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데프텐]상냥한 달 (2)
※여체화 주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데프테로스는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기척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 찾았다!! 여기 있었구나!”
“……또냐.”
수풀에서 불쑥 튀어나온 텐마를 보고 데프테로스는 질린 얼굴을 했다. 중얼거림에는 자포자기도 어렴풋이 섞여 있었다. 이전, 최악의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텐마가 계속해서 자신을 찾아오고 있는 덕분이다.
당연하지만 데프테로스도 텐마를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만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찾지 못할 곳만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텐마는 매번 그를 찾아냈다. 이상한 일이다. 이제껏 자신이 맘먹고 몸을 숨겼을 때 자신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는데.
이전에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 찾는 거냐고 물어보니 오히려 숨었던 거야? 라고 정말 의문으로 가득 찬 대답이 돌아온 적도 있다. 즉, 텐마는 별 노력 없이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온다는 소리였다. 결국, 그 이후로 데프테로스는 텐마에게서 숨는 걸 포기했다.
가까이 다가온 텐마가 자연스럽게 가면을 벗었다. 무방비한 모습에 데프테로스는 조그맣게 혀를 찼다.
“그렇게 막 벗어도 되는 거냐.”
“뭐 어때. 어차피 한두 번 보인 것도 아니고.”
그것도 그렇다. 지금이야 이렇게 얌전해졌다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텐마는 데프테로스를 볼 때마다 죽일 듯 덤벼들곤 했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움직임이 격렬해지고 종종 가면이 벗겨지기도 했고. 그것만이 아니라 재회할 때마다 텐마의 실력이 쑥쑥 늘어 데프테로스가 사정을 못 봐주고 깨트려버린 적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사고랑 스스로 가면을 벗는 건 다르지 않나. 처음에 얼굴을 보였다고 다짜고짜 죽이려던 기백은 다 어디로 간 거냐. 항상 그런 한탄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데프테로스는 결국 이번에도 모든 말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데프테로스는 가만히 텐마를 내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친다. 놀라지도 않고 싱긋 웃더니 그녀가 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 작은 입으로 참 잘도 떠든다 싶었다. 말할 때마다 표정이 다채롭게 바뀌는 것도 신기했다. 웃다가도 금방 화내고, 그러다가도 또 상냥한 얼굴을 한다.
‘이상한 녀석.’
아마 데프테로스는 어떻게 해도 텐마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여태껏 제가 만나지 못한 종류의 인간. 그래도 단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나든, 얼마의 만남을 거듭하든 자신이 그녀를 싫어할 수 없을 거란 사실이다.
텐마의 곁에 있으면 긴장이 풀려갔다. 손끝까지 노곤해지고 사고가 녹아내렸다. 그럼에도 불쾌하지는 않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젠 이것이 안온함임을 안다.
“데프테로스?”
이름을 불릴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리면서도 따뜻해졌다. 눈물이 나올 만큼 벅찬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것이 기쁨임을 알았다. 매번 새로움을 배웠다.
“데프테로스!!”
“……뭐냐.”
“당신 또 얘기 안 듣고 있었지!”
“…………아니.”
“거짓말!!”
텐마가 노성을 터트린다. 온 얼굴로 화를 내는 텐마를 보고 데프테로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이었다. 그것을 자각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모든 것이 짧은 꿈의 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위팔에 고통이 내달렸다. 욱신거림이 심하고 불에 덴 듯 뜨겁다. 상처가 크겠군. 마치 남 일처럼 담담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데프테로스는 피가 흐르는 상처를 막지도 않은 채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따끔거리는 눈빛이 박혀왔다. 여전히 똑같다. 저 경멸 어린 표정도, 혐오와 옅은 두려움이 담긴 눈동자도. 변하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이를 낯설게 느끼다니, 제가 얼마나 착각하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원래 이게 옳은 것인데. 그런데도─
그 눈동자가 똑바로 바라봐 주어서, 그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어서, 그 눈동자가 상냥하게 웃어주어서, 어리석은 따뜻함에 취해서. 제게 그럴 가치가 있을 거라 착각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입은 웃고 있는데 속은 그렇지 못했다. 이상하지만 불합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 이전으로 돌아온 것뿐이니 당연했다. 어차피 전부 꿈, 한때의 환상.
