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데프텐]상냥한 달 (1)
※여체화 주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여러 가지 얘기가 들려왔다. 대개는 쓸모없는 잡담이나 뜬소문 같은 것들뿐이다. 허나 그런 것들이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일도 있고, 성역의 분위기를 알아채는 데 유용했으므로 데프테로스는 종종 지나가는 목소리를 귀담아듣곤 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버릇이 됐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들은 것이 새로운 후보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새로운 녀석이 들어온 것 같아.”
“……독학으로 코스모를 체득했다고 하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잡병들의 대화를 훔쳐 들으며 데프테로스는 눈을 깜빡였다. 세인트 후보생이 들어오는 건 별반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번 후보생은 워낙 특이한 케이스여서 그런지 자주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었다. 저 이야기를 들은 것도 이번만 벌써 세 번째다.
솔직히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로서는 상대를 만나러 갈 수조차 없다. 숨어서 살펴보는 일이야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렇게 귀찮은 짓을 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자신과 관계되어봤자 좋을 건 없을 테니까. 데프테로스는 혼잣말을 짓씹으며 몰래 그 자리를 떴다.
데프테로스는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해서야 숨을 돌렸다. 분명 이곳까지 찾아오는 녀석은 없다. 추측보다는 확신이다. 타인과 마주쳐봤자 좋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오지 않을 만한 곳을 찾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건물 잔해에 몸을 기댔다. 사위가 조용하다. 약간의 소음조차 없기 때문인지 오히려 귀가 먹먹했다. 손끝에서 풀려나가는 긴장을 느끼며 데프테로스는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이라야 자신은 겨우 맘을 놓을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무 오랜 시간 이래왔기에 이제는 별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면 조금씩 모양과 위치가 변하는 구름이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시간만은 흘러간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문득 귀에 이상한 소리가 잡혔다. 아직은 조그만 소란. 하지만 곧 사람의 발소리란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사람이 어째서 이런 곳에? 의문보다 경고가 먼저 떠올랐다. 데프테로스는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너무 넋을 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왓!!!”
“……?!”
사람이 뛰어내렸다기보다는 떨어져 내렸다는 말이 정확했다. 입을 뗄 새도 없이 데프테로스는 떨어지는 사람의 쿠션이 되어 그대로 깔렸다.
땅바닥에 부딪힌 등이 아프다. 데프테로스는 신음을 삼키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배 위에 엎어져 있는 동그란 머리통이 보였다. 아직 어린 소녀, 아니, 아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는 꼬마다. 제게 얹힌 몸체가 심히 가늘고 가볍다.
“아우, 아파라….”
머리를 흔들며 소녀가 몸을 일으킨다. 데프테로스는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생각대로 어린 얼굴이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턱선, 조그만 입술, 아직 뽀얀 뺨, 인상적일 정도로 커다란 눈동자. 마치 저녁놀처럼 부드러운 붉은색의.
일순 그 눈동자에 넋을 빼앗겼다. 한순간이지만 아픔마저도 의식 속에서 사라졌다.
붉은색. 단순히 그리 말하면 쉽지만 그것만으로는 심히 부족한, 타인의 모든 것을 근간부터 뒤흔들어 버리는, 결코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을 오묘함. 오로지 감정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아─”
문득 소녀가 탄성을 내뱉었다. 의외로 낮은 목소리다. 데프테로스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굴이 서로의 호흡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는 것도 가까스로 알 수 있었다.
붉은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가 맞았다. 예쁜 눈동자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그야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데프테로스는 제멋대로 납득했다. 허나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곧 소녀의 안색이 지나칠 정도로 새하얗게 변했다. 조그만 입술이 제멋대로 달싹인다.
“주…….”
“주?”
“죽어!!!”
느닷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워낙 지근거리였던 터라 데프테로스는 간신히 소녀의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무슨……!”
힘들게 몸을 빼냈지만 바로 공격이 뒤따른다. 아직 세인트도 아닌 것 같은데 제법 주먹이 날카롭다. 데프테로스는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에도 이유 없는 공격을 당한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허나 그건 자신의 태생과 예언에 대해 알고 있는 극소수의 자들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일이었다. 적어도 이렇게 맥락 없이, 그것도 자신에 대한 소문조차 들은 적도 없을 것 같은 소녀에게 공격당한 일은 없다.
이리저리 몸을 피하던 데프테로스의 눈에 우연히 땅에 떨어져 있는 물건이 들어왔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속질의 물건. 가면이다. 그제야 머릿속에 여성투사의 규칙이 떠올랐다.
원래 세인트는 남성밖에 될 수 없다. 때문에 여성이 세인트가 되기 위해서는 성별을 버린다는 증거로 가면을 써야 한다. 그녀들에게 있어 가면은 절대적인 규칙이자 전사로서 긍지의 지표. 그런 여성투사들에게 있어 타인에게 함부로 얼굴을 보이는 일은 수치였다. 그것이 비록 사고 때문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설마 이렇게 다짜고짜 죽이려 들려고 할 줄은 몰랐지만. 데프테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소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 성장기인 팔목은 한손으로도 충분히 그러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늘었다.
“진정해라.”
조용히 속삭이자 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수치스러운 것일까 분한 것일까. 데프테로스로서는 알 수 없다.
