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3 Please come down like an angel
서고 안으로 들어서던 시류는 무심코 발걸음을 멈추었다.
채광이 좋지 않은 서고에는 어슴푸레한 빛만이 바닥에 가라앉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별로 상관없었겠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분위기다.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은 어딘가 무겁고 뒤틀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성역 자체의 엄숙하고 신성한 분위기가 아니라 어딘가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이런 곳이라면 유령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라고 시류가 생각한 순간 한줄기의 불빛이 시야 한구석을 가로질렀다. 무엇인가 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타이밍 좋게 뒤쪽에서 갑자기 기척이 출현했다. 시류는 무심코 소리를 내질렀다.
“유령?!”
“사람입니다.”
비명에 가까운 물음에 담담한 대답이 돌아온다. 상황에 맞지 않는 침착함에 시류는 상황을 파악하고, 어깨에 힘을 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자신이 제법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시류는 상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있는 건 램프를 들고 있는 아담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간접 조명에 비친 얼굴이 의외로 앳되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시류는 그제야 이곳에 오기 전에 들은 정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서고에 새로운 관리인이 왔다고 했던가. 분명 이름이─ 사라, 라고.
사실 시류는 골드 세인트들로부터 사라에 대해서 들은 얘기가 많았다. 그렇지만 모두가 얘기하는 건 전부 비슷하면서도 달라, 시류는 도저히 사라라는 여성에 대해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주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어렴풋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뿐.
불빛이 흔들렸다. 사라가 램프를 들어 올렸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박명 속에서 여자의 다갈색 눈동자가 빤히 시류의 얼굴을 응시한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사라가 말끝을 흐렸다. 그것을 수상한 자에 대한 의심이라 생각한 시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드래곤의 시류입니다.”
자기소개에 사라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자신을 알고 있던 것 같은 행동에 시류는 조금 놀랐다.
“저를 알고 계십니까?”
“므우에게 몇 번 들은 적이 있어서.”
어느새 편해진 말투로 사라가 대꾸한다. 여자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흥미라기보다는 호의에 가까워, 시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도대체 그녀는 왜 자신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시류가 그것을 물어보기보다 먼저, 사라는 몸을 돌렸다.
“찾는 책이 있다면 말해줘, 찾아줄 테니까. 그리고 가지고 나갈 거면 나한테 와서 말해주고.”
짧게 주의를 준 사라는 서고 한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램프 불빛에 비쳐 어슴푸레하게 빛난다.
시류는 그것을 바라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당초의 목적대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서고 안은 어두웠지만 어떤 책이 있는지 확인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류는 천천히 책 제목을 손가락으로 읽었다. 거친 감촉이 손가락에 남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류는 흘끗흘끗 사라를 바라보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 친밀함이 기분 탓, 이라고 여겼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사라와 시선이 맞았다. 시류는 허둥지둥하며 눈여겨보고 있던 책 몇 권을 뽑아들었다.
“……이것을 빌려 가도 될까요.”
“아아.”
간신히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책을 가져다주자 사라가 그것을 기록했다. 아마 모든 것을 손으로 일일이 기록하는 모양이다. 거추장스러운 관리방법이지만 성역은 전혀 현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어쩔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록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시류는 책을 들어 올렸다. 빌린 책은 총 다섯 권. 게다가 그 하나하나의 크기가 일반 서적보다 훨씬 크다. 무게야 별문제가 되지 않지만 부피는 좀 문제다. 혹시 떨어트리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됐다.
조심해서 가야겠다고 고지식하게 마음먹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가 제일 위에 있던 책 두 권을 가져갔다. 놀라서 시선을 들자 그녀가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와줄게.”
“아니, 괜찮습니다.”
혹여 폐가 될까 시류는 반사적으로 거절했다. 그런 시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라는 소년보다 먼저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신경 쓰지 마. 이게 내 일이니까.”
그리고 익숙해지기도 했고, 라며 어딘가 음침한 얼굴로 사라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니 더 거절하는 것도 예가 아닌 것 같아 시류는 일단 조그맣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당연한 인사일 터인데도 사라는 시류의 인사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희미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시류는 생각했다. 아, 역시 생각과는 전혀 달라.
함께 걷긴 했지만 시류는 사라와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면 사라는 원래 무뚝뚝한 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점이 별달리 불편한 것은 아니었기에 시류는 의외로 편안한 기분으로 있을 수 있었다.
