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사가세이]Boisterous Happening
여체화 주의
각성은 언제나 안온한 기분으로 이루어졌다.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과 얼굴 위로 어리는 기분 좋은 햇살. 무엇보다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세이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 역시. 시야에 푸른색이 한가득 번졌다. 사가. 입술이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부른다. 깨어나면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세이야의 가슴을 간질였다.
행복함에 저절로 입술에서 미소가 샌다. 세이야는 참지 못하고 실실 웃음을 흘리며 사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서로 섞여드는 체온이 사랑스럽다.
살짝 시선을 올리자 사가가 지극히 편안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항상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는 평소완 달리, 잠들어 있을 때만큼은 사가도 어떠한 근심도 없이 무방비한 어린아이 같다. 이 남자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세이야만의 특권이다.
“음…….”
그때 사가가 작게 뒤척였다. 깨어나려는 걸까. 매일 무리하고 있으니 조금 더 자도 좋을 텐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세이야는 이끌린 듯 팔을 뻗었다. 깨우지 않도록 사가의 뺨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얹는다. 그 순간 세이야는 심각한 위화감을 느꼈다.
시야에 들어온 건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아직 어린 만큼, 세이야의 손은 성인과 비교하면 한참 작았다. 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손은 그 크지 않던 손보다도 훨씬 작다. 게다가 뼈대도 가늘고 피부가 묘하게 매끄럽다. 상처투성이인 것만은 변함없지만 어쩐지 더 부드럽게 보이기도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패닉에 빠진 세이야가 굳어있는 사이, 사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얼결에 부드러운 푸른색 눈동자와 눈이 맞았다. 세이야는 반사적으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려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세이야?”
뻣뻣하게 얼어있는 세이야가 이상했던 것인지 사가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걱정이 어린다.
“왜…….”
왜 그래? 하고 물으려던 말은 채 끝맺음 지어지지 못했다. 소년의 모습을 확인한 남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든다. 아무래도 세이야가 알아차린 위화감을 사가도 깨달은 모양이다. 얼굴에서 가슴께로 남자의 시선이 흐르고, 그곳에 눈동자가 못 박혀 떠날 줄을 모른다.
시체나 다름없이 새파랗게 변한 사가의 얼굴을 보고 세이야도 조마조마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를 확인하고 다시 굳었다.
“……뭐야 이건.”
아직 어린 세이야의 신체는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가늘긴 했지만 제대로 단련된 근육에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 단단했던 가슴이 현재는 부드럽게 변한 데다 심지어 완만하게 솟아있기까지 했다. 가슴만이 아니다. 잘 살펴보면 허리도, 팔도, 다리도,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신체 전부가 가늘어지고 둥근 곡선을 그리고 있다.
꿈? 이거 꿈인가? 꿈이지? 꿈인 거지??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이야는 강하게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매정한 연인은 세이야가 꿈으로 도피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여자가 된, 건가…….”
확인하는 것처럼 남자의 굵은 손가락이 가슴에 닿았다. 피부를 매만지는 적나라한 감각에 세이야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묘한 쾌감보다는 위화감이 훨씬 컸다. 분명 이 물컹거리는 감촉은 꿈이 아니다.
한 박자 늦게 소녀의 비명이 성역의 아침을 갈랐다.
직후, 어디선가 잇키가 난입하고 같이 쌍아궁에 살고 있던 카논이 놀라 문을 박차고 들어온 데다 세이야의 비명을 들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코스모를 통한 텔레파시를 날리는 둥 난장판이 벌어져 결국 이른 아침부터 교황궁에는 골드 세인트 전원과 세이야를 비롯한 브론즈 세인트 다섯 명이 전부 모이게 되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세이야는 어깨를 움츠렸다. 제아무리 둔하고 무신경한 세이야라지만 이렇게까지 시선이 집중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남에게 별로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라는 사실도 부끄러움에 박차를 가했다. 여자가 되어버린 모습 같은 거,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을 리가 없잖아.
기댈 곳을 찾듯, 무심코 곁에 있던 사가의 옷자락을 붙잡자 남자가 가볍게 세이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세이야는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뺐다. 조금 안심이 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신은 안쓰러움을 가득 담아 세이야에게 자애롭게 말을 걸었다.
