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6 당신의 눈동자에 비치는 저는 무슨 색인가요?
“세이야는 호박이구나.”
느닷없이 떨어진 폭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하지만 여전히 공기를 읽는 능력이라곤 쥐뿔만큼도 없던 사라는 계속 입을 열었다.
“어두운 데서 보면 가넷 같은데. 신기하지.”
이건 또 이것대로 말이 이상하다. 앞뒤 문맥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호박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가넷은 왜 나오는 걸까. 하고 모두가 궁금해 하는 와중 유일하게 진상을 알아챈 사람은 스승 덕분에 비유와 선문답에 익숙한 시류였다.
“……호박이라는 건 혹시 보석 호박(琥珀, Amber)을 말하는 겁니까?”
“그럼 그거 말고 호박이 또 있어?”
물론 있습니다만. 채소 중에서 크고 노랗고 울퉁불퉁하고 잭 오 랜턴을 만드는 데 쓰이는 아주 유명한 호박이. 라고 시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말은 안 해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 증거로 모두 표정이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사라가 워낙 당연한 듯 말해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을 뿐. 다른 사람들처럼 시류도 헛기침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어차피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집무실 안에 있던 모두가 서로 시선을 피했다. 그 와중에 역시 사라만이 태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류는 흑옥, 슌은 에메랄드, 효가는 사파이어보다는 아쿠아마린인가.”
“……아까부터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불만을 담뿍 담아 세이야가 사라를 타박했다. 느닷없이 호박이란 소리를 들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영문 모를 얘기를 계속 듣는 것도 짜증 난다는 심리도 조금 섞였지만.
세이야의 타박에 사라가 눈을 끔뻑였다. 멍한 표정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말 안 했나? 너희 눈동자 색 말이야.”
“눈동자 색?”
너무 느닷없는 말이라 세이야와 슌과 효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중간부터 대충 눈치채고 있던 시류만이 홀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역시 엉뚱한 사람이다. 갑자기 눈동자 색을 보석에 비유하다니. 그것도 평범한 10대 남자애들을. 문학에서 종종 아름다운 여인의 눈동자를 보석에 비유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소년들에게 비유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을 텐데.
만약 사라가 이런 시류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면 꼭 미녀에게만 비유해야 하는 법은 없지 않으냐, 남녀차별이다, 더불어 너희는 귀여우니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해줬으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라는 독심술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냥 다른 사람에게로 말을 돌렸을 뿐이다.
“응. 그리고 사가는 라피스 라줄리, 카논은 터콰이즈일까요?”
참견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있던 쌍둥이는 브론즈들과 마찬가지로 별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애매하게 대답했다. 사실 대답하고 싶어도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20대 남자, 그것도 세인트에게 보석에 대해 줄줄 꿰고 있으라는 건 무리한 얘기다.
사라도 딱히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는지 별말이 없다. 오히려 어느 사이엔가 좀비 대열에 합류한 몰골로 자료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는 걸 보면 그냥 일하는 도중의 단순한 잡담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래, 너도 아무 말이라도 지껄이지 않으면 힘들겠지. 이미 좀비 수준은 넘어버린 사가와 자칫 잘못하면 좀비가 되어버릴 수 있는 카논은 사라의 행동을 이해했다.
그리고 좀비가 되기엔 지나치게 건강하고 더불어 서류의 산을 맞닥뜨릴 일도 없는 소년만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럼 다른 사람은?”
단순한 만큼 아까의 호박 발언도 금방 잊어버린 세이야가 웃으며 물었다. 반짝이는 눈이 적당한 대답을 허락하지 않는다. 공공연히 편애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브론즈 소년들에게 약했던 사라는 역시 세이야의 질문을 넘기지 못하고 손을 멈춘 채 한숨을 내쉬었다. 멍하니 천장을 보는 게 다른 세인트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러네. 아이오로스랑 아이오리아는 비취, 므우는 보석보다는 새싹 잎일까. 그 외에는…… 글쎄, 잘 모르겠네. 겹치는 사람도 많아서.”
