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라다판도]침묵의 밤
*세세 로캔 라다만티스X판도라 커플입니다
*판도라가 하데스님께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개인적동인적 해석, 설정이 과다합니다 캐붕도 과다
*모두 괜찮다 하시는 분만 아래로
하데스 성의 공기는 얼어붙은 것처럼 청정했다. 깨끗하고 깨끗해서, 세계와 단절되는 것과도 같은 이질감. 흘러들어오는 별빛마저도 어딘지 굴절된 것 같다. 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실은 결계가 아닌가, 하고 판도라는 생각했다. 세계를 배척하고 타인을 거부하는 절대적인 영역. 물론 그렇게 생각한 것은 모두 기분 탓이다. 실제로 하데스 성에 결계가 쳐진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 성전의 종결 이후 아테나 측과 나름대로 평화협정 비슷한 것을 맺은 뒤로는 결계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그래, 모두 과거를 반추하는 그녀의 기분 탓.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판도라는 창을 열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른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 조금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과거, 하데스 님만을 위해, 하데스 님만을 모시며 살아가던 그녀는 분명 어느 정도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후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찢겼을 때보다는 훨씬. 달콤한 꿈을 꾸고 있던 것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글쎄, 아무래도 그것은 아니었다. 그녀만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성전을 통해 많은 것이 바뀌었으니까, 설령 홀가분해지지도 무언가 납득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다 해도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그럼에도 결국 다시금 과거를 떠올리고 마는 것은 행복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정말, 이제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것은 그만둬야 하는데도.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판도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에 조용하게 빛나는 천체. 아직도 흑백의 풍경이지만 아름답구나, 하고 모처럼 생각했다. 마지막 밤이 이렇다면 그다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밤에 취해가고 있는데 문득 근처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리 명투사라고 해도 기본은 인간, 해서 숙면을 취하고 있을 이런 한밤중에 누군가 깨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라며 판도라는 기척을 느낀 곳으로 얼굴을 향했다. 농밀한 색의 나무 그늘 안에서 실루엣이 형체를 가진다. 그리고 둔탁한 역광 안에서 친숙하다고도 할 수 있는 상대를 확인하고 그녀는 다시금 놀랐다.
“라다만티스?”
반사적인 뇌까림에 라다만티스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와는 달리 그는 평소처럼 초연한 기색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조금이라도 놀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먼저 상대를 발견한 것은 아마 그일 터이니 별달리 이상할 것도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원래 감정이 그다지 표정에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단 몇 걸음 만에 라다만티스는 판도라의 앞으로 걸어왔다. 마스크에 그늘이 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실내 안팎 바닥의 높이차 때문에 평소와는 다르게 라다만티스가 무릎 꿇지 않아도 손쉽게 그녀가 그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왜인지 유쾌해져 판도라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마지막이라 기분이 고양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홀가분함과 단편의 미련을 가득 담아 그에게 농을 하듯 말을 건넸다.
“이런 곳에서 보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던 거지, 라다만티스?”
“당신이야말로, 판도라 님.”
맞부딪치듯 답변이 되돌아온다. 그가 올려다봐 달빛에 단단한 턱이 조금 드러났다. 조금씩 움직이는 턱을 바라보며, 판도라는 창틀에 손을 집고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였다. 상대는 미동도 없다.
“바람이 찹니다. 들어가시길.”
이어지는 말조차 단단하기 그지없다. 다른 자가 말한다면 의례에 불과한 대사조차도 이 남자의 입을 통하면 한없는 진심인 동시에 딱딱하고 거리를 두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참으로 그다워 판도라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 그런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영원을 떠올리고 만다. 하지만 판도라는 이제 그에게조차 영원이란 단어를 적용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안타까움을 속으로 집어삼키고, 판도라는 뒤돌아보라는 듯 그에서 짧게 손짓했다. 조금 의아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충견은 착실하게 명에 따랐다.