모든 것을 인정한 데프테로스는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상대의 아미가 크게 찌푸려졌다.
“……여전히 건방진 눈동자를 하고 있군.”
다시금 채찍이 날아온다. 그 끝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가 데프테로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동시에 짧은 비명이 들렸다.
“너희 뭐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데프테로스는 당황했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예상대로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텐마? 비명처럼 이름이 튀어나오려 했다. 데프테로스는 지긋이 혀를 짓씹어 목소리를 삼켰다. 텐마가 저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려서 좋을 리가 없다.
다행히 눈앞의 상대는 텐마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불쾌해하긴 했지만 한번 흘끗 쳐다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직 후보생인 것 같은데 너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 물러서라.”
가벼운 경고가 던져졌다. 하지만 데프테로스는 텐마가 고작 그 정도로 물러설 성격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 맞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역시나. 텐마가 남자에게 강하게 반발한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데프테로스는 더없이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텐마가 저리 행동할 수 있는 건 모르기 때문이다. 제가 얼마나 저주받은 존재인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지. 그래서 무구하게 대하는 것이고 타인에게 나눠주는 온기를 제게도 나눠주는 거겠지. 모든 것은 오로지 무지 때문에.
그런 네가 이 모든 일이 정당하단 걸 알게 된다면─
“……넌 모르겠지만 이놈은 흉성 아래 태어난, 사라지는 게 마땅한 존재다. 그러니 감싸줄 필요가 없다.”
아아, 그랬다. 남자가 하는 말이 오롯한 진실. 그 외에 뭐가 있을까. 태어났을 때부터 뒤집어쓴 자신의 원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잊으려 했다. 그것조차도 죄. 살아가는 것만으로 죄를 쌓아가고 있는 자신.
익숙한 체념이 몸을 휘감았다. 귓가에 와 닿는 말도 전부 헛되다. 저항이 이렇게 부질없게 느껴진 적이 없다. 전부 알면서도, 그럼에도 형이 바라서, 이제껏 살아가고자 했는데. 그런데 점점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 계속 삶을 살아도 끝엔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눈을 감았다. 감각이 아득하다. 먼 감각에 뺨에 피가 튀었다는 걸 알았다.
“……읏!”
“……텐, 마?”
있어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자신을 불러 깨웠다. 데프테로스는 제 앞을 감싼 소녀를 발견했다. 자그만 몸이 무너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허나 텐마는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버티고 섰다. 상처 입어가면서도 언제나 망설임 없이, 거침없이. 저렇게 가냘픈 주제에 그 상냥함이 너무 커서.
텐마의 어깨가 피로 물들어 간다. 언젠가, 먼 옛날, 아스프로스가 자신을 감싸고 다쳤던 곳과 비슷한 곳에 생긴 상처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겹쳐진 기억에 혼란이 커졌다. 너는 어째서. 그 말을 들었음에도 어째서. 풀리지 않을 의문.
“네 녀석 무얼 하는 거냐!!”
상대가 노성을 내지른다. 텐마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이상한 말이나 하며 사람을 상처 입히고!!”
곧 조그만 손이 팔을 덥석 잡아왔다. 데프테로스는 무의식중에 어깨를 움칠거렸다. 하지만 그 손은 생각보다 힘이 강해, 결코 반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데프테로스는 어쩔 수 없이 텐마가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닿은 온기가 아프게 찔려왔다.
“더는 이 녀석을 괴롭히지 마!!”
어린애처럼 소리를 지르곤 텐마가 성큼성큼 자리를 뜬다. 남자가 크게 혀를 찼다.
“……후회할 거다, 네놈.”
누구에게 남기는 건지 모를 저주가 귓가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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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마가 성역에 올 때쯤이면 데프도 골드 세인트랑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맞고 있으려나.. 싶기도 하지만 뭐, 시온이 올때까지만 해도 맞고 있었으니까요. 사실 데프테로스에겐 반항한다거나 피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을 것 같기도.
사실 뒷 내용까지 쓰고 올리려고 했는데 너무 안 써져서 여기까지만. 당신의 이름 아래서는 정줄 놓고도 참 잘써지던데 말이죠. 이걸 전체 내용을 다 쓴 뒤에야 올리려고 했던 과거의 제가 얼마나 용감했던지.
너무 안써지니까 다음은 소년 발라드나 써야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