“정말 큰일이네요. 세이야.”
“아가씨, 눈이 웃고 있어.”
효가의 지적에 사오리가 말없이 후후 웃는다. 그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고 세이야는 역시, 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신이라고는 해도 사오리는 아직 13세의 소녀다. 거기에 어린 시절 워낙 애지중지 키워진 터라 상당히 말괄량이인데다 제멋대로인 부분도 있다. 지금이야 그런 점이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본래 성격이 어디 가질 않았다는 걸, 어린 시절부터 교류가 있었던 세이야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얼핏 봐도 곤란해 하기는커녕 한껏 즐기고 있는 게 다 드러났다. 아니, 즐기고 있는 건 사오리만이 아니다. 처음엔 비명을 듣고 세이야를 걱정해서 모인 골드 세인트들도 상황을 알고 난 지금은 전부 재미있다는 듯 세이야를 보고 있다. 결국, 자신을 제대로 걱정해 주고 있는 건 사가랑 자신의 형제들뿐이다.
그 때, 뒤로 물러서 있던 잇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들이닥친 막내의 불행에 맏형의 얼굴은 이미 잔뜩 일그러진 상태다.
“어이, 설마 네가 한 건 아니겠지.”
“……설마요.”
잇키의 추궁에 사오리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하기까지 미묘하게 시간이 걸렸다. 그 사실을 알아챈 잇키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진다.
“어쩐지 수상한데.”
“기분 탓이랍니다, 잇키. 그런 일을 제가 실행에 옮길 리가 없잖아요?”
호호호, 하고 사오리가 손으로 입가를 살포시 가리고 웃었다. 아름답지만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보고 그 자리에 있던 브론즈 세인트 전원은 깨달았다.
‘생각한 적은 있긴 있구나, 이 여자.’
그렇지만 여신에게 이길 수 없는 게 세인트란 존재다. 잠시 입술을 삐죽이고 사오리를 바라보던 세이야는 곧 깔끔하게 추궁을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 애당초 덤벼봤자 본전도 못 찾을 테고, 무엇보다 지금은 미수인 계획에 대해 따지는 것보다 해결책을 찾는 게 더 시급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도 신이니까 뭔가 알 거 아냐! 하고 간절함을 가득 담아 물어본 것이지만 사오리는 세이야의 기대를 시원하게 배신했다.
“모릅니다.”
“하?”
깔끔한 여신의 대답에 세이야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얼어붙었다. 태연한 건 오직 사오리뿐이다.
“원인도 해결법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확인사살에 세이야는 절망했다. 마치 직행으로 나락에 떨어진 기분이다. 아니, 코큐토스에 갇혀있을 때도 이렇게까지 절망적인 기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지불식간에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넘친다. 분한 것인지, 억울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슬픈 것인지 세이야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굉장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세이야는 마지막 오기로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남자가 고작 이런 일에 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때, 부드러운 것이 눈가에 닿았다. 그것이 남자의 손가락이란 것을 깨닫고 세이야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시야에 곤란한 듯 웃고 있는 사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걱정하지 마, 세이야.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다.”
사가는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세이야를 위로했다. 믿음직스러운 연인의 모습에 세이야는 희미하게 볼을 붉혔다. 그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도 자신의 곁에는 사가가 있다. 사가라면 반드시 방법을 찾아줄 것이다. 그런 확실한 믿음이 세이야에게는 있다.
“사가…….”
조금 수줍게 웃어 보이자 사가도 상냥한 미소를 되돌려 준다. 그 미소에 살짝 가슴이 옥죄여 세이야는 무심코 장소도 잊고 사가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 순간─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형제다. 내버려둘 수는 없지.”
“우리를 믿어라, 세이야.”
요령 좋게 슌과 효가와 시류가 순식간에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개중 유일하게 잇키만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등 뒤로 닿는 시선이 무섭다.