서플리스에 둘러싸인 몸은 본디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 안 그래도 커다란 전사의 몸은 이쯤 되면 과장되게 말해, 판도라에게는 태산과도 같다. 어둡게 빛나는 명의는 그야말로 밤의 색. 허공에 뻥 뚫린 공동 같은 이 모습을, 그렇지만 무엇보다 크고 든든하고 올곧은 이 모습을 판도라는 계속해서 보아왔었다. 언제고 그녀를 지탱해주었던 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고 더더욱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그의 뒤통수에 약하게 이마가 닿았다. 머리카락이 뺨으로, 가슴께로, 그의 어깨로 쏟아진다. 손끝에 닿은 건 차가운 서플리스의 감촉. 이렇게 닿아있음에도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는 채, 손바닥 아래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움칠거리는 어깨를 부러 모른 척하며, 판도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별의 말은 예상했던 것보다 매끄럽게 나왔다. 이를 마지막으로 모든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래서 꿈틀 움직이려는 몸을 손끝으로 누르고 계속해 제 속에 있는 말을 풀어내었다.
“너는 항상 나를 떠받쳐주었지.”
제게 쏟아지던 중압감에 치를 떨던 어린 날을 기억한다. 연약한 여자아이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휘둘려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제 존재의 의의마저 타인에게 규정당한 채,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었던 꼭두각시. 그럼에도 그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구명줄이라, 붙잡고 버티려고 악을 쓰려고 하고 있었다. 손바닥이 다 까져 피 흘리고 괴롭더라도 오로지 그것만을 행복이라 믿으며.
그리고 지쳐 줄을 놓쳐버릴 것 같았을 때마다 그녀에게 다시 줄을 쥐어 준 자가 라다만티스였다. 몸을 낮춰, 다른 자들이 불만으로 가득 찼을 때에도 묵묵히, 제 드높은 긍지를 세우며, 최후까지 그녀의 곁에 있어주었던 유일한 남자.
“비록 너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분명히 구원. 그녀에게 몇 번이고 숨을 불어넣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던 충성. 단지 옆에 있어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게 하였던 행동들.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결단코 잊지 못할 터다. 언제까지고 가슴에 새기고 나아갈 터다. 이 회색으로 가득 찬 세계를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회상할 터다. 이제 라다만티스는 제 옆에 없을 테니까.
“그래도 고마웠다.”
그리고─
흘러나오려는 미련을 삼킨다. 작게 숨을 들이켜고 판도라는 라다만티스에게 최후의 말을 고했다.
“이렇게 마지막에 전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아까와는 반대로 이마를 떼고, 몸을 바로 세우고, 그의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치웠다. 아직 가슴 한구석에 미련이 뭉쳐 남았지만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상쾌한 감정이 온몸 구석구석을 가득 채운다. 이걸로 되었다. 이걸로 이제 괜찮다. 아직 서플리스의 서늘한 감촉이 남은 손바닥을 말아 쥐고, 판도라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이젠 안녕. 작별이다.
그녀가 부드럽게 접촉해왔을 때 라다만티스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평소 수하를 이끌고, 하데스 님을 떠받치던 드높은 긍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채로, 무력하고 멍청한 남자가 되어 크게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뒤이어진 감사의 말만을 겨우 알아듣고 머리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져, 오히려 맥이 탁 풀려버릴 정도였다. 언제고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은 적이 없지만 이번만큼 제대로 휘둘린 것은 그로서도 처음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들떠버린 것도 진실. 덕분에 라다만티스는 판도라가 한 말의 미묘한 뉘앙스를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채고 나서도 그 뜻을 제대로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이라고. 심장에 겨우 확실하게 닿은 말에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전보다 더욱 크게 동요하고, 다만 감정에 서투르기만 한 남자라 어떤 반응도 제대로 보이지 못한 채, 겨우 주먹만을 세게 말아 쥐었다. 나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보고 있지 않았지만, 마지막. 어금니를 짓씹었다.
최후의 말을 던지고 그녀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린다. 검은 머리카락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플리스 너머로 약한 맥박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적막을 깨트리며 구두 소리가 울린다. 짧고 아득한 순간이 지나고, 참을 수 없는 화를 터트리며 라다만티스는 여느 때보다 기민하게 몸을 움직였다. 단숨에 창을 타고 넘어 사라지려는 팔을 붙잡았다. 그 팔은 커다란 남자의 손에는 너무나 가느다래, 그토록 독한 말을 내뱉은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연약했다. 드러난 손끝이 그녀의 팔목 안쪽을 쥐어, 고동이 느껴진다. 두근, 하고. 이 가냘픈 팔을 쥐어뜯을 수 있다면 좋을까.
“라다만티스.”