보석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라서, 라며 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이야는 조금 실망스러운 듯했지만 내심 흥미를 가지고 듣던 다른 브론즈 세인트들은 그것도 그렇다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하긴 아프로디테랑 데스마스크도 명도는 다르지만 일단 둘 다 푸른색이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미로랑 알데바란도 푸른색이지. 그리고 나의 스승 카뮤는 녹색인가.”
“노사랑 슈라도 녹색이야. 사오리 아가씨도. 시온은 보라색이었나.”
“오히려 나 같은 갈색이 드무네~”
어느새 사라는 소외되고 형제들끼리만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오히려 말을 꺼낸 당사자보다 열을 올리는 것 같다. 사소한 것에도 불타오를 수 있는 건 저 연령대의 아이들만 가질 수 있는 힘일지도 모른다.
뭐, 떠드는 거라면 얼마든지 떠들어라, 하는 심정으로 소년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던 카논은 문득 여태까지의 대화 중에서 딱 한사람이 나오지 않은 걸 알아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히 대화에 끼어들 생각은 아니었다. 허나 멍청한 입은 그 얼굴을 떠올린 순간 반사적으로 사라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샤카는 무슨 보석에 비유할 건데?”
순간, 사라가 굉장히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평소 지나치게 표정이 없는 만큼 한번 제대로 표정을 그리면 갭이 엄청나다. 그게 너무 뜻밖의 일이라 카논은 사라보다 더 의아해졌다.
물론 사라도 성역에 온 초창기에는 무슨 말만 하면 샤카가 나오는 것에 굉장히 의아해했다. 거기에는 짜증 난다는 감정도 적잖이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전부 초창기에 한정되는 일이다. 이때까지 샤카 및 주변인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결과, 사라는 ─샤카의 감정을 눈치채는 것과는 별개로─주변인들이 다들 샤카를 들먹이는 데 익숙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딱히 샤카가 나왔다고 이상해할 것은 없을 텐데.
“뭐냐, 그 표정은.”
“아니…….”
사라가 우물쭈물 거린다. 이제는 저런 모습만 보면 나쁜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리니 참 이상한 일이다. 또 무슨 폭탄 발언을 하려나 싶었지만 의외로 나온 말은 정상적이었다.
“그 사람 눈도 뜰 수 있나요?”
설마 시각장애인인 것도 모자라 눈도 뜰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 카논은 사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스토커가 자기가 스토킹하는 대상에 대해 잘 아는 법은 많지만 당하는 사람이 스토커에 대해 잘 아는 일은 없는 법이다. 내심 안도하고 내심 한숨을 내쉬며 카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뜰 수 있는 게 당연하잖아.”
“……진짜요?”
“멀쩡히 볼 수도 있다만.”
“엑……….”
왜인지 사라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깜짝 놀라 카논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사라? 몇 번을 반복한 끝에 세이야가 불렀을 때야 겨우 한마디를 중얼거렸을 뿐이다.
“……쇼크다.”
카논은 삐져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삐진 카논은 나 몰라라 한 채 사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맹인인줄 알았던 샤카가 사실은 두 눈이 멀쩡하다고 한다. 충격이다. 그렇다고 배신감이 든 것은 아니다. 제가 착각한 것이지 샤카가 자신을 속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어처구니가 없었을 뿐이다. 도대체 왜 멀쩡한 눈을 감고 다니는 건데?! 조금은 정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배신감이 든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이쪽이리라.
자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샤카가 조금은 정상이길 바라며 사라는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누가 내게 해명을 해줘. 간절한 시선에 슌이 쓴웃음을 짓는다. 아무래도 시선만으로도 사라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차린 듯하다.
“처녀좌─버고─에게 대대로 전승되는 수행법이래요.”
