한마음 한뜻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건 정말 보고 싶지 않았어!
물론 아이오로스나 샤카나 민간인(사라)을 가운데 두고 싸움을 벌일 만큼 멍청하지 않았으므로 대치는 대치로 끝났을 뿐이다.
샤카는 보무도 당당하게 사라를 이끌고 사라졌다. 아이오로스가 아무리 이를 박박 갈아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대치 끝에 꺼지지 않고 남은 불꽃은 별로 엉뚱하진 않게 미로에게 옮겨붙고 말았다.
“……그럼 나 좀 볼까, 미로.”
“……………………네?”
효가에게 보낸 간절한 SOS 신호가 쿨하게 무시되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달콤한 것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사라를 처녀궁으로 데려간 샤카는 조금도 머뭇거리는 일 없이 단 것을 내왔다. 왠지 사모사 같은 인도 음식을 내올 거라 생각했지만 나온 건 케이크나 파이 같은 평범한, 사라의 취향에 맞는 간식이었다. 심지어는 평소에는 손이 없는 것처럼 타인에게 시키기만 하던 홍차를 직접 타주기도 했다. 허나 그런 사실도 당분 부족으로 반쯤 죽어가고 있던 사라에겐 아무래도 좋은 사항이었다.
먹기 위해 산다기보다는 살기 위해 먹는 것처럼 단 것을 꾸역꾸역 입속으로 집어넣던 사라가 정신을 차린 것은 간식은 두 번, 홍차는 세 번이나 리필하고 난 뒤였다.
‘……망했다.’
망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멍청하게 샤카를 쫄래쫄래 따라온 게 망했고, 샤카에게 이것저것 시켜버린 것 같은 모양새가 망했고, 아이오로스와 미로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온 것도 망했다(여기엔 고의가 조금 섞여 있지만).
개중에 제일 망한 것은 샤카에게 추접스럽고 지저분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보여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지만 그래도 샤카에게 보여주긴 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말이지.
다행히 샤카는 사라의 이런 모습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는 게 즐거운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을 텐데 매번 이런 느낌이다. 덕분에 사라는 가끔 샤카가 사실은 엄청 도량이 넓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조금 허둥지둥 매무새를 정리하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와 어울리는 고요한 시선도 닿았다. 사라는 아무것도 모른 척 입을 싹 닦고 홍차를 들이켰다. 너무 늦은 감이 있긴 있지만. 달아오르는 귀를 숨기기가 어려웠다.
잔을 다 비우고 나자 딴청을 부리기가 어려웠다.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사라는 손끝만 내려 보았다. 잉크와 과자 부스러기가 붙어있는 손이 퍽 더럽다. 그래도 시선을 고정할 게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 사라를 배려하듯 샤카가 다시 홍차를 따라주었다.
“일이 고됐던 모양이구나.”
내용만 들으면 참 평범하고 고마운 말인데 어째 샤카가 말하니까 기분이 묘하다. 허나 그 기분도 잠깐이었다.
사라는 굳어버린 머리를 간신히 움직여 적당한 대답을 찾아냈다. 말 하나 잘못했다가는 성역 전체가 뒤집힐 수도 있다는 건 이미 체득해서 알고 있다.
“갑자기 일이 연달아 터졌으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도와줘서 사가도 저도 살았어요.”
인권 보장 운동이 이런 데서 보답을 받는다. 하긴 이번에 한정에서는 굳이 그러지 않았더라도 다들 도와줬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카오스적인 상황에서 사가까지 폭주했다가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을 정도이니까. 유유자적한 실버 라이프를 보내고 있던 시온과 도코까지─그러나 육체는 18세─ 나섰으니 말 다했다.
“그런가.”
하지만 혼자 아무것도 안 했던 샤카는 사라만 죽을 지경이 아니면 족했는지 심드렁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사실은 좀 찔리라고 말한 것도 있는데. 사라는 들릴락 말락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이 남자에게 뭔가를 바란 내가 죄인입니다.
모든 걸 포기한 채 사라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때 똑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샤카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린 것이다. 신호를 따라 샤카에게 시선을 옮기자 가늘게 열린 눈꺼풀 사이로 푸른색 눈동자가 보였다.
