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Epi.2 소년과 부엌의 요정 下
Boy and Brownie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제대로 된 사고가 이어지지 않는다. 덕분에 걸음이 비틀비틀하다. 솔직히 말해 눈에 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거실 한쪽에 놓여있던 커다란 소파 하나만은 제외하곤.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아 텐마는 앞뒤 가리지 않고 소파 위로 다이빙했다. 푹신한 쿠션에 몸이 가라앉는다. 동시에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텐마는 그제야 주변에 누군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시지포스다.
“텐마. 괜찮아?”
이 목소리는 레굴루스. 힘겹게 고개를 돌리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돌려 말할 기력도 없어 텐마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토할 것 같아.”
“나도 그 기분 알아!”
즉각 반응이 돌아온다. 텐마는 좀 더 똑바로 레굴루스를 바라보았다. 올곧은 눈동자가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시선이 교차, 순식간에 굳건한 동지애를 쌓은 두 사람은 힘주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옆에 있던 시지포스가 왜 이런 것만 닮았냐고 한탄하며 머리를 감싸 쥐는 게 보였지만 그건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래서 책은 다 읽었어?”
포기한 듯 한숨 섞인 질문이 떨어졌다.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텐마는 이상한 걸 삼킨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권도 제대로 못 읽었다. 변명이긴 하지만 전부 두께가 만만치 않았던 데다 워낙 책 읽는 데 익숙하지 않다 보니.
별말은 없었지만 표정만으로 대답이 되었는지 머리 위에서 다시 한숨이 터졌다. 허나 그 한숨은 금방 부드러운 미소로 변했다. 커다란 손이 머리에 살짝 닿았다 떨어진다.
“뭐, 천천히 하면 되니까. 오늘은 이만 쉴까.”
그리 고하고 시지포스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텐마는 굼실굼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과 전혀 다른 어른의 뒷모습. 닿았던 자리가 간질간질하다. 괜히 머리를 매만지자 그 모습이 이상했던 건지 레굴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텐마?”
“응? 아무것도…….”
다행히 레굴루스는 더 캐묻지 않아 주었다. 텐마는 내심 안도했다. 숨길만 한 것은 아니지만 이유를 말하기가 좀 부끄러웠던 것이다.
2년 반이라는 짧은 기억의 길이 탓에 텐마의 인간관계는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아는 사람은 도코와 시온이 전부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 때문인지 텐마는 시지포스를 대할 때마다 가끔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그도 그럴게 이때까지 텐마 주변에 어른이라곤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물론 시온과 도코도 연상이긴 하지만 딱히 어른이라고 느낀 적은 없으므로─
‘두 사람이 들으면 화내겠다.’
그러니 절대로 비밀이다. 굳게 다짐하며 텐마는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레굴루스를 적당히 상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지포스가 음료수와 쿠키를 가지고 돌아왔다. 간식을 본 텐마는 반색했다. 헌데 정작 들고 온 장본인의 표정이 이상하다. 마법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마치 요정이 장난치는 모습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레굴루스마저도 그를 보고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는 점이다.
“시지포스, 이거…….”
“아, 그래…….”
또 둘만의 대화가 이어진다. 덕분에 쿠키를 집으려고 손을 뻗던 텐마는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왜. 뭐가 문젠데. 설마 여기에 이상한 거라도 들어간 건 아니겠지.
“……왜 그러는데?”
꺼림칙하게 묻자 시지포스가 턱을 매만진다. 그 간단한 행동에도 깊은 고심의 흔적이 엿보였다.
“아니……. 사실 이건 브라우니가 만든 거라.”
“브라우니?”
“그래. 너희 집에도 살지 않나?”
시지포스의 질문에 텐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깜빡하고 있는 모양인데 애당초 자신의 집은 요정이 살만한 곳이 못 되었다.
“아무도 살지 않던 빈집이었던 데다 하필 이사 온 사람이 도코였으니까. ……뭐, 이젠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다만 거기에 담긴 감정만은 진득하니,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텐마의 동거인이자 보호자인 도코는 일반인들과 좀 달랐다. 특이체질이라고 해야 할까. 마법의 소질은 없는 주제에 오라만 강해서 어지간한 요정은 그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쉽게 말하자면 살아있는 호신부 그 자체.
하지만 도코의 힘이 미치는 영역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에게 만이다. 가까이 붙어있으면 타인도 영향을 받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랬다. 즉, 요정들이 가까이 오는 건 막아도 본격적으로 집에 들어와 사는 건 막을 수 없단 소리다. 게다가 이젠 텐마 자신의 문제도 있었다.
처음에는 별달리 인식 못 했지만 자신은 요정을 끌어들이는 체질이라고 한다. 말로만 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텐마는 시지포스가 다녀간 다음 날 그 의미를 뼈저리게 자각했다.
힘이 돌아옴─시지포스의 말에 따르면─과 동시에 텐마는 요정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적응을 못해 어지러워 죽는 줄 알았다. 사실 지금도 근처를 맴돌고 있는 몇몇 요정들이 신경 쓰이는 참이다. 애써 보이지 않는 척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냥 보이기만 할 뿐이라면 낫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떻게 된 게 이 요정들은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면 아니, 자신이 지나가기만 하면 좋다고 달라붙었다. 그나마 처음에는 조심스러워 하는 것도 같더니 내버려 두자 점점 행동이 대담해지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서 여러 명이 내려다보고 있어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시지포스의 무지막지하기까지도 한 말에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브라우니가 만든 게 왜?”