얼결에 비탄의 벽에 가로막힌 세이야는 어정쩡하게 뻗었던 팔을 움츠렸다. 그대로 시류의 어깨너머로 슬쩍 사가의 모습을 살피자 어딘지 모르게 어깨가 축 처진 모습이 보인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세이야는 속으로 미안, 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왠지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미묘한 공기를 가르듯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라는 사오리의 짧은 응답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세인티아 중 한 명인 미이다. 유독 그녀의 가느다란 팔에 한가득 들려 있는 쇼핑백이 시선을 끌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의아해하는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이는 고개를 들어 사오리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오리 님. 말씀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고마워요, 미이.”
사오리는 미이에게서 쇼핑백을 받아들고 빙글 세이야에게로 몸을 돌렸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미소에 세이야는 무심코 어깨를 튕겼다. 세이야도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당한 게 많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이야. 당신의 옷입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세이야는 얼결에 헤? 하고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그에 사오리의 미소가 더욱 깊어진다.
“전에 입던 옷은 맞지 않을 테지요?”
“아, 뭐.”
아아, 그런 얘기인가 하고 세이야는 납득했다.
성장기라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여자가 되어버린 이상 신체가 작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몸에도 제법 굴곡이 생겨 전혀, 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남자였을 때 옷을 입는 것은 조금 불편하다.
설마 거기까지 신경 써 줄지 몰랐기에 세이야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그 순간 사오리가 강하게 세이야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 하고 세이야가 당황하는 사이 이번에는 미이가 반대쪽 팔을 잡는다.
순식간에 여성들에게 구속된 세이야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여신은 반박이 불가능한 미소로 모두에게 명했다.
“지금부터는 여자의 영역이니 다들 물러나세요.”
골드 세인트들을 가볍게 압도하는 그 미소에 불복하는 자는 없었다.
“자, 잠깐!! 갑자기 옷부터 벗기지 마!!!”
“어머, 여자끼리니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세이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사오리 씨!!!!”
젖 먹던 힘을 쥐어짜 간신히 마수의 손길에서 벗어나 쇼코의 뒤로 숨자 사오리가 심히 아쉬운 얼굴을 한다. 그 모습에 세이야는 더더욱 쇼코에게 몸을 붙였다. 지금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과 사오리와 미이, 그리고 쇼코 단 넷뿐이다. 즉, 여기서 제 편이 되어줄 건 쇼코 밖에 없단 소리다. 그러니 세이야가 쇼코에게 기대는 것도 당연지사. 너를 믿고 있어, 쇼코!
하지만 단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은 것인가 아니면 그저 아테나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가, 마지막 방패는 간단하게 세이야의 기대를 배반했다.
“세이야 씨,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곤란해요.”
그렇게 말하고 쇼코가 슬쩍 세이야의 앞에서 비켜선다. 충격을 받고 세이야는 무심코 쇼코의 옷자락을 부여잡았지만 그 손마저도 부드럽게 떼어진다. 완전한 배반이다. 세이야는 원망을 참지 못하고 쇼코를 노려봤다. 그에 마지막 남아있던 양심이 찔린 듯 쇼코가 시선을 피했다. 허나 제아무리 불쌍하게 여겨봤자 동정은 동정일 뿐, 실질적 도움은 되지 못했다.
쇼코가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사오리와 미이가 손을 뻗어왔다. 거침없이 옷을 파고드는 여자들의 행동에 세이야는 왁왁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팔을 내저었다.
“내가, 내가 벗을 테니까!!!”
다급한 외침에 그렇다면 하고 사오리가 조금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그렇지만 눈동자는 완전히 웃고 있다. 그를 보고 세이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완전히 조롱당하고 있다.
세이야는 머뭇거리며 옷자락을 잡았다. 사오리는 여자끼리니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말했지만 역시 여자끼리라도 맨몸을 보이는 건 부끄럽다. 정신은 아직 남자인 데다, 무엇보다 이런 미인들 앞이니까. 그래도 버텨봤자 억지로 벗겨질 뿐이라 세이야는 간신히 상의를 벗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조금 차갑다.
드러난 매끈한 피부를 보고 미이가 어머, 하고 탄성을 올렸다. 그에 세이야는 귀에 열이 몰리는 걸 자각했다. 완전히 수치사하기 일보 직전이다. 하지만 세이야가 부끄러워하든 말든 주변 상황은 막힘없이 진행됐다.