오감 중 하나를 봉인함으로써 막대한 코스모를 축적하는 수행─이라고 슌이 설명한다. 그 말을 듣고 사라는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수정했다. 샤카만 괴짜인 게 아니라 버고들이 대대로 괴짜인 것 같음.
사라는 슌을 빤히 쳐다보았다. 성역에 끌려온 지도 꽤 됐다 보니 기본적인 정보만이 아니라 좀 더 내밀한 이슈까지 접한 덕분에 걱정이 되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슌도 나중에 그렇게 수행하는 거야?”
“글쎄요.”
애매한 대답이다. 자신이 골드 세인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데 영 열의가 없다. 배부른 태도 같지만 슌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납득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하긴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은 뜬구름 같은 얘기이기도 했다.
세이야를 비롯한 브론즈 세인트 5인방이 각자 골드 크로스를 잇기로 되어있다는 사실은 사라도 잘 알고 있다. 대개는 반쯤 농담처럼 말해지지만 실력으로 보나 업적으로 보나 그게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닐 뿐이지.
성전에서 보여준 세이야들의 힘은 어디까지나 극한 상황에서 발휘된 잠재력에 가까운 것으로 평소에 발휘하는 힘과는 편차가 크다. 즉, 평소에는 저력을 100% 발휘하지 못한다는 소리다. 당연히 골드 세인트에게 그런 물렁한 말이 통할 리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힘을 다 사용할 수 있게 수련을 통해 자신을 더욱 갈고닦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골드 세인트들은 아직 팔팔한 20대, 한창 현역이다(물론 누군가는 현역 나이는 물론이고 인간의 기본적인 수명마저도 초월했지만 육체는 골드 세인트 중 제일 어리니 넘어가고). 이런 상황에서 굳이 성역 최고의 전력을 미숙한 아이들로 갈아치울 이유는 없다. 실제로 브론즈 세인트들이 골드 세인트가 되려면 적어도 5, 6년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며 사라는 다시 샤카에게로 사고를 되돌렸다. 자연히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늘고 섬세한 얼굴선,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황금의 머리카락,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속눈썹, 균형 잡힌 이목구비. 장인이 공을 들여 만든 것 같은, 일반 여성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미모. 그 얼굴이 취향이라고 므우에게 말했던 건 결코 농담이 아니다.
허나 머릿속의 샤카는 언제나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눈 뜬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사라는 그가 눈을 뜬 모습을 상상해본 적도 있었다. 제대로 상상이 되지 않아 금방 그만뒀지만.
새삼 궁금증이 솟아올랐다. 과연 샤카는 어떤 색의 눈동자를 하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 그 눈동자에 자신은 어떤 색으로 비치고 있을까.
“너희는 샤카가 눈 뜬 거 본 적 있어?”
브론즈 세인트들에게 묻자 시류와 효가가 애매한 얼굴을 한다. 그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너희도 본적 없구나. 무심코 표정이 굳는다.
가라앉는 분위기를 느꼈던 건지 슌이 중간에 끼어들어 중재했다.
“샤카가 눈을 뜨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까요.”
그것도 그렇다. 일종의 수행이라는데 시도 때도 없이 눈을 뜨고 다니면 그게 더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슌의 말투에서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사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슌은?”
“저랑 세이야는 본적이 있지만…….”
슌이 세이야와 시선을 마주쳤다. 둘 사이에 마치 공범자 같은 기류가 흘렀다. 고민하고 있던 세이야가 시선을 받고 겨우 입을 열었다.
“녹색이었나 푸른색이었나~”
“확실히 그런 느낌이었지?”
“……라는 건 너희도 잘 모른다는 소리네.”
사라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딱히 비난은 아니다. 하지만 슌에겐 비난으로 들렸는지 소년의 뺨이 조금 붉게 변했다.
“아니, 저희도 볼 수 있었던 건 싸우고 있었을 때뿐이니까요…….”
