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Epi.1 소년과 밤의 말 上
Boy and Nightmare
텐마는 책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시계를 보았다. 시곗바늘이 벌써 한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텐마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브러진 종이 상자들과 며칠 동안 정리한 덕분에 수가 많이 줄었다지만 여전히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단시간 내에 정리한다는 건 무리였다.
역시 점심을 먹고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싶어 텐마는 들고 있던 책을 대충 책장에 꽂아 넣고 부엌으로 향했다. 사실상 부엌도 아직 정리가 덜 되었지만 매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 다른 곳보다는 그나마 나았다.
뭘 만드는 게 좋을까. 바쁘기도 하니 역시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만드는 게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텐마는 움직임을 멈췄다. 안이 텅 비어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텐마는 무심코 옅은 신음을 흘렸다. 평소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요 며칠 간은 짐을 정리하느라 바빠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고민은 짧았다. 결국 텐마는 시장에 가기 위해 외투와 지갑을 챙겼다. 점심이야 건너뛰더라도 저녁과 내일 아침까지 거를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대로 현관으로 향하다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도코, 시장에 갈 건데 뭐 살 거라도 있어?”
2층에 있을 동거인을 향해 소리 높여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상대의 인간 같지 않은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못 들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텐마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음 순간 도코가 오늘 새벽에 시온을 따라 일하러 갔다는 것을 떠올렸다. 분명 뒷길로 이동한다지만 꽤 멀리까지 가야 하니 돌아오는 것은 빨라도 늦은 밤이 될 거라고 했던가. 자고 있다가 억지로 깨워져 비몽사몽한 상태로 들었다지만 아침까지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워낙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터라 평소처럼 행동해버렸다. 버릇이란 무섭다.
잠깐 한숨이 새었다. 도코가 없다면 굳이 점심을 만들 것까지는 없지만 시장에 가야 한다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나가는 김에 점심은 밖에서 먹기로 결정하고 텐마는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실내에만 있었기 때문인지 햇살이 조금 강하게 느껴졌다. 텐마는 잠깐 멈춰 서서 눈부신 듯 하늘을 올려다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신발 밑창 너머로 거친 흙과 돌멩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방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드문드문 세워져 있는 집 지붕의 선명한 색과 녹색의 대비가 확연하다. 서로를 이어주고 있는 길은 간신히 끊이지 않고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눈을 감으면 바람이 풀잎에 스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그야말로 동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시골의 모습이다. 어딘가 향수를 느꼈다.
이전에 텐마와 도코가 살고 있던 곳도 시골이었지만 이 정도로 낙후된 곳은 아니었다. 이곳에 비하면 오히려 커다란 도시처럼 느껴질 정도니 말 다한 거다. 사실 어지간한 이유가 아니고서야 굳이 이런 곳까지 이사 올 이유도 없다.
보통의 십대라면 이런 시골에 오는 것을 꺼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텐마는 이 마을이 맘에 들었다. 딱히 도시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성향상 이런 한적한 곳이 더 편했다.
‘요정도 더 많을 테고.’
물론 그것은 도코의 이유이지 텐마의 이유가 아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혼자 납득하고 텐마는 걷는 속도를 높였다.
조그만 마을이기에 시장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 와본 시장에 텐마는 조금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기자기한 벽돌이 깔린 길. 양옆에는 가게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어느 곳이든 전부 밖으로 매대를 내어놓고 있다. 별 대단한 물건은 없었지만 갖가지 색채가 눈을 어지럽혔다. 상상 이상으로 북적거리고 활기찬 곳이다. 누구나 웃고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 깊다.
그렇지만 조금 곤란할 지도 모르겠다 싶어 텐마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쩐지 딱 봐도 골목길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깊은 곳까지 들어갈 일이야 없겠다만은 혹여나 그런 일이라도 생긴다면 길을 찾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예상외로 집에는 늦게 돌아갈 지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길을 잃는다면 물어보면 될 일. 텐마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솔직히 지금은 쓸데없는 걱정보다 아까부터 계속 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는 배를 어떻게 하는 일이 먼저였다.
적당한 식당을 찾기 위해 일단은 대로를 따라 걸었다. 주변의 소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일단 익숙해지면 소음도 별달리 거슬리지 않았다.
시장에는 흥미로운 것이 많았다. 그저 걷고 있을 뿐이라 해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빼앗기고, 거기에 정신을 팔리고 만다. 제법 사람이 부대끼고 있는 탓도 있다. 덕분에 텐마는 골목길에서 누가 튀어나오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우왓?!”