판도라의 호명에 라다만티스는 정신을 차렸다. 물론 여전히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처음 손목을 붙잡혔을 때 당황하던 판도라는 이미 능숙하게 제 표정을 감춘 채였다. 제대로 된 군림자의 모습이다. 라다만티스는 그 사실에 더더욱 진노했다. 차라리 이전에 그랬듯 어린아이처럼 제멋대로 행동하고 더없이 오만하게 구는 편이 나았을 터다. 어째서 그런 모습을 하는가.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여린 눈을 하고 다 포기한 듯한 어조로 말하는 겁니까.
“마지막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명해주십시오, 판도라 님.”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속에서 들끓는 것이 전부 목구멍에서 막혀있는 것 같다. 질책과 다름없는 말에 상대의 눈동자가 조금 무너진다. 그럼에도 판도라는 이전에 명령을 내릴 때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답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라다만티스. 내일 하데스 님께 물러남을 고할 터, 내가 명왕군의 간부로 있는 것도 이 밤이 마지막.”
망설임 없는 대답에서 라다만티스는 판도라의 굳은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떻게, 라고 생각하면서도 라다만티스는 한편으로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인을 모시고 충성하고자 했던 그는 모든 고난마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괴로울 일은 오로지 실책을 범했을 때뿐. 하지만 그런 그와는 다르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당하고 휘둘리기만 했었다. 주인을 모시는 것이 유일한 존재의 의의라고 했지만 그 의의마저 타인에 의해 정해진 것. 그랬기에 라다만티스는 그녀에게 공감하지는 못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더라도, 판도라 님 당신이 어찌─
차라리 노성을 터뜨리고 싶었다. 괴로울 정도로 애끓는 이 마음은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음도 호의도 모두 부정당해서, 결국은 이런 얄팍한 관계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제대로 전해진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렇게나 당신은 나를 몰랐다.
“당신을 바라본 적이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분노했기에 오히려 힘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원래라면 보일 리 없는 모습에 판도라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라다만티스는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낼지도 몰랐지만 안타깝게도 라다만티스는 이런 방법밖에 몰랐다. 상냥하게 어르고 달래, 그녀를 붙잡아둘 방법 따위는 몰랐다. 그저 욱신거리는 손끝을 무시하고 잡은 손을 놓치지 않을 뿐.
“제게 있어 당신은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판도라 님.”
분명 라다만티스가 충성을 바친 대상은 판도라가 아니다. 당연하다. 자신의 오롯한 주인은 하데스였고, 명왕군에 충성을 바치는 것만이 그의 존재의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는 소리가 되진 않는다. 어찌 보지 않을 수 있는가. 필사적으로 허세를 부려가며 꼿꼿이 서 있던 조그마한 소녀를. 그 모습이 애참했고 일말의 존경심마저 품었다. 이것은 서글픈 동지애일지도 모르고 답지 않은 동정일지도 몰랐지만 어찌 되었든 라다만티스는 조그만 감정을 품고 확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라진다고? 말도 안 된다. 이미 라다만티스에게 있어 판도라와 명왕군은 동일한 의미였다. 그녀의 곁에 있었던 오랜 시간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하데스 님과는 또 다른, 유일하고 소중한 사람. 설령 다른 108 마성이 스러진다고 해도 그녀만 있으면 됐다. 쌍둥이 신들마저 범접하지 못하는 영역에 유일하게 범접이 가능한 자도 그녀뿐이다. 그러니까 판도라가 사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래, 알고 있다. 이것은 격렬한 이기심이다. 그녀를 생각한다면 붙잡아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다만티스는 바라고 말았다. 있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이 나를 위해.
천천히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마지막 희망처럼 그녀의 손목만을 간신히 놓치지 않고, 라다만티스는 고개를 숙였다. 시야 끝에 조그만 발이 보였다. 꼬리 만 개처럼 차마 상대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졸렬함이 부끄러웠다. 이래서야 파렴치한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래도.
“부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희미한 말이 바닥으로 떨어져, 부딪혀 깨졌다.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판도라 님.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마저 죄악이 될까, 라다만티스는 말을 반쯤 삼켰다. 답지 않은 초조감과 겁마저 숨기지 못했다. 좀 더 유려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달빛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발끝부터 차고 오른다. 과연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옅은 침묵이 둘 사이를 휘감았다.
판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다만티스도 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유구한 밤의 시간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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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정리가 잘 안됐기에 쓰는 데 힘들고 질질 끌었던 글
그래도 이 역시 완성했으므로 만족'ㅅ'-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