일순 심장이 덜컥거렸다. 자신의 눈동자가 사라에게 제법 먹힌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샤카는 눈을 뜰 필요도 없으면서 종종 이렇게 눈을 떠서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무슨 사냥꾼도 아니고.
“그런데, 사라.”
“……네?”
놀랐던 탓인지 답이 삐끗거리며 나갔다. 그에 샤카가 더욱 진하게 웃는다.
“뭔가 할 말은 없느냐?”
“…………네?”
할 말? 무슨 할 말이 있지? 사라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샤카는 이것저것 오래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다. 그러니 뭔가 있었다고 한다면 아무리 최대로 잡아봤자 근 3~4일 내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사흘 동안 자신은 집무실과 서고에만 처박혀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오늘 점심에 간신히 풀려났고, 근처 마을까지 가다가 세이야랑 시류를 만나서 먹을 걸 받고, 다시 돌아오다가 미로를 만나고, 그러다가 여기에 와서─
‘……아.’
그러고 보니 잔뜩 얻어먹었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샤카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어쨌든 대접을 받은 건 사실이었기에 사라는 고분고분 고개를 숙였다.
“차랑 케이크 감사했습니다.”
“음.”
만족한 것처럼 샤카의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마치 우유를 핥고 있는 새끼 고양이 같은 모습이다. 하기야 본성은 전혀 새끼 고양이 같지 않다지만.
그나저나 이렇게 순순히 넘어가는 게 뭔가 이상한데. 원래 괴짜 고리대금업자처럼 이상한 대가를 요구해야 정상이 아니던가. 뭔가 이상한 믿음이었지만 어쨌든 사라의 심정은 그랬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민해 봤자 샤카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 결국 사라는 이것저것 고민하느니 그냥 스스로 시원시원하게 제 무덤을 파기로 했다. 어쩐지 무덤을 파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묘비를 세우는 지경에 이른 것 같지만 그건 넘어가고.
“……나중에 보답해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자 샤카가 조금 놀란 듯했다. 곧 즐거움과 기쁨이 잔뜩 섞인 얼굴로 변하긴 했지만.
“그렇다면 네가 만들어준 요리가 좋겠느니라.”
“요리, 요……?”
역시 스스로 비석까지 세운 게 맞는 것 같다. 자책하며 사라는 일단 우물쭈물 물러나는 태도를 취했다.
“그다지 잘하지는 못하는데요.”
“음. 기대하고 있지.”
웬 동문서답이랍니까. 이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샤카의 고집을 꺾는 건 무리일 것 같다. 사라는 포기하면 편하다는 절대적 진리를 다시금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게 아니라도 괜찮다면.”
사실 이쪽도 그리 손해 보는 건 아니다. 자취경력 수 년 차, 전문 셰프 정도로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만화에서처럼 포이즌 쿠킹이나 망금술을 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지. 조금 자만해 보자면 일반인치고는 그래도 꽤 괜찮은 편이 아닐까.
샤카도 자신에게 그리 대단한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닐 테고. 적당히 품이 안 드는 걸 만들어 주면 샤카도 만족하고 자신도 신심의 평화를 찾고, 그야말로 만만세다. 무엇보다,
“그래.”
꽤 좋아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사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왜 여기서 요리를 하는 건데?”
일단은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물어보자 세이야와 사라가 마치 별 이상한 질문을 다 듣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만…….”
“여기가 제일 편한 걸요.”
그치? 라며 둘이 제멋대로 납득한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이런 곳에서 죽이 참 잘 맞는다. 얼마 전까지 서로의 존재도 몰랐던 사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보는 쪽이 흐뭇해질 정도로 화기애애한 누나와 남동생의 모습을 보며 카논은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차갑게 일갈했다.
“당장 꺼져.”
니들은 편하겠지만 나는 편하지 못하시겠다. 모처럼 쉬려고 하는데 갑자기 쳐들어와서 뭐하는 짓이야?
물론 자신도 부엌 하나 빌려주는 데 야박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태도가 문제다. 빌리면 빌린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헌데 사람이 멀쩡히 존재하는데 마치 투명인간 취급하며 거들떠도 안 보다니. 배알 꼴려서 도무지 한마디라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다는 게 현재 카논의 솔직한 심정이다.
“애당초 편하기로 따지면 인마궁이나 백양궁이 더 편하잖아.”