그대로 사라와 함께 보병궁으로 들어서면 시끌벅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소년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류는 그들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형제들의 시선이 와르르 쏟아졌다. 모두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묻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옆의 사람은 누구?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시류가 아니라 사라였다.
“사라.”
무뚝뚝한 목소리는 조용한 공간에 매우 잘 울렸다.
그 이름을 듣고 세이야가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페가수스의 소년이 무구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 폭탄을 떨어트린다.
“아, 샤카의 애인?”
“세이야!”
천진난만한 막내의 모습에 시류는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 확실히 그런 소문을 들은 건 사실이지만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다. 어느 정도의 무례라면 넘겨줄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면 모를까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 멋대로 주워들은 소문을 말하는 건 자칫하면 실례가 된다. 세이야에게 전혀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러나 당사자인 사라는 책을 내려놓으며 의외로 담담한 모습으로 반문했다.
“미로냐?”
“아니, 카논.”
대답하며 세이야가 킬킬 웃는다. 그 모습에 시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야의 옆에 앉아있던 슌은 쓴웃음을 지었으며 효가마저도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냐, 하는 시선으로 세이야를 쳐다봤다. 이 자리에서 태연한 건 오로지 세이야와 사라뿐이다.
잘못을 저지른 건 세이야인데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인가. 시류는 조그맣게 한숨을 떨어트리며 사라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표정에 워낙 변화가 없으니 정말로 괜찮은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세이야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사라의 모습이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시류는 조금 안심했다. 물론 나중에 세이야에게 한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정말이지, 자신들의 막내 동생은 제대로 된 트러블 메이커였다.
전갈좌─스콜피오─의 미로에 대한 성역의 평가는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아테나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에 사려 깊은 훌륭한 세인트. 물론 단순하고 열혈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오리아에 비하면 닥치고 돌진하는 부분은 적다. 뇌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머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로가 개성이 강한 인물, 이라기보다는 괴짜가 많은 이 성역에 드문 상식인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틀에 맞춰져 있는 상식인은 언제나 자신의 사고의 범위를 벗어난 괴짜를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
“저 아이들은 혹시 천사입니까?”
브론즈 세인트들과 잘 얘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달려와서 이딴 소리나 내뱉는 사라에게 미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뜬금없어도 너무 없다. 사라가 장난이나 농담처럼 말했다면 미로도 그러려니 했겠지만 슬프게도 그녀는 지나치게 진지한 것 같았다.
물론 이전에도 미로와 사라의 대화가 엇갈리는 일이 없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 성별이나 나고 자란 환경, 가치관의 차이처럼 감정적으로야 어쨌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범위 내에서의 어긋남이었다.
설마 이 녀석이 이렇게 괴짜였을 줄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미로는 어딘가 흐린 눈으로 약하게 반박했다. 다만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반박도 어딘가 핀트가 어긋나 있다.
“……천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무슨! 신도 요정도 있는데 천사라고 없을 리가 없잖아요!!”
그녀로서는 드물게 힘 있는 반발이었다. 그 반발에 미로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뭔가 종교가 다른 것 같지만 그건 차치하고.
미로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사라는 옆에 있던 카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진지하고도 간절한 눈길을 받고 제자 바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천사가 맞다.”
“역시!”
“어이 어이 어이.”
무심코 제지를 걸었지만 이미 자신들만의 세상에 빠진 카뮤와 사라는 당연히 듣고 있지 않았다. 그야 들었더라도 둘은 미로의 말을 열심히 부정했겠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만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미로가 시선을 돌려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미로도 세이야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긴 했다. 물러서지 않는 용기에 그들을 한 사람의 전사로 인정했고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의 강함에 감탄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데도 열심인 모습이 기특하기도 했고, 그들이 결국 아테나를 지키고 지상을 구했다는 사실은 선배로서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아마 이것은 다른 골드 세인트들도 비슷할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천사는 아니잖냐.“
괴짜들의 생각은 도저히 모르겠다며 결국 미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이야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소년의 시선 끝자락에 진지하고 열성적인 태도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뮤와 사라의 모습과 얼빠진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는 미로의 모습이 들어왔다. 턱을 괴고 그들을 관찰하던 세이야는 으음, 하고 의미 없는 신음성을 내뱉었다.