하긴, 한창 싸우고 있을 때 상대의 눈동자 색이 무슨 색인지까지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슌의 얼굴이 겨우 펴졌다. 옆에서 시류가 쓴웃음을 지으며 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다.
그나저나 이래서는 얘기가 원점이다. 사라는 문득 잇키가 그리워졌다. 그 방랑벽 있는 소년이라면 샤카와 인연이 깊은 만큼 그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 확실히 알고 있을 텐데. 뭐, 만날 때마다 불쾌한 듯 탐탐치 않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지만 잇키가 아니더라도 샤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사라는 고개를 획 돌려 옆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부 무시하고 집무에만 열중하고 있는 쌍둥이를 보았다.
카논은 여전히 삐져있는 채였다. 사라는 둔한 편이지만 카논이 어떤 기분인지는 대개 알 수 있다. 그와 뭔가 특별한 관계여서 그런 게 아니라 카논이 워낙 감정표현에 솔직해서이다. 물론 카논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교활한 어른이긴 했지만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에서는 좀처럼 뭔가를 숨기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얼마나 삐졌는지 다 보일 정도다. 상당히 많이 삐졌구나. 잠깐 내버려두자.
어차피 얼핏얼핏 들었던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도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단 하나, 그나마 많이 친해진 골드 세인트들 중에서 사라가 유이(有二)하게 어색해하는 사가다.
빤히 시선이 쏟아진다. 결국 견디다 못한 사가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푸른색이다.”
“……굉장히 성의 없는 대답이네요.”
아까 세이야들이 말한 대로 푸른색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법인데.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고요. 물론 이 남자에게 장황하고 자세한 묘사를 듣길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하지만.
뭐, 상관없나. 어쨌든 최소한의 호기심은 충족시켰겠다, 바쁘게 일하는 사람을 괜히 괴롭힐 마음은 없었으므로 사라는 더 추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논이라면 몰라도 사가를 추궁할 정도의 담력은 없는 거지만.
사라는 조용히 숨을 삼키며 자신도 다시 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샤카가 서고로 쳐들어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샤카. 좋은 날씨네요.”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만.”
“…………사람에 따라서는 좋은 날씨일 수도 있는 겁니다.”
사라는 제멋대로 지껄여대는 제 입을 저주했다. 누가 살려주세요!!
사라는 서고에 나 있는 조그만 창으로 바깥 풍경을 쳐다보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큰비는 아니다. 실보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조금씩 내리고 있다. 그래도 날씨가 날씨인지라 한낮인데도 어둑하다. 하지만 별로 음울한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어스름한 은빛 안개에 감싸인 것처럼 무거우면서도 어딘가 청량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곳이 성역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성역, 신의 구역. 아테나의 성스러운 힘에 보호받는 곳. 그 의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클 것이다.
……라고 여러 가지로 현실도피를 하던 사라는 곧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앞에서 꿈쩍도 않고 서 있는 샤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게 아니길 바랐지만 역시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일단 샤카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샤카의 습격에 대비하여 서고 한쪽에 상비하고 있는─를 타왔다. 비 때문에 조금 내려간 체온에 찻잔의 온기가 기분 좋게 녹아든다.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 기분 그대로 사라는 샤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샤카는 얌전히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매번 남의 심장을 나쁜 의미로만 폭행하는 주제에 여유로운 모습이 얄미울 만도 하지만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사라는 그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포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샤카.”
“음. 나에 대한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또 누가 일러주던가요?”
물으면서도 사라는 대충 범인을 짐작하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예외가 있긴 하지만 사라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는 건 8할이 미로, 1할이 카논, 나머지 1할이 기타 등등이다. 하지만 어제 대화를 했을 때 그 자리에 미로는 없었다. 그렇다면 98%의 확률로 카논이 범인이다. 왜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삐져있기도 했으니 확률이 더 올라간다.