그 두 궁의 주인들은 사라는 물론이고 세이야마저 귀여워하고 있었으니 찾아간다면 아주 기쁘게 맞아줄 터였다. 평소에도 좀 찾아오라고 애원할 정도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렇게 대놓고 꺼지란 소리는 듣지 않겠지. 그러니까 제발 좀 가라, 가.
하지만 아무래도 코스모를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속마음이 제대로 송신되지 않은 것 같다. 사라는 눈썹을 모으며 카논의 바람을 단숨에 두 동강 내버렸다.
“귀찮은 걸요.”
“…….”
저건 자리를 옮기는 게 귀찮다는 걸까, 므우나 아이오로스가 귀찮다는 걸까. 괜히 대답을 듣기가 무서워져서 카논은 그냥 굳이 혼란 속에 뛰어드는 것 대신 침묵을 택했다. 모르는 것이 부처니.
그러는 와중에도 세이야는 봉투에서 요리 재료를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빵, 햄, 양상추, 토마토, 달걀, 치즈 등등. 뭘 저렇게 많이 가져왔는지 아주 형형색색이다. 소년의 태도에서 카논은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며 항복했다. 그래, 너희에게 뭔가를 바란 내가 죄인이지.
특정 부분에선 눈치가 없는 주제에 이런 데는 이상하게 눈치가 있는 사라가 무언의 허락을 알아채곤 꾸벅 고개를 숙인다. 카논은 대꾸 없이 팔짱을 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방금 그걸 인사로 치기로 했다.
어차피 제대로 쉬기도 글렀겠다, 둘이서 하는 양이나 구경할까 싶어 카논은 벽에 비스듬히 기댔다. 사실 퍽 우스운 꼴을 보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조그만 공간에서 남매의 대화가 기분 좋게 울렸다.
“누나, 뭐 만들 거야?”
“샌드위치.”
“엣?! 왜 한국 요리가 아닌 건데!”
세이야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실망의 기색이 스친다. 카논은 그제야 내심 궁금하던 사실에 대한 답을 얻었다. 왜 쓸모없는 세이야가 따라왔나 했더니 마찬가지로 구경하러 온 거군.
당연하지만 심드렁하게 보고 있던 카논도 알아챈 걸 자타공인 시스콤인 사라가 못 알아챌 리가 없다. 그녀가 미안한 듯 고개를 갸울인다.
“하지만 할 줄 모르는걸.”
““하?””
본의는 아니지만 카논은 무심코 세이야와 멋들어지게 합창을 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게 어지간히 엉뚱한 소리였어야지. 한국인이 한국 음식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한국이 아니라 어디 다른 나라에서 자란 것도 아니면서.
물론 태어나서 이때까지 요리 한번 안 해본 아가씨 같은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사라는 양갓집 규수 같은 타입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활력 꽉꽉 채워서 악착같이 살아남았으면 남았지─겉으로는 별로 그런 타입이 아닌 것 같지만 아니라면 골드 세인트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이제껏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실제로 지금 칼을 다루는 폼을 봐도 요리에 제법 익숙한 것 같고.
양쪽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받고 사라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말할 때마다 그녀의 콧잔등이 찡긋거린다.
“음…….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외국인이 생각하는 한식을 못 만든다는 소리인데요. 귀찮고, 재료도 한정되어 있다 보니 그냥 이도 저도 아닌 요리만 만들게 돼서.”
아, 그런 경우도 있을 순 있겠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카논은 문득 걸리는 점을 발견했다.
“재료가 한정되었다는 건 뭐야?”
나라에 따라 구하기 어려운 재료야 있을 수 있지만 전문 요리사도 아니고, 보통 그걸 가지고 재료가 한정되어 있다곤 말하지 않는다. 그것도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인터넷 하나면 어지간한 건 다 구할 수 있는데. 어디 산골 벽지에 혼자 처박혀 살았던 것도 아니고.
사라가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기분 탓인지 드라이아이스처럼 굉장히 차가운 눈동자였다.
“……돈이 없었으니까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식칼이 쾅 소리를 내며 토마토를 내리쳤다. 카논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렇게 세게 찍어 눌렀는데 뭉개지지 않고 깔끔하게 썰렸다는 사실이 왠지 무섭다.