“뭔가 생각과는 엄청 다르네.”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이 자리에서 그 말을 듣지 못할 사람은 없다. 막내의 중얼거림에 형들은 모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들이 들은 사라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사가와 알데바란이 성실하고 건실한 처녀라고 말한 데 반해 므우는 동정을 내비쳤고 아이오리아는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 평했다. 거기에 미로는 이상한 데서 엉뚱한 녀석, 카논은 엄청 재밌는 녀석, 아이오로스에 이르면 보고 있으면 질리지 않는 아가씨라고까지 말해졌다. 이런 말을 듣고 제대로 된 사람을 떠올릴 리가 없다. 덕분에 초인적이고 괴상한 인물상을 그리고 있었지만.
세이야는 사라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평범한 다갈색의, 미동 없는 눈동자. 그럼에도 소년은 무기질적인 눈동자에서 상냥함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여신과 같은 자애로움과도 성자聖者와 같은 온화함과도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웃으며 인사해주는 누나와 같은, 일견 초라해 보일지도 모르는 일상적인 따뜻함.
“그냥 평범한 누나였지?”
라고 세이야가 확인하듯 물어보자 슌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쏟아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조금 무뚝뚝하긴 했지만.”
“그런가? 말수가 적단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표정이 빈약해서 그런 게 아닐까? 내가 볼 땐 싹싹하지만 조금 엉뚱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내가 유령이냐고 외쳤을 때 진지하게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했었지.”
과연, 하고 모두 무심코 납득했다. 엉뚱하단 미로의 말까지 넘겨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모두의 말이 다 맞을지도 모른다며 세이야는 자신도 모르는 새 정답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득 슌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어딘가 형이랑 닮았어.”
“““아니, 그건 아니라고 봐.”””
슌을 제외한 셋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스물이 넘은 처녀랑 남자다움의 대명사인 잇키랑 비교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다. 비록 그 처녀가 조금 무표정하고 말투가 딱딱하고 감정표현을 하는 데 서투르더라도, 말하면 말할수록 왠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 같더라도, 무리가 있다. 무리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맏형을 떠올리고 세이야들은 제각각 시선을 피했다. 괜한 죄책감이 드는 건 기분 탓이다.
시선을 돌리던 시류는 무심코 사라와 시선이 맞았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한탄이 터져 나온다. 시류는 착잡한 마음으로 다시 형제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런 사람이 어쩌다 샤카의 눈에 들었는지.”
시류의 중얼거림에 그 자리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적으로 만났었던 그들과 샤카의 첫인상은 당연한 말이지만 최악이었다. 이후 성전에서 함께 싸웠기에 모두, 특히 비탄의 벽 앞에서 그의 각오를 마주했던 세이야와 슌에게 최악의 감정은 상당수 사라졌지만─ 제멋대로에 사람을 깔보던 첫인상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한숨이 흘러내리는 사이에서 불쑥 세이야가 입을 열었다.
“……왠지 불쌍해.”
“……동감이다.”
도와주지 않으면, 하고 지극히 소년다운 순수함으로 사라와 카뮤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형제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시류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사라도 카뮤와 미로 쪽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그 움직임에 미로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까 희미하게 웃던 건 어떻게 됐는지 사라는 눈에 빛을 내고 있었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이다.
하지만 사라는 미로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말든 카뮤의 팔을 잡고 그저 간절하게 외칠 뿐이었다.
“천사가 아니면 요정입니까?”
“어느 쪽이든 사랑스럽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누가 이 녀석들 좀 말려줘….”
괴짜들 사이에 끼인 미로의 절망은 깊어만 갔다.
“그 녀석 진짜 이상하다고!”
“…갑자기 뭐야?”
울분을 토하는 미로를 보고 아이오리아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현재 두 사람이 있는 곳은 교황궁의 복도로 사가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러 가다 우연히 만난 참이었다. 별로 소원한 사이도 아니라 아이오리아는 당연히 미로에게 말을 걸었다. 그 뒤로는 별 의미가 없는 잡담. 그러던 도중 문득 사라에 관한 얘기가 나온 것뿐인데 갑자기 이런 반응이다.
그러나 아이오리아가 어떻게 반응하든 말든 미로는 구시렁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미로가 괜히 이럴 남자가 아닌 걸 알기에 무슨 일이 있나 짐작했지만 당연히 아이오리아가 그 상세한 내막을 알 리가 없다. 얘기를 하려면 제대로 설명을 해주든가. 뭐라고 대꾸할 말도 찾지 못하고 아이오리아는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문득 시야에 한 여성의 모습이 잡혔다. 동양 속담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이 있다더니, 사라다. 미로도 그를 눈치챈 것인지 어느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가오는 기척을 눈치챘는지 사라가 뒤돌아보았다. 표정 없는 다갈색 눈동자가 두 남자를 담고 살짝 부풀어 올랐다.
