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텐마+시지포스]Cocktail-party Effect
지나치게 일을 하고 있던 탓인지 머리가 멍해졌다. 주의하고는 있지만 역시 피곤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근에는 과로하는 경향이 있으니 더욱 그렇다. 아무래도 잠시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한 시지포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아무도 이쪽엔 신경 쓰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자 비교적 서늘한 공기가 뺨을 때렸다. 시지포스는 굳은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어깨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나마 살 것 같다.
복도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기에 잡음이 흘러넘쳤다. 이제는 귀까지 먹먹해지는 느낌이 든다. 어지간히 피곤했나 싶어 시지포스는 쓴웃음을 흘렸다.
“………?”
그대로 휴게실로 걸음을 옮기던 도중, 시지포스는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실 시지포스도 자신이 왜 걸음을 멈췄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얼핏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귀에 새겨진 지인의 목소리가. 그렇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원들과 손님들, 그리고 청소부들의 모습뿐. 어지간히도 변함없는 일상의 모습이다.
설마 이제는 환청까지 들린 건가. 시지포스는 진지하게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시지포스?”
그때 갑자기 이름을 불렸다. 이번에는 분명 환청이 아니다. 돌아보니 동료인 엘시드가 다가오고 있었다. 슬쩍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정 없는 말투와는 달리 무뚝뚝한 얼굴에 희미하게 걱정이 깔려 있었다. 어쩌면 어디가 아파서 멍하니 서있는 걸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무것도. 얼핏 아는 사람을 본 것 같기도 했는데─”
말끝을 흐리며 시지포스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상대의 모습은 없다. 하긴 그가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지. 시지포스는 설핏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봐.”
그렇지만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멀리서 익숙한 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시지포스는 눈을 깜빡였다. 이제는 환청에 이어 환각까지 보는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상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건물의 한구석, 사원들이 좀처럼 올 일 없는 곳에 있는 소년은 환상이 아니라 실체였다. 시지포스는 무심코 목소리를 높였다.
“텐마!?”
“응?”
부름에 완만한 동작으로 텐마가 고개를 돌렸다. 놀란 듯 크게 뜨인 눈동자가 다음 순간에 싱긋 웃는다.
“여─ 시지포스.”
거기에 이제는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기까지 한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졌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하지만 정말이지. 시지포스는 흘러나오는 한숨을 눌러 막으며 성큼성큼 텐마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소년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놀라기도 했지만 동시에 반갑기도 했다. 최근 일이 바쁘기도 했고, 서로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날만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뭔가 하고 싶은 말도 잔뜩 쌓여 있다.
하지만 역시 제일 처음으로 말할 건 하나뿐이다.
“텐마. 어째서 여기에?”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묻자 텐마가 일순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 모습이 어디까지나 어리게만 보였다.
“평소처럼 아르바이트야, 아르바이트.”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듯 텐마가 가볍게 손을 흔든다. 그제야 주변에 청소용구가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시지포스는 쓰게 웃고 말았다.
텐마는 고아다. 그래서 평소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아르바이트까지 할 줄이야. 어쩐지 조금 안타까워졌다. 동정해야 할 만큼 약한 아이도 아니건만 언제나 이렇게 태연한 모습만 보여주기에.
또래이기 때문일까, 시지포스는 이따금 텐마와 조카인 레굴루스를 겹쳐보곤 했다. 외모야 닮은 부분이 없다지만 천성이 비슷하고 미소가 비슷했다. 무엇보다 가족을 잃었다는 점까지. 게다가 레굴루스야 그나마 자신이 있지만 텐마에게는 주변에 기댈 어른조차 없다. 형제나 마찬가지인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힘들 때도 분명 있겠지.
사실 시지포스는 자신이 텐마를 돌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동정 때문이 아니다. 레굴루스는 둘째치고서라도 스스로가 이 소년을 맘에 들어 하고 있으니 가족으로 대하고 싶은 것뿐이다.
하지만 그런 제안을 듣는다면 텐마는 분명 쑥스러워하고, 기뻐하고, 마지막에는 거절하리라. 늘 그렇듯. 자존심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텐마는 도움은 받더라도 타인에게 기대어 살아가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올곧고,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소년.
복잡한 기분에 괜히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자 텐마가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말만 항의지 얼굴은 웃고 있다. 쑥스러우니까 그걸 감추려고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뿐이란 건 잘 알고 있다. 이런 점은 레굴루스완 또 다르다.
문득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시지포스는 텐마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얼핏 푸른 그림자가 스친다.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시야 끝에서 오랜 친우가 삐딱하게 입술을 치켜 올렸다.
“아스프로스.”
시지포스는 대답하는 대신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딱히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이런 곳에서 들키니까 굉장히 미묘한 분위기가 돼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상한 오해를 하진 않겠지만. 예감이 영 안 좋아 시지포스는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음. 그럼 난 가볼게.”
그렇게 생각한 건 시지포스만이 아닌지 텐마가 은근슬쩍 자리를 뜨려고 했다. 소년 나름대로 분위기를 읽으려는 생각이었겠지만 좋은 선택인지는 애매하다. 솔직히 시지포스는 잠깐 텐마를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마땅한 이유가 없어서 포기했지만.
그대로 총총 걸어가던 텐마가 얼마 안 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시지포스는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텐마가 살짝 몸을 틀어 손을 작게 흔든다.
“그럼 수고해.”
“아, 그래. 너도.”
말을 마치자마자 텐마가 다시 걸어갔다. 어떻게든 빨리 움직이려는 모습이 걷는다기보다는 숫제 뛰고 있는 것에 가깝다.
무심코 텐마에게 답해줬던 시지포스는 그를 보다 아스프로스의 눈치를 살폈다. 딱히 필요는 없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스프로스도 역시 사라지는 텐마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흥미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두근두근 심장의 고동이 올라간다. 고동이 최고점에 달한 순간 아스프로스가 짧게 웃었다.
“설마 네가 밀회를 할 줄은 몰랐는데.”
단정에 가까운 말에 시지포스는 뿜었다. 황당해서 아스프로스를 쳐다봤지만 미묘한 미소를 걸친 얼굴은 언제나처럼 속을 알기 어렵다. 설마 진담인 것은 아니겠지. 그런 일이야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불안해서 시지포스는 애써 해명을 내뱉었다.
“……레굴루스의 친구야.”
“과연. 14살이나 연하라니. 너무 어린 것 아닌가?”
“…………아스프로스.”
가끔 지나치게 짓궂어지는 친우의 행태에 시지포스는 이번에야말로 성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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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2604자
이젠 나도 내가 뭘 쓰는지 모르겠다....(-_- 사실 이 글은 아주 예전에 썼던 텐마+데프 글 중간에 들어갈 내용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