허나 세상만사가 꼭 예상대로 굴러가지는 않는 법. 샤카의 대답은 사라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슌이 말해주더구나.”
‘믿었던 너마저!!!!’
도끼에 찍힌 발등이 아프다. 아니, 아픈 건 마음인가. 어느 쪽이든 회복 불능의 상태라는 건 변함없다. 사라는 속으로 눈물을 훔치며 결심했다.
‘……한동안은 슌의 얼굴도 보지 말아야지.’
물론 지킬 수 없는 맹세가 되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달각, 작은 소리를 내며 샤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째 벌써 지쳐버렸다. 이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하지만. 내일은 꼭 꾸덕꾸덕한 브라우니를 먹어주고야 말리라. 조그맣게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했느냐.”
“…………? 못 들으셨나요?”
“자세한 내용은.”
샤카가 턱을 치들었다. 별말은 없지만 설명하란 뜻이 분명하다. 반항할 용기도 없던 사라는 얌전히 어제 있었던 대화를 설명했다. 사실 별 대단한 얘기도 아니긴 했다.
짧은 설명이 끝나자 샤카가 고개를 갸울였다.
“그건 내 눈동자가 보고 싶다는 뜻인가?”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데요.’
하지만 호기심이 없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라 사라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샤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여전히 예쁜 미소였다.
“보여줄까?”
사라는 눈동자를 깜빡였다. 기분 탓인지 샤카는 굉장히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눈 떠도 괜찮나요?”
“물론이다.”
대답이 시원시원하다. 하지만 사라는 오히려 불안에 휩싸였다.
샤카가 항상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수행 때문이라 들었다. 정확하게 체감할 수는 없지만 사라도 세인트들에게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정도는 안다. 그런데 고작 한 사람의 호기심 때문에 수행을 중단하겠다고? 물론 아주 잠깐이니 골드 세인트쯤 되면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솔직히 말하자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용기가 부족하다. 정말이지. 외모와 다르게 굉장히 어린아이 같고 속 좁은 남자라서 문제라니까. 결국 사라는 모든 생각을 내던졌다.
“……부탁드려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천히 샤카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여자보다 긴 속눈썹이 조그만 그림자를 드리웠다. 눈동자의 색은 사가가 말한 것처럼 파랑. 램프의 불빛 때문인지 옅게 오렌지색이 섞여 있다. 아름다운 색이다. 사라는 멍하니 푸른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색만 따지면 효가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효가가 좀 더 투명한 느낌인데 반해 샤카의 눈동자는 다채롭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고작 보석 따위에 비교하는 게 미안해질 정도다. 무심코 달콤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라?”
아프로디테나 므우 못지않은 미모라 나름 각오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평소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폭행당했지 말입니다. 눈을 뜨니 감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취향이다(물론 어디까지나 외모만). 으, 속눈썹 만져보고 싶어.
“사라?”
신도 참 불공평하시지. 어째서 저런 외모에 저런 성격을. 성격이 정상이었다면, 아니 조금만 더 멀쩡했다면 자신은 이미 반해있었을 텐데.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자신이 샤카에게 반해서 뭘 어쩌겠다고.
“사라.”
“…………네?”
사라는 멍청하게 반문했다. 바로 코앞에서 샤카의 얼굴이 보인다. 한 박자 뒤에야 제가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귀가 뜨겁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샤카가 내쉰 한숨이 똑똑히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냐.”
“아니, 샤카의 얼굴이 참 취향이라 반할 것 같다는…….”
무심코 대답하던 사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허나 이미 내뱉은 말을 주울 수는 없었다.
“호오?”
망했다. 사라는 10초 전의 자신을 저주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내뱉어서는. 자신 같은 여자에게 반할 것 같단 소릴 들어봤자 샤카가 기분이 좋을 리도 없을 텐데.