휘청거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뜻밖의 상황에 놀라 바로 대처하지 못했다. 몸이 넘어가는 감각에 텐마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금방이라도 통증이 밀려올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가 부딪히는 대신 팔을 강하게 붙잡혔다. 굳건한 힘으로 몸이 바로 세워진다.
“미안. 괜찮아?”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텐마는 슬며시 눈을 떴다. 바로 앞에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호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단단한 입매는 일견 고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상냥한 분위기를 가졌다는 데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터였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지켜주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더 밝은색이었다면 성화에 나오는 천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유리 구슬 같은 푸른 눈동자가 일순 반짝거렸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고 난 뒤에야 텐마는 겨우 자신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제야 몸을 바로 하며 남자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섰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어지간히도 놀랐나 보다. 진정하기 위해 호흡을 고르는데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다친 덴 없어? 정말 미안하다.”
거듭된 사죄에 텐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가 돼서야 겨우 남자와 시선을 똑바로 맞출 수 있었다.
“으응, 아냐. 나도 제대로 앞을 안 보고 있었고.”
미안, 하고 중얼거리자 남자가 설핏 웃는다. 그 모습에 텐마가 무심코 감탄하는 데 문득 옆에서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남자와 매우 닮은, 자신 또래의 소년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뜨거운 눈빛이다. 의미를 알지 못해 텐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무심코 힐난하는 듯한 말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소년은 그 말투에 언짢아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감탄하는 것 같더니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바싹 붙였다. 얼마나 가깝게 붙였는지 상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일 정도다.
소년의 눈동자는 남자보다 훨씬 선명한 푸른색이었다. 거기에 넋을 뺏겨 반응하는 게 늦었다.
“너, 정말 인간이야?”
“…하?”
절로 어처구니없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잠깐이지만 텐마는 소년이 어딘가─특히 머리가─ 아픈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안타깝지만 소년이 농담을 하고 있다거나 시비를 걸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다른 건 어쨌든 소년의 표정은 정말 진지함 그 자체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이 문제다, 내용이. 어딜 보나 평범한 인간인 자신에게 왜 저런 질문이 던져지는 걸까. 아니, 그보다 좀 떨어지지 않을래.
“잠깐, 레굴루스. 실례잖아.”
텐마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남자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소년을 제지했다. 당연한 행위였으나 소년은 불만인 듯 입술을 삐죽이며 남자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이 녀석 이상하다고, 제대로 보이지 않는걸.”
사람의 면전에다 대고 이상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게다가 안 보이는 건 또 뭐야. 텐마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지간히도 무례한 녀석이다 싶었다. 오히려 그래서인지 별다른 화도 나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 건 텐마 뿐인 듯했다. 소년의 말에 그나마 정상적 반응을 보이던 남자가 안색을 확 바꾸곤 천천히 텐마를 살핀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시선. 가득 찬 의심. 탐색하는 게 분명한 시선에 텐마는 아주 잠깐만 참다가 결국 폭발했다.
“도대체 사람을 두고 뭐하는 거야!!!!!”
크게 소리치자 남자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얼핏 쓴웃음이 지나치는 것도 같았다.
“아, 미안.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놀라서.”
소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상하지?”
“이상하긴 하지.”
“……그러니까 뭐가 이상하냐고!!”
또 자기들만의 세상이다.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답답해서 텐마가 발을 쾅쾅 구르자 남자가 곤란한 듯 턱을 매만졌다.
“아니, 이게 설명하기 조금 곤란한 내용이라…….”
물론 그딴 변명이 통할 리가 없다. 텐마는 시선으로 열심히 설명을 촉구했다. 그에 잠깐 망설이던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려고 했다. 허나 타이밍 나쁘게도 그 순간 사방에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에…….”
누군가가 어설픈 목소리를 흘렸다. 삼 초 후, 삽시간에 텐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때문에 아직까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이 타이밍에 배가 울릴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텐마는 있는 힘껏 원망을 담아 둘을 노려보았다. 당연하지만 그 원망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천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괜히 얄밉다. 쓴웃음을 지으면서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라면 말할 것도 없다.
잠깐 침묵이 흐른다. 그 기묘한 상황 속에서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도 길어질 것 같으니까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할까.”
텐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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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외로 길어질 것 같아 상하편으로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누고 보니 별로 긴 것 같지도 않은.....◐◐
소년 발라드 대망의 1편! 그리고 다음 편은 1년 뒤에!! ....는 물론 농담입니다. 빨리빨리 써야죠. 근데 또 데프텐ts가 쓰고싶고..... 브론즈도 쓰고싶고...... 정작 손은 안 움직이고.... 총체적 난국이네요('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