슬쩍 세이야를 보자 이쪽도 비슷하게 겁을 먹었다. 잠깐 시선이 교차한다. 그와 함께 의견도 치열하게 교차한다. 광속을 뛰어넘어선 시간 속에서 선배와 후배 사이에 말 없는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승자는 여신─과 어쩌면 쌍둥이 형까지─ 등에 업고 있는 페가수스였다.
“……얼마나 가난했기에?”
솔직히 별로 묻고 싶진 않았지만 궁금하긴 또 궁금했다. 상처를 후벼 파는 질문에 사라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음으로써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을 몸소 재연했다.
“하루 세끼는 사치. 이전에는 아르바이트하던 데서 사장이 월급을 떼먹어서 다른 아르바이트 월급이 나올 때까지 식빵 한 봉지만 가지고 일주일을 견뎌야 했던 적이 있죠.”
“우아아…….”
세이야가 감탄인지 절규인지 모를 것을 내뱉는다. 카논도 속으로 똑같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성역도 경제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카논 자신도 풍요롭게 자랐다고는 말 못 한다. 하지만 사라 정도는 아니다. 세인트는 몸이 재산이니 성역도 먹는 것에 있어서는 야박하게 굴지 않았다. 적어도 빵 한 봉지로 일주일을 버틴 적은 없다.
순식간에 남자 둘이 침울해져 버리자 사라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녀의 말은 가벼운 농담 같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데서 핀트가 빗나가 있는 녀석이니까.
“……뭐,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았으니까요. 월급 떼인 것도 세 번 정도밖에 없고.”
그렇게 말하며 사라가 빙긋 웃는다. 나름 기운차리라고 저러는 것 같은데 어째 저게 더 애처롭다. 카논은 동정을 한가득 담아 사라를 바라보았다. 옆에선 세이야가 한숨을 섞어 말을 떨어트렸다.
“사냥이나 낚시라도 하지.”
“…………아니, 낚시라면 몰라도 사냥은 무리지. 일단 불법이라고, 그거.”
태클 걸 데가 거기냐. 어째 또 이상한 방향으로 얘기가 나갈 것 같아 카논은 마지막 대화는 못 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결국, 본의는 아니지만 사라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요리를 계속해야 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세이야와 카논, 둘 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코스모인가 뭔가 하는 게 굉장히 거북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라는 남자들의 이런 섬세한 감수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옛날 일이고 본인이 괜찮다는 데 왜 이러는 거냐고요. 사람 불편하게 시리.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뱃속이 따끔따끔 거린다. 아무래도 사가의 스트레스성 위염이 옮은 듯싶다. 사실 이제껏 멀쩡했던 게 이상하긴 했다. 내가 진짜 둔하긴 둔하구나. 라며 사라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버릇이 무섭다더니, 그 와중에도 손은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다. 채소를 잘라 손질하고, 달걀은 삶아서 으깨고, 꿀을 이용해 소스를 만들고, 햄은 얇게 잘라 굽고. 아, 그런데 샤카에게 햄을 줘도 괜찮나 몰라. 그 사람 일단 불교도 아니었나. 출가를 안 했으면 문제는 없겠지만 영 헷갈린단 말이지.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채식만 하는 사람도 있고. ……생각하기 귀찮은데 햄은 그냥 세이야랑 카논한테 주자.
그렇게 별별 생각을 하며 요리하기를 수 분, 압력에 휩쓸려 빠르게 손을 놀린 탓인지 금방 요리가 완성됐다. 사실 샌드위치 레시피 자체가 원체 간단하긴 했다.
“여기.”
“……?”
완성된 샌드위치 중 몇 개만 빼놓고 나머지를 남자들에게 내밀자 카논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다. 사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많이 만들었으니까 드세요.”
진실은 생각 없이 구워버린 햄이 아까운 것뿐이었지만 사라는 그걸 굳이 말로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몰라도 좋은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어차피 입 다물고 있는 다고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기껏 건넨 호의도 무색하게 카논은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엉망진창인 요리가 나올 줄 알았더니.”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면 안에 독이라도 든 건가?”
“……대체 카논 안에서 제 이미지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건가요.”
“혹시 우리는 마루타냐?”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제발 부탁이니 그 입 다물고 그냥 드세요.”
