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H/카르데젤+알바피카]For Whom
blueskaia님 리퀘, 로캔 현대AU 카르데젤+알바피카
“어─이, 데젤. 아직 멀었어?”
“……이제 막 주문했을 뿐이잖아. 그리고 나에게 재촉해도 소용없다만.”
가볍게 대꾸하자 카르디아가 투덜거리며 어깨에 기대왔다. 무겁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친구의 행태에 데젤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둘의 친밀한 모습에 바로 앞에서 빵을 굽고 있던 아저씨가 하하 웃었다.
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성장기 청소년들이 아니긴 하지만 대학생도 배고프긴 매한가지다. 거기에 대학생의 무분별한 음주문화까지 곁들여지면 자연스레 대학 주변에는 음식집이 많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 이 지역은 대학을 중심으로 성장한 곳이기에 그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다시 말해 대학을 나오면 보이는 게 카페와 음식점밖에 없다는 얘기다.
둘이 현재 있는 곳도 그런 가게 중 하나였다. 음식점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다. 안쪽에는 기껏해야 네댓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공간밖에 없고, 대개는 음식을 테이크아웃 해 간다. 실제로 메뉴도 토스트나 와플, 간단한 음료뿐이니 노점이라는 쪽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본디 데젤과는 크게 인연이 없을법한 장소다. 하지만 카르디아에게 이끌려 오다 보니 어느새 단골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았다.
“자, 여기. 주문한 거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기다리고 있다 보면 금방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빠르다는 점이 이런 가게의 장점이다.
여태까지 축 늘어져서 칭얼거리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카르디아가 빠르게 움직여 제 몫을 낚아챘다. 그 모습에 데젤은 반쯤 어이없어하며 대금을 치렀다. 여전한 녀석이다.
역시 제 몫을 들고 가게를 나서자 바로 카르디아가 따라붙었다. 흘끗 보니 카르디아가 정말 즐겁게 핫도그를 먹고 있어 데젤도 토스트를 조금 베어 물었다. 빵과 야채와 햄의 맛이 났다. 동시에 소스가 조금 맛이 강해 데젤은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이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사 먹는 이유는 카르디아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표정이 안 좋아진 걸 보았는지 어느새 제 몫을 다 먹은 카르디아가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핥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카르디아는 데젤과 토스트를 번갈아 보곤 히죽 웃었다.
“편식하면 못쓴다고~”
그러더니 제멋대로 제 손에 들린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 데젤은 카르디아에게 얌전히 점심을 건네줬다. 실랑이 해봤자 귀찮기만 하다.
문득 카르디아가 입을 열었다.
“다음 강의가 뭐더라~?”
“‘전통시대 동양의 법과 사회’다.”
이름만 들어도 복잡할 것 같은 강의명에 카르디아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반대로 데젤은 지나치게 담담한 표정이다.
“귀찮은데 빠져버릴까~”
“이번에도 빠지면 낙제다, 카르디아.”
“진짜냐?! 어이, 데젤. 그러니까 어째서 그런 강의를 들은 거야!”
“……난 잘 듣고 있으니 문제없다. 애당초 문제가 있다면 남과 시간표를 똑같이 맞춰놓은 너에게 있겠지.”
“아, 그렇지만 시간표 짜기 귀찮다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카르디아를 보고 데젤은 이제 완전히 익숙해진 두통을 느꼈다. 제법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왔지만 카르디아의 이런 점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사실 카르디아가 자신과 시간표를 똑같이 짠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시간표를 어떻게 짜든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다. 그 때문에 흥미 없는 수업을 듣게 된 카르디아가 가끔─이라기보단 매우 자주─ 강의를 빼먹고 그러다 낙제점을 받게 되어도 자신에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그 역시 개인의 일이니까.
하지만 덕분에 카르디아의 출석과 과제를 챙기다 보니 카르디아가 무슨 짓만 저지르면 자신이 불리게 된 것은 조금, 아니 심각하게 문제다. 카르디아가 별로 나쁜 녀석인 것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곤란한 남자였으니까.
내가 어쩌다, 전생에 무슨 업보를 지어서 등을 생각하며 데젤은 어딘가 먼눈을 했다. 그 순간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와 의식이 자동으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카르디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선이 향한 곳엔 얼핏 봐도 다수의 사람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대부분 여성이란 점이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무슨 일인진 잘 몰라도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기에 카르디아는 반색했다.
“뭐야? 싸움이야? 그렇다면 내가 끼여 줘야─”
당장에라도 달려나가려고 했던 카르디아는 데젤에게 곧바로 뒷덜미를 잡혀 그러지 못했다. 항의의 시선으로 노려보자 데젤이 차갑게 일갈한다.
“네가 낄 이유는 없을 텐데. 그리고 저건 싸움이 아니다.”
“하?”
어이없어하는 카르디아에게 데젤이 짧게 눈짓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물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보였다. 그를 보고 카르디아의 표정이 더욱 어이없다는 듯 변했다.
“또냐? 질리지도 않나, 저 녀석.”
“그 말은 조금 어폐가 있군. 본인도 원해서 저런 상황을 만드는 게 아니다.”
“네, 네. 그러시겠죠.”
싸움이 아니라서 김이 빠졌는지 시큰둥한 얼굴의 카르디아를 보던 데젤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소란의 중심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재 수많은 여성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은 알바피카다. 싫어하기 때문에 본인 앞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지만 남자인 주제에 어지간한 여자들이 다 자괴감을 느낄 정도로 엄청난 미인이다. 그 탓에 조용히 지내고 싶은 본인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남녀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어택을 받고 있는 불운한 유명인이기도 했다. 덧붙여 그다지 친한 건 아니지만 카르디아나 데젤과는 인연이 있다.
한껏 곤혹스러워하는 알바피카를 보고 데젤은 고심했다. 안면이 없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너무 곤란해 하고 있으니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자신이 제멋대로 끼어들어도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옆에는 카르디아가 있다. 제 신념으로 이 변덕스러운 친우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저게 치정 싸움이 아니라 단순한 폭력사태였다면 어떻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말려들어 갔겠지만.
한숨을 내쉬며 친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카르디아도 이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카르디아가 웃는다. 귀찮다는 듯, 어쩔 수 없다는 듯, 도발적으로.
“잠깐 싸움에 끼고 올게~”
“……뭐?”
말릴 틈도 없었다. 어느새 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카르디아의 뒷모습을, 데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봤다.
“어이! 잠깐 이 녀석 좀 빌려 간다!”
여자들 사이에서 반쯤은 넋을 놓고 있던 알바피카는 갑자기 들려온 노성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깨닫고 보면 어느새 푸른 머리카락의 남자에게 강하게 팔이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는 자신을 알아챘는지 남자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드러난 얼굴을 보고 알바피카는 더욱 놀라 두 눈만 깜빡였다. 이 남자가 도대체 왜?
날카로운 얼굴이 코웃음 친다.
“핫! 네 녀석이 예뻐서 도와준 건 아니라고! 단지─”
말하며 남자가 앞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심코 그 시선을 좇던 알바피카는 앞에 또 다른, 녹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녀석이 그런 얼굴을 하면 어쩔 수가 없으니까.”
문득 귓가에 흘러든 목소리가 매우 즐겁고 부드럽게 들린다고 알바피카는 생각했다.