다행히 더는 공격할 것 같지 않았기에 데프테로스는 얌전히 소녀의 손을 놓고 가면을 주워주었다.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순순히 제 물건을 돌려받은 소녀가 뾰로통하게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감춘다. 토라진 모습이 정말로 어린아이 같아 이유 없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데프테로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렇게 낙담할 것 없다.”
소녀가 이쪽을 바라본다. 가면을 쓰고 있지만 의아해하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필시 그 예쁜 눈동자가 동그래져 있겠지. 상상을 하면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 입을 열기 어려웠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얼굴을 보인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태어났을 때부터 살아가는 걸 부정당한 자신. 그저 덧없는 약속에 매달려, 형의 존재에 기대어 숨 쉬고 있을 뿐인 그림자. 언제든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 그래서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다. 있는 것은 오직 데프테로스(두 번째)라는 무거운 주박뿐.
하지만 당연히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 유령이야?”
“……비슷하군.”
별반 다를 것은 없다고 생각해 데프테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상대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소녀가 터벅터벅 걸어온다. 아까처럼 공격하려는 모습이 아니었기에 데프테로스는 가만히 있었다. 허나 그것이 잘못이었나. 곧 가느다란 팔이 뻗어오고, 조그만 손이 데프테로스의 몸을 여기저기 만지기 시작했다.
“………….”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을 당한 거니 화를 내야 하나 싶었다. 다행히 그러기 전에 소녀가 손을 뗐다. 대신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 졌다. 표정을 알 수 없는 가면이 코앞에 있다.
“뭐야, 제대로 만져지고 온기도 있잖아. 유령이란 건 역시 거짓말이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제멋대로 결론을 내고 소녀가 떨어졌다. 손끝이 닿았던 부분에 기묘한 열감이 남았다. 데프테로스는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소녀가 생각하는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소녀가 애꿎은 땅을 걷어찬다. 심통이 난 게 분명하다. 결국 데프테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살아 있긴 하지만 존재하지는 않…….”
“어쨌든 살아있다는 건 맞잖아!!”
말을 자르며 소녀가 반박한다.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모양새라 데프테로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나서야 아뿔싸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씩씩대는 소녀 앞에서 데프테로스는 어쩔 수 없이 모든 말을 삼켜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소녀가 먼저였다.
“……당신, 이름이 뭐야?”
“…………데프테로스다.”
“데프, 테로스?”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어설픈 발음이었다. 데프테로스는 다시금 이상한 감각에 습격당했다. 타인에게 이름을 불리는 일이 이렇게 기묘한 일이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린 소녀가 뒤로 물러섰다. 둘 사이로 빠끔 틈이 벌어진다. 무어라 말을 걸려던 찰나 소녀가 살짝 가면을 벗었다. 여전히 토라진 얼굴이 어슴푸레 드러난다. 그 뺨이 지독히도 붉다.
“난 텐마.”
이국의 이름이다. 데프테로스는 그 이름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딱히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쉽게 마음에 남았다. 바람에도 흔들리는 수면처럼 자각 못 하는 감정이 크게 일렁거렸다.
무의식을 쫓아 데프테로스는 텐마라는 이름의 소녀를 쳐다보았다. 지치지도 않고 시선이 맞부딪혀 온다. 소녀의 눈빛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올곧았다. 언제나 꿰뚫을 듯이, 제 속을 낱낱이 파헤치기라도 할 것처럼.
“다음에는 안 질 테니까!”
제멋대로 선언한 소녀가 몸을 돌려 사라진다. 그제야 숨이 터졌다.
지독한 후회감이 속을 잠식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어째서 멍청하게 상대의 접근을 허용했는가. 어째서 멍청하게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어째서 멍청하게 제 이름을 알려주었는가. 어째서, 자신은 어째서─
데프테로스는 이성으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음을 알았다. 단지 마음이, 감정이 거기에 있었기에, 자각도 전에 이미 흔들리고 있었기에. 이십 년 넘게 쌓아온 마음이 오로지 단 하나의 존재 때문에.
문득 데프테로스는 소녀가 다음을 말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그보다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흉성인 자신이 타인과 관계를 맺다니 결코 용납받지 못하리라. 소녀는 데젤이라는 예외와는 달랐다. 허나,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기대가 자랐다.
데프테로스는 그 자리에 서서 소녀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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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참지 못하고 질러버린 텐마 여체화의 데프텐. 텐마가 여자애라는 것만 빼고 본편과 설정이 같습니다. 다른 글도 전부 욕망을 넣었지만 이건 아예 들이 부을 예정. 마지막으로 사가세이를 쓴게 겨울이라 양심이 좀 찔리긴 하지만.... 일단 쓰고 싶은 것부터<
본편 내용, 즉 텐마의 후보생 시절~성전 직후 까지의 내용이 이 글인 상냥한 달, 그 외에 번외격으로 단편 몇 개 생각해 놓은 게 있습니다(당연히 성전 후 부활 설정). 사실 상냥한 달은 끝까지 다 쓰고 올릴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엄청 오래 걸릴 것 같아서.....ㅏㅓ
앞으로 제일 많이 쓰는 카테고리가 이 카테고리가 될지도...<< 사실 다른 AU도 떠올랐지만 그건 꾹꾹 눌러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