“그럼 미이, 옷을.”
“네.”
그렇지만 눈대중으로 산 거라 맞을지 잘 모르겠네요, 라고 중얼거리며 미이가 쇼핑백에서 물건을 꺼낸다. 미이에게로 시선을 돌린 세이야는 그녀가 꺼낸 것을 보고 무심코 켁 짜부라진 것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미이가 들고 있는 건 원래대로라면 세이야와 전혀 연관이 없었어야 할 여성속옷이었다. 그것도 레이스가 잔뜩 달린 귀여운 속옷이다. 반사적으로 팔로 가슴을 가린 세이야는 입을 뻐끔거렸다. 무심코 목소리가 떨리고 만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소, 속옷까지 입을 필요가 있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세이야. 속옷이 가장 중요한 거랍니다.”
“하지만…….”
튀어나오려던 반박은 니케로 바닥을 쾅 찧는 사오리의 행동에 틀어 막혔다. 세이야도 눈치는 있다. 여기서는 더 말해봤자 위험하단 건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용히 입을 닫은 세이야를 보고 사오리는 미소 지으며 미이에게 눈짓했다. 눈짓에 따라 미이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움직였다.
“그럼 팔을 치워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다짜고짜 속옷을 들이대는 행동에 세이야는 기겁했다.
“자, 잠깐! 내가 입을게!!”
“하지만 입는 법을 모르시잖아요?”
확신을 담은 담담한 질문에 세이야는 미이의 웃는 얼굴로부터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다. 무심코 앓는 소리가 샌다. 확실히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세이야에겐 여성 속옷을 제대로 착용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한 세이야는 얌전히 가슴을 가리고 있던 팔을 풀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의 포기인지 모르겠다.
미이가 팔을 뻗어온다. 속옷을 입혀주며 어쩔 수 없이 가슴과 등에 닿는 손가락은 사가의 손가락과 다르게 작고 부드럽다. 무심코 사가의 얼굴을 떠올리고 세이야는 후회했다. 이럴 때 사가를 생각해서 어쩌자는 걸까.
허나 세이야가 무엇을 생각하든 말든 미이의 행동은 막힘없이 진행됐다. 완전히 착용을 끝내고 미이가 한 발짝 물러서자 세이야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해.”
세이야의 솔직한 감상에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 모두가 가늘게 웃음 지었다. 어머 어머, 하고 뭔가 기특한 눈으로 보는 게 완전히 막내 여동생 포지션이다.
“후후, 그러면 이제 옷을 골라야겠네요. 어느 게 좋은가요, 세이야?”
그렇게 말하며 사오리가 옷을 주섬주섬 꺼낸다. 데님 쇼트 팬츠, 셔츠, 플레어스커트, 블라우스, 거기에 부츠와 스니커즈까지. 무슨 마법의 가방이라도 되는지 끝도 없이 나오는 천과 레이스의 행렬에 세이야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많아도 너무 많다. 거기에 전부 하늘하늘 불편해 보이는 옷들뿐이다.
세이야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어떤 것도 입고 싶지 않다, 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오리의 눈총을 받을 게 뻔했기에 세이야는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적당히 편한 걸로 부탁해.”
하지만 이미 세이야의 말은 모두에게 닿지 않고 있었다.
“이게 어떨까요?”
“난 이쪽이 좋은데.”
“세이야 씨라면 이것도 어울릴 것 같네요.”
“……내 의견을 물어본 이유는 뭐야.”
마침내 세이야는 먼눈을 하고 천장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위에는 속옷만 입고 있기 때문인지 조금 쌀쌀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열을 띠기 시작하는 여성들의 토론은 좀처럼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몇 시간이나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세이야. 말하는 걸 잊었습니다만.”
세이야가 슬슬 쌍아궁으로 돌아가 버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사오리가 말을 걸었다. 시선을 돌리자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사오리의 눈동자가 보였다.
사오리는 마치 성전에 임하는 것처럼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에 세이야는 무심코 등을 쫙 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세이야는 두려움 반, 긴장감 반으로 사오리의 말을 기다렸다.