사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오해를 푸는 게 먼저였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얼굴 만요! 성격은 전혀 아니니까요!”
“…………그런가.”
샤카가 느릿하게 수긍한다. 다행히 오해란 걸 알아준 듯싶다. 모처럼 힘주어 말한 보람이 있다며 사라는 안심했다.
말하다 보니 해명이 아니라 비방이 되어버린 건 모른 척했다. 일단 속으로 사과는 했으니 문제는 없다. 더불어 이유는 모르지만 샤카가 짧게 혀를 찬 것도 모른 척했다. 속이 꼬인 사람을 괜히 건드려봤자 좋은 꼴을 볼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내 눈동자는 어떤 보석에 비유할 생각이지?”
샤카가 간신이 얘기를 원 궤도로 되돌린다. 사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심하다 제가 느낀 바를 솔직히 얘기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보석에 비유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예쁜 눈동자라서요.”
“그래?”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샤카가 웃었다고 인식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일순, 사라는 호흡을 멈췄다. 쿵쾅쿵쾅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 귓가에 울렸다. 자신의 심장 소리다. 심장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다. 마치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의 흐름까지 들려줄 듯이. 하지만 갑자기 왜? 당황한 사라는 가슴께에 살짝 손을 올렸다. 당연하지만 그 정도로 심장이 진정되진 않는다. 샤카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너의 눈동자는 호박琥珀 같구나.”
“아, 그건 세이야랑 겹치니까 삼가주세요.”
척수반사로 대답이 나갔다. 수 초의 침묵 후 샤카가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너는…….”
샤카가 낙담하는 이유도 모른 채, 사라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됐다.
덤 1.
이야기가 있고 나서 며칠 뒤의 일이다.
서고에서 책을 읽고 있다기보다는 뒹굴고 있던 세이야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럼 사라는 무슨 보석이지?”
느닷없는 막내의 물음에 시류는 눈을 깜빡였다. 이미 끝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세이야에겐 아니었나보다. 하지만 워낙 고지식한 성격이라, 시류는 핀잔주는 대신 서고 한쪽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라를 바라보았다.
사라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별 특징 없는 갈색이다. 좋게 말하면 무난한 색이고 나쁘게 말하면 흔한 색.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세이야와 비슷한 색이니─
“……호박琥珀?”
“아니, 그거 세이야랑 겹치니까 말하지 말라니까.
전혀 대화를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라가 느닷없이 끼어든다. 시류는 그에 어이없어하는 대신 말의 뉘앙스에 주목했다.
“혹시 다른 사람과도 비슷한 대화를 했습니까?”
“응, 샤카랑.”
뭐가 문제 될 게 있어? 라고 눈동자로 묻는 사라를 보며 시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둔해서 다행인지 아닌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었다.
덤 2.
“샤캬가 사라의 남자 취향이랑 일치한다면서?”
뜬금없는 형의 말에 아이오리아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말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그렇게 말하는 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코큐토스는 가볍게 상회할 것 같은 냉기가 폴폴 풍기고 있다. 왜 형의 뒤에서 하데스보다도 무서운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얼어서 신음도 내지 못하는 아이오리아를 대신해 대답한 건 므우였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 아리에스의 남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평소보다 반짝이는 미소를 흩뿌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얼굴만이니까. 성격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고 하더군요.”
“하하, 그건 다행이네.”
아이오로스가 싱글벙글 웃는다. 그러면서도 등 뒤의 기세는 힘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므우의 기세랑 합쳐져 더더욱 압박을 늘려가고 있다. 가볍게 해충─내 동생(혹은 누나)을 노리는 남자들─박멸 모드에 들어간 형과 동료를 보며 아이오리아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어쩌다 다들 이렇게 됐지.
다 쓰면 모아 올리다보니 매번 올리는 걸 까먹네요
이제 한동안의 여유도 끝났으므로 또 예전처럼 드문드문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쓰고 싶은 글은 많아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