“안녕하세요.”
묵례만 하는 가벼운 인사에 아이오리아도 손을 들어 짧게 응수했다. 사라가 빤히 저를 쳐다본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 같아 아이오리아는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아이오리아와 미로가 다가오는 동안 멈춰 서있던 사라가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아이오리아도 순순히 그녀의 보폭에 속도를 맞췄다. 다리 길이의 차이인 건지 성격의 차이인 건지, 사라가 걷는 속도는 아이오리아에 비하면 느긋하다.
아이오리아는 흘끗 곁눈질로 사라를 내려다보았다. 잘 단련된 전사인 자신과 비교하는 것도 뭣하지만 사라는 역시 작다. 이렇게 나란히 서 있으면 그 어깨가 얼마나 왜소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아마 아직 어린 세이야들과 비교해도 사라 쪽이 훨씬 가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가 들고 있는 책들이 묘하게 크게 느껴졌다.
그때, 아이오리아의 시선을 눈치챈 것처럼 사라가 조용하게 입술을 열었다.
“집무실에 가는 겁니까?”
“그래. 너도?”
“예. 그런데…….”
도중 사라가 부자연스럽게 말을 끊었다. 왜 그러지, 하고 살펴보니 사라가 묘한 표정으로 아이오리아의 옆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의, 그렇지만 경계 만발인 모습의 미로가 있었다. 비유하자면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고양이, 라기보다는 독침을 곤두세우고 있는 전갈일까.
왜 이런답니까? 하고 사라가 눈빛만으로 물어 아이오리아도 글쎄, 하고 눈빛으로 대답했다. 코스모도 사용할 수 없는 주제에 훌륭한 텔레파시다. 라고 어딘가 도피하는 것처럼 아이오리아는 머리 한구석에서 생각했다.
아마 아까부터 미로가 이상한 녀석이라고 계속 투덜대던 것과 관계가 있겠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더욱더.
기실 아이오리아에게 사라는 이해하기 힘든 상대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여성과 다르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물론 아이오리아도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평범한 여성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그것이 곧 그녀가 괴짜인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아이오리아는 문득 앞에서 다가오는 경쾌한 발소리를 들었다. 시선을 향하고 상대를 확인하는 것보다 먼저, 저쪽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 아이오리아! 미로! 사라!”
웃으며 인사하는 세이야와 슌의 모습을 확인한 아이오리아의 입가가 무심코 느슨해졌다. 저 페가수스의 소년을 만나면 아이오리아는 언제나 이렇게 된다.
세이야의 스승─마린─과 친분이 있던 아이오리아는 이 소년이 처음 그리스에 왔을 때부터 그를 줄곧 지켜봐 왔다. 처음에는 그저 지인의 제자, 라고 생각하던 것이 바뀌었던 건 언제였을까. 고집이 세고 건방지지만 잘 웃고 목표를 향해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소년. 세이야와의 대화가 형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된다는 점도 아이오리아가 친밀감을 느끼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아이오리아는 세이야를 친동생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마음은 세이야가 친누나를 찾고, 다른 형제들이 생기게 된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의지할 사람이 아이오리아와 마린밖에 없었던 예전과 달리, 현재 세이야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허나 비록 그렇더라도 소년에게 자신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아낌없이 도와주리라고 아이오리아는 남몰래 결심하고 있었다.
막연히 그런 것을 생각하던 아이오리아는 문득 사라가 자신들에게 향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는 해도 극히 미세한 차이였지만─ 아이오리아가 무심코 입을 떡 벌리고 말았지만 사라는 그를 알아채지 못한 듯 상냥하게 소년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디 가?”
“천평궁에!”
기세 좋게 대답한 세이야의 옆에서 슌이 생긋 미소 지었다.
“노사가 맛있는 간식을 준다고 하셨거든요.”
엄청 기대하고 있어! 라고 세이야가 말하고 슌도 응,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내 서로 마주 보며 함박웃음. 주변에서 꽃이 퐁퐁 피어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착각만은 아닐 거라고 아이오리아는 생각했다.
아직 어린 브론즈 세인트들 중에서도 제일 막내인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은 모습은 어딘가 흐뭇하다. 흐뭇하지만.