“피임은 꼭 하셔야 해요.”
“사오리 씨!!!!”
비명을 내지른 세이야는 현기증 때문에 그 자리에 푹 엎드렸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역시 여자는 무섭다.
그리고 역시 그건 쓸데없는 충고였다고 세이야는 생각했다.
집무실은 마치 하계와 동떨어진 것처럼 소란스러움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어딘가 멀게 느껴진다. 엄숙할 정도로 고요한 공간에 간간이 펜이 종이 위를 내달리는 소리와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그 침묵 속에서 눈을 감으면 고서의 냄새와 잉크의 향이 맡아졌다. 낡고 고리타분한 냄새지만 세이야는 그런 것이 싫지 않았다. 당연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향인데 싫어할 리가 없다. 오히려 너무 좋아져, 이제는 그런 향이 맡아지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다.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세이야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현재 집무실에는 세이야와 사가, 단 둘뿐이다. 당연히 사가는 집무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지만 세이야는 별로 심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눈 보신이 되는 남자가 바로 앞에 있으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이쪽의 시선을 알아차린 것처럼 사가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와 같이 상냥함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부드러운 미소를 보고 세이야도 방긋 웃음을 터뜨렸다. 이 미소에 타의는 없다. 이 미소에는.
세이야의 모습을 확인한 사가가 안심한 것처럼 다시 집무로 돌아간다. 금방 자신을 잊은 것처럼 일에 몰두하는 연인의 모습을 보고 세이야는 사가에게 들리지 않게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에 사가는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도 그렇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침식을 잊고 일에만 몰두하는 점도, 자신과 타인에게 엄격한 점도, 그와는 다르게 세이야에게만 조금 무른 미소를 보여주는 것도, 전부 예전 그대로다. 하지만 딱 하나 변한 점이 있다.
여성이 된 지 벌써 일주일 째, 그동안 사가는 세이야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닿지 않았다.
사실 세이야도 처음엔 그 점을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여자가 되어서 머리가 복잡한데 사가와 그런 상황에 이르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다.
사가와 연인이 된 이후로 서로 일본과 그리스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바로 곁에 있는데 사가와 접촉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평소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만져오는 주제에,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닿기 싫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면 당연히 울컥하고 만다. 덕분에 세이야는 사가에게 역시 남자가 좋은 거야?! 라고 외칠뻔한 적도 있다. 뭔가 굉장히 미묘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말하기 직전에 멈추긴 했지만.
기껏 사오리 씨가 그런 충고까지 해줬는데 말이지. 만약 여신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세이야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무슨 수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밤, 집무를 마치고 사실에서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가는 문 너머에서 익숙한 코스모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무심코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매우 크고 따뜻한 이 코스모를 사가가 착각할 리가 없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역시나 세이야다. 문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세이야는 조금 우물쭈물하며 사가에게 말을 걸었다.
“들어가도 돼?”
“물론이다.”
대답하면서도 사가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사가의 방에 들어오는 데 있어 세이야가 망설인 적은 없다. 애당초 둘은 그렇게까지 예의를 따지는 사이가 아닌 것이다.
여러 의문이 들긴 했지만 사가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책을 책장에 되돌리고 돌아선 순간, 사가는 세이야의 복장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을 경직시켰다.
세이야가 입고 있는 옷은 어깨를 시원하게 드러낸 노슬리브의 원피스였다. 하늘거리는 재질의 천은 매우 얇은 것인지 언뜻 속살이 비칠 정도. 그것만으로도 미칠 지경인데 심지어 미니스커트라 그 아래로 쭉 뻗은 다리가 시선을 빼앗는다.
그대로 굳어버린 사가에게로 세이야가 다가와 푹 안겼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귀가 빨갛게 변해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천 너머로 자신보다 훨씬 높은 체온에 닿고 나서야 사가는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세이야, 그 복장은 도대체……?”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묻자 세이야가 흘끗 고개를 들어 사가를 바라본다. 소녀의 적갈색 눈동자엔 얼핏 물기가 어려 있다. 세이야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나 절묘한 각도에 사가는 열이 오르는 것을 자각했다. 이제는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사가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세이야는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역시 안 어울리는 건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당황한 사가는 무심코 세이야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닿아 반사적으로 팔에 힘이 들어갔다.