부엌의 요정이잖아? 원래 집안일을 해주는 요정이 아냐? 쿠키를 만들어준 게 그렇게 이상해? 의문으로 가득 찬 눈빛을 던지자 슬며시 시지포스가 시선을 피했다.
“……이제까지 이런 걸 만들어 준 적이 없거든. 뭐, 원래 만들어 주는 요정도 아니고.”
“헤?”
“……아마 네가 왔다고 만든 것 같은데.”
“헤???”
그게 무슨 말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있는 힘껏 차별당하고 있단 소리다. 텐마는 그제야 시지포스와 레굴루스의 반응을 이해했다. 자신이라도 동거인은 내다 버리고 손님에게만 잘해주는 꼴을 보면 이런 떫은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별당하는 대상이 자신은 아니었으므로 텐마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만약 이게 스토킹을 당한다든가 하는 일이었다면 무섭기도 하고 화도 나겠지만 쿠키를 만들어주는 것 정도야. 오히려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먹어도 별문제 없는 거지?”
“…………그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텐마는 냉큼 손을 뻗었다. 사실 아까부터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그와 반대로 아직 꺼림칙한 감정이 남았는지 레굴루스는 아직도 쿠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지포스에 이르러서는 아예 시선을 돌리고 있다. 그래도 텐마는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고 쿠키를 오도독 깨물었다. 이렇게 맛있는데 안 먹으면 자기만 손해지.
잠시 그렇게 쿠키를 씹는 소리만이 허무하게 울렸다.
텐마가 그 요정을 발견한 것은 접시에 있던 쿠키를 반 이상 해치우고 난 뒤였다.
처음에는 뭔지 몰랐다. 계속 주변을 알짱거리던 요정들과는 달리 그것은 소파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어도 제대로 숨은 게 아닌 데다 계속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으니 시선을 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계속 쳐다보고 있자 모습을 드러낸 상대와 딱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이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겁이라도 난 것처럼 바로 숨는다. 아주 찰나였다. 그래도 텐마는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요정이었다. 세 살배기 아이 정도의 크기일까.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보이는 부분은 온통 갈색이다. 처음 보는 요정이었지만 저 외향은 굉장히 유명하다. 게다가 지금 먹고 있는 쿠키도 있다. 답은 금방 나왔다.
“브라우니?”
조용히 중얼거리자 레굴루스와 시지포스가 의아한 듯한 시선을 던진다. 허나 텐마는 눈도 돌리지 않고 소파 밑 부분만 가만히 쳐다보았다.
조용히 있자니 브라우니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브라우니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아까처럼 숨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무서운 것은 아닌 듯했다. 오히려 마주친 눈동자가 심하게 반짝인다. 기분 탓인지 마치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다. 도대체 뭘?
‘아, 혹시─’
쿠키 때문인가? 사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긴 했다.
“어, 음, 쿠키 고마워. 엄청 맛있어……?”
조심스럽게 감사를 하자 생각보다 커다란 반응이 돌아온다. 브라우니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영 정신없기도 했지만 텐마는 입가를 말랑하게 풀었다. 부러 하지 않아도 그리됐다.
“뭐야, 브라우니는 처음 보는데 생각보다 귀엽네.”
“그렇군. 이런 요정인 줄은 나도 몰랐는데.”
옆에서 시지포스가 중얼거리듯 사족을 단다. 텐마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텐마는 정말 인기 많네.”
“……너무 진지하게 말하지 마.”
이제는 레굴루스까지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심히 이상하다. 마침내 텐마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물론 레굴루스는 들어 먹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도 브라우니는 뭘 가져다준다, 치운다, 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아무래도 고맙다는 말이 의욕에 제대로 불을 붙인 것 같다.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부끄러운 것과는 별개로 참 편하다.
그래서였을 거다. 텐마는 무심코 농담을 흘리고 말았다. 그래, 여신께 맹세코 그건 분명히 농담이었다.
“브라우니가 있으니까 정말 좋네. 차라리 우리 집에 올래?”
브라우니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리고 어라? 싶었던 순간 요정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뭔가─아마 본인의 물건─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할 새도 없다. 그야말로 광속의 속도. 뒤늦게라도 말러보려 했지만 이미 아무것도 안 들리는 상태에 들어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텐마는 시지포스와 레굴루스를 바라보았다. 곤혹스러운 소년의 시선을 받고 원 동거인들은 해탈한 표정으로 자애롭게 웃었다.
“내버려 두면 되지 않을까?”
“요정이 거처를 옮긴다는 데 막을 권한이 우리에겐 없으니까.”
“…………뭐야 그게.”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던 텐마는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짐을 다 챙겼는지─사실 별거 없긴 했다─ 브라우니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머루 같은 눈동자에는 희망이 가득 넘쳐흘렀다. 시선을 받으며 텐마는 어색하게 뺨을 긁었다.
“……어쩔 수 없나.”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동거인이 하나 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