반쯤 협박이 섞인 말에 먼저 움직인 것은 세이야였다. 그다지 의심을 모르는 소년은 그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 뒤를 따라 카논이 끝부분을 조그맣게 베어 문다. 아니, 독 안 들었다니까요.
“맛있어!!”
크게 웃으면서 세이야가 감탄했다.
“……맛있네.”
별다른 반박을 못 하겠는지 카논도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네요.”
사라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사실 샌드위치는 실패하는 게 더 어려운 음식인데, 둘이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반응해 주니까 뭔가 굉장히 부끄러웠다. 그리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잘하는 것도 아닌 자신의 요리 실력을 알고 있었으니까 더더욱.
어차피 더 신경 써봤자 자신만 손해라. 사라는 열심히 자신이 만든 음식을 씹고 있는 남자들을 무시하고 따로 빼놨던 샌드위치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햄이 들어있지 않은 샤카만을 위한 요리다. 그 모습을 보고 카논이 돌연 질문을 던졌다.
“헌데, 새삼스럽긴 하다만 갑자기 웬 요리야?”
“……정말 새삼스럽네요.”
그건 처음부터 물었어야 할 질문이 아닌가. 은근히 타박했지만 당연하게도 이 남자는 그 정도에 꿈쩍할 위인이 아니었다. 사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샤카의 부탁이에요.”
“샤카?”
익숙한 이름에 카논의 얼굴에 뭔가 골몰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남은 샌드위치를 두, 세입 만에 빠르게 해치우고는 느닷없이 손을 내밀었다.
“줘.”
“……네?”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저한테 뭐라도 맡겨놨습니까? 다행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 자신만이 아니었는지 옆에 있는 세이야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가만히 있자 카논이 무언으로 재촉한다. 눈빛이 강렬하다. 말없이도 열렬히 전해져 오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 끝에는 방금 포장을 끝마친 샌드위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 설마 이거?
혹시나 싶어 샌드위치를 가리키자 카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사라는 저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왜요.”
“내가 전달해 주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순수한 호의를 의심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인데.”
비웃는 것처럼 카논이 코웃음 친다.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당당하게 치고 있다. 거기에 협박은 스파이스다. 기분 탓인지 카논을 노려보는 세이야의 얼굴에 ‘악당’이라는 속마음이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듯하다. 분한 건 미인은 이런 모습조차 그림이 된다는 사실이지만. 빌어먹을 외모지상주의 같으니라고.
잠시 고민하던 사라는 카논의 손에 얌전히 샌드위치를 건네주었다. 애당초 자신이 카논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거기에 여기 뒷정리도 하긴 해야 하니까.
건네주면서 제 표정이 영 별로였는지도 모른다. 그대로 처녀궁으로 향하려던 카논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변명을 내뱉어 주었다.
“어차피 올라갈 일이 있어서 올라가는 김에 전해주는 거니까 의심하지 마라.”
물론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며칠 뒤, 므우를 찾아가던 사라는 예상했던 것대로 처녀궁에서 샤카에게 붙잡혔다. 사라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나마 다행히 샤카는 아직까지 온건한 태도였다.
“사라여. 보답은 아직인가.”
거두절미하고 샤카가 본론부터 꺼냈다. 허나 당시 만들었던 샌드위치에 곰팡이가 피어도 벌써 피었을 때라 사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렸잖아요?”
“내게는 받은 기억이 없다만.”
“어라? 분명 카논이 전해준다고………….”
“……………….”
잠깐이지만 침묵이 따갑게 피부를 찔렀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바보가 아닌 이상 상황을 파악 못 할 리가 없다. 사라는 어색하니 뺨을 긁었다.
“……안 전해주던가요?”
“…………아니, 주긴 했다. 네가 만든 거라 말은 안 해서 거절……, 했지만.”
그럼 그렇지. 역시 꿍꿍이가 있으셨군. 이쯤 되자 사라는 오히려 안도했다. 사실 카논이 얌전히 샤카에게 전달해 줬다면 그게 더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냥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슬쩍 샤카를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화가 난 것 같았다. 표정은 그다지 변화가 없는 데 박력이 상당하다. 슬쩍 모양 좋은 입술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빌어먹을 도마뱀이.”
“…………지렁이겠죠.”