꽉 끌어안겨 답답한 것인지 세이야가 사가의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사가는 도무지 세이야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겨우 일주일이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 그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전에도 더 오래 떨어져 있던 적은 있었지만,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바로 옆에 있는데 참는 것과의 차이는 컸다.
계속 닿은 채로 있고 싶다. 이대로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여주고 싶다. 그래도 사가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겨우 세이야에게서 떨어졌다. 품 안의 싸늘함이 가슴에 사무친다.
“갑자기 왜 그런 복장을 한 거지, 세이야?”
시선을 맞추고 다시 그렇게 물으면 세이야가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지만 사가가 전혀 만져주질 않으니까!”
연인의 대담한 발언에 사가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세이야는 그런 사가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토해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섭섭함을 다 풀어버리고 말겠다는 태도다.
“남자일 때는 계속 만졌으면서 여자일 때는 전혀 만져주지 않고!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여자가 싫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유혹이라도 해서… 우왓?!”
너무 귀여운 것을 말하는 연인의 모습에 사가는 참지 못하고 다시 세이야를 껴안았다. 가느다란 몸이 품에 꼭 맞게 들어온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 세이야의 등이 옅게 떨렸다. 그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주면서 사가는 입술을 열었다.
“내가 참고 있었던 건 네가 자신이 여자가 됐다는 사실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남자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만큼 갑자기 여자가 된 현실에 세이야가 얼마나 절망하고 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래도 평소 생활이라면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조금은 편하게 지낼 수도 있을 터다.
허나 직접적으로 닿게 된다면 얘기는 다르다. 싫어도 자신이 여성의 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테고, 그 감각에 무척이나 힘들어하겠지. 때문에 사가는 일부러 세이야에게 닿는 일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닿아도 괜찮은가?”
“……사가라면 괜찮아.”
그렇게 소곤거리며 세이야가 목에 팔을 감아왔다. 부끄러운지 시선은 돌리고 있지만 바로 앞에 얼굴이 있으니 그 표정을 확인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희미하게 다홍으로 물든 얼굴이 어리면서도 어딘가 요염하다. 그 얼굴을 보고 사가는 더는 참지 않고 세이야에게 자신의 사랑을 가감 없이 쏟아 부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세이야는 어제와 전혀 다른 자신의 손을 확인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돌아왔네…….”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것도 엄청나게 미묘한 타이밍에.
하필이면 사가와 밤을 같이 보낸 다음 날 원래대로 돌아오다니, 역시 이건 신─예를 들면 사오리라든지, 사오리라든지, 사오리라든지─의 농간이라고 밖에 세이야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 말고는 원래대로 돌아온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면 혹시 사가랑 했기 때문인가.
그 순간,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 수치심에 습격당한 세이야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시트에 푹 얼굴을 묻었다. 뭔가 여러 가지 이유로 부끄럽다.
세이야는 곁눈질로 아직 잠들어있는 사가의 얼굴을 확인했다. 남자는 어젯밤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조금 얄밉다. 그래도─
“……뭐, 아무래도 좋나.”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사소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세이야는 팔을 뻗어 사랑하는 남자를 꼭 끌어안았다.
사가에게 닿을 때마다 세이야는 그 따스함에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이 들곤 했다. 아마 자신이 사가를 사랑하고 사가 또한 자신을 사랑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지속되는 한, 자신이 남자든 여자든 간에 이 품 안의 온기는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며 세이야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 일어나야 할 때까지는 여유가 있다. 지금은 그저 짧고 달콤한 꿈을 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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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9325자, 원인은 편한 대로 생각해 주세요
계속 여체화 보고싶어! 를 외치다 결국 쓰고만 글. 7월 안에 다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랄까 너무 외쳤나 이렇게 폭주해서 쓸 줄은 스스로도 몰랐지....
사실 여체화는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즉 보고싶다고 외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원래 최애라면 뭐든지 오케이인 거잖아요? 여체화든 유아화든 수인화든. 그렇니까 세이야라서 좋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