아이오리아는 희미하게 목을 울리며 다시 사라를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아니, 오히려 아까보다 더욱 상냥한 모습으로 소년들을 대하고 있었다. 므우를 대할 때도 이 정도 까지는 아니었는데. 뭐지, 이 차별은.
“나중에 서고에 놀러 가도 괜찮나요?”
“물론.”
슌의 질문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사라가 곧바로 대답한다. 이 역시 자신들에겐 미묘한 사이를 두고 대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긍정의 대답을 듣고 그럼! 하고 세이야와 슌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복잡미묘한 아이오리아의 심정도 모르고 소년들의 모습은 경쾌하기 그지없다.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배웅하고 아이오리아는 천천히 사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의도치 않아도 표정이 무너진다.
사라의 얼굴은 평소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거야 언제나의 일이니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녀의 눈동자가 풀려있다는 것이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심지어 뺨마저 희미하게 붉히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아이오리아가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억눌린 사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둘 다 정말 천사구나.”
무뚝뚝한 말투로 잘도 감탄한다 싶다. 어이없어하는 아이오리아를 보고 미로가 자못 의기양양하게, 그러나 사라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성량으로 속삭였다.
“거봐!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확실히.”
아이오리아도 이번만은 미로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후 성역에서 그녀가 혹은 유아 취향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은 없었다. 새삼 몰라도 좋은 것은 존재하는 법이다.
덤1.
이것은 사라와 잇키가 처음 대면했을 때의 이야기다.
세이야들에게서 잇키를 소개받게 된 사라는 볼을 붉히며 딱 한마디만을 중얼거렸다.
“귀여워라.”
그 폭탄 발언에 모두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사가는 들고 있던 펜을 두 동강 내버렸으며, 카논은 바닥에 서류를 떨어트렸고 세이야는 마시던 홍차를 그대로 효가의 얼굴에 뿜었고 시류는 뿜는 대신 자기 다리 위에 쏟아버렸으며 슌은 과자를 문 채로 그대로 입을 딱 벌렸다. 마지막으로 그 말을 들은 당사자인 잇키로 말하자면 태어나서 처음 들은 말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정적이 귀에 아플 정도로 삐걱거린다. 절대영도가 우스울 정도로 차갑게 얼어버린 그 공간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카논이었다.
“너 어디 아프냐?!”
“정상입니다.”
거짓말!! 하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속으로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라는 천하태평이다.
순간적으로 어지러워졌지만 카논은 세상의 부조리를 혁파하기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자신에겐 지상의 평화를 지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 울분을 한껏 담아, 카논은 외쳤다.
“이렇게 남자다운데?!”
“남자가 귀엽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만.”
“벌써 16살이라고?!”
“고작 16살이겠죠.”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보기 드물게 절망하는 카논을 보고 사라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남자를 동정했다. 그 심정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멍청히 뒤에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가가 문득 중얼거렸다.
“샤카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또 샤카 녀석 때문이냐……!”
용케 사가의 중얼거림을 주워듣고 잇키는 분노했다. 제아무리 동생들 외엔 관심이 없는 그라지만 이렇게까지 사람 하나가 망가지면 절로 의분이 일어나는 법이다.
라고 소년이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르고 사라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싱글싱글 웃었다.
덤2.
뒤에서 세이야들을 흐뭇하게 관찰하는 사라를 보고 므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라고 해서 별반 다른 모습은 아니겠다만 사라의 모습에는 조금 지나친 데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무심코 말이 튀어나왔다.
“사라는 세이야들이 정말로 맘에 드나 보군요.”
“음, 사실은 운명을 느꼈거든요.”
“그렇게 말하니 샤카랑 닮았네요.”
“…………므우.”
“……죄송합니다. 폭언이었습니다.”
따가운 사라의 시선을 받으며 므우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라가 아이들을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요.”
“아니, 확실히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지만…….”
“……않지만?”
“귀여운 아이들은 좋아하거든요.”
“……그렇, 습니까?”
살짝 볼을 붉히고, 어딘가 꿈결처럼 중얼거리는 사라의 모습을 보고 므우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래서야 현재 성역에 떠돌고 있는 소문─어딘가의 모 아가씨가 사실은 어린아이들 취향이라더라─을 부정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므우의 눈에 비친 사라는 정말 즐겁고 기뻐 보였다. 이전에 전혀 보지 못했던 모습. 그래서 므우는 많은 감정을 삼키며 그냥 웃어버렸다.
‘조금 질투 나네요.’
표기하는 걸 잊었는 데 성전에서 반년~1년 후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