린의(鱗衣)─스케일─는 어째서인지 수장룡 비슷한 모습이지만 원래 시 드래곤은 전승 상 커다란 바다뱀 같은 거니 도마뱀보다는 지렁이 쪽이 맞다.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사라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카논에게 모든 걸 다 떠넘기면 편하겠지만 그러기엔 양심이 좀 찔렸다. 카논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음을 알면서도 얌전히 넘겨준 자신의 잘못도 있으니까. 물론 자신의 잘못은 조금, 아주 조금이다.
“……어쩔 수 없네요.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그 말에 샤카의 시선이 이쪽으로 스윽 이동한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얼굴에 뭔가 기대감이 잔뜩 넘쳐흐르는 것 같다.
“……정말인가?”
“일단 거짓말은 거의 하지 않는데요.”
“그럼 이번에는 카논이 허튼짓하지 못하게 처녀궁에서 만들 거라.”
“네에, 네에.”
속은 게 어지간히 분하긴 했는지 샤카가 안절부절못하며 등을 떠민다. 그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 반쯤 부엌으로 끌려들어 가면서도 사라는 조금 웃었다.
덤 1.
그렇게 문제는 잘 해결되는 것 같았으나 예상 못 한 복병이 하나 있었다. 세이야가 갑자기 사라가 요리하는 걸 구경하는 데 재미를 붙인 것이다.
“누나, 누나! 이번엔 파스타 만들어 줘!!”
어지간히 자신이 만든 요리가 맘에 들었는지 보이지 않는 꼬리를 홱홱 흔드는 세이야를 보고 사라는 그저 하하하 영혼 없이 웃었다. 이것 참. 동생한테 싫은 소리, 모진 소리도 못하겠고. 그나마 다행인 건 파스타는 쉬운 편……이 아닌가? 허나 쉽든 어렵든 어차피 자신에게 거절이란 선택지는 없었기에 사라는 얌전히 세이야가 내민 잡지를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요리 전문 잡지인가보다. 한 페이지를 다 차지할 정도로 크게, 굉장히 예쁘고 먹음직스럽게 찍혀있는 사진이 원망스럽다. 옆에 친절하게 레시피를 적어준 것도 밉다. 하지만 난 동생의 노예. 웃으면서 부탁한다고 말하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나는 무사카가 좋으니라.”
“……자연스럽게 끼어들지 마세요.”
그렇지만 너님은 동생이 아니니까 아웃입니다.
덤 2.
“사라, 이것을.”
“헷?"
갑자기 아이오리아가 진지한 얼굴로 봉투를 내밀기에 사라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양팔로도 들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봉투다. 뭔가 싶어 그 안을 보자 온갖 음식이 가득 들어있다. 사라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요새 음식을 많이 받는 것 같은데.
“……갑자기 이게 뭔가요?”
그렇게 묻자 아이오리아의 남자다운 얼굴에 비통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많이 먹어야 많이 클 것이 아닌가.”
“……전 이미 다 컸는데요.”
다들 자주 까먹고 있는 것 같지만 사라는 24살이다. 즉, 많이 크라고 말하고 있는 아이오리아보다 훨씬 연상이며 성장이 끝난 지도 수년은 됐다는 소리다. 아니, 그보다 많이 먹으면 많이 큰다는 건 도대체 어느 시대 발상이야.
하지만 뭔가 하나에 골몰하면 주변의 어떤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이 남자는 아무래도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라의 당연한 반박은 그렇게 덧없이 허공에서 스러졌다.
“카논에게 들었다.”
“……뭘요?”
“어릴 때부터 항시 배를 곪고 살았다면서.”
“…………네?”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뭔가 내용이 와전됐다. 가난하게 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항시 굶은 건 아닌데. 거기에 뭘 못 먹을 때가 있을 정도로 가난해진 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그러니까 중학생 때니까 그리 어릴 때부터도 아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알 리는 없지만.
아무래도 오해는 풀어야 할 것 같아 사라는 황급히 설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골드 세인트인 아이오리아가 입을 여는 게 훨씬 빨랐다.
“네 키가 작은 것도 필시 어릴 때 못 먹어서겠지!”
“…………………….”
아이오리아가 너무 진지했기에 사라는 자신이 작은 건 인종과 유전자의 문제라곤 차마 고백할 수 없었다.
매번 올리는 걸 까먹네요
쓰다보면 미로에게 좀 미안해집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